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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릉
 헌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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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사를 내려와 통일전으로 향한다. 통일전 가기 직전에 있는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을 둘러보는 것은 물론이다. 둘 다 사적으로 187호와 186호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

신라 49대 임금 헌강왕은 875년부터 886년까지 11년간 왕위에 있었다. 재위 3년인 877년에 왕건이 송악에서 출생하였고, 재위 4년인 878년 7월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쓰며 활약하던 바로 그 시절이다. 최치원은 헌강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온다.

헌강왕 시절은 태평성대였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지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처용이 나타난 것도 헌강왕 때의 일이다.

처용이 출현한 헌강왕 시절, 과연 태평성대였나?

정강왕릉. 경주에 있는 수많은 왕릉들 중 무덤 앞이 가장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곳이다. 신라 말기의 어수선한 정치 상황을 암시하는 듯 정강왕릉 앞은 불쑥불쑥 땅위로 솟구쳐오른 나무뿌리들로 온통 어지럽다.
 정강왕릉. 경주에 있는 수많은 왕릉들 중 무덤 앞이 가장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곳이다. 신라 말기의 어수선한 정치 상황을 암시하는 듯 정강왕릉 앞은 불쑥불쑥 땅위로 솟구쳐오른 나무뿌리들로 온통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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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은 예능에 재주가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삼국유사>는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 혼자서 보았다. 이때 왕 자신도 춤을 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에도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 등의 기록도 있다. 이를 두고 일연은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리려고 춤을 추어 경계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로운 일이 나타났다면서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겼으니 나라가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헌강왕릉 옆에는 그 다음 임금인 50대 정강왕의 무덤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동생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886년부터 887년이 그의 재위 기간이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죽으면서 남긴 다음 말이 실려 있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에 못하지 않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일을 본받아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삼국사기>는 정강왕이 죽으니 "보리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헌강왕도 "보리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강왕릉의 주소가 '경주시 남산동 산 53'이고 헌강왕릉의 주소가 '경주시 남산동 산 55'이니 삼국사기의 기록 그대로 형제는 나란히 묻혀 이승의 일을 모두 잊고 지내는 것 같다.

통일전 본전 들어가는 문 오른쪽에 김춘추(무열왕), 김법민(문무왕), 김유신을 기리는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통일전 본전 들어가는 문 오른쪽에 김춘추(무열왕), 김법민(문무왕), 김유신을 기리는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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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왕릉을 지나면 바로 통일전이 나온다. 통일전은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세 사람의 사적비와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삼국통일의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기록화가 줄지어 전시되어 있어 그런 대로 볼 만하다.

통일전 바로 옆에 유명한 연못이 있다. 서출지(書出池)다. 서출지는 이름 그대로 글[書]이 나온[出] 연못[池]이다. 488년(소지왕 10) 행차를 하는 왕에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 '까마귀가 가는 곳을 잘 살펴보시오' 하고 말을 건넸다. 신하들은 까마귀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지금의 남산동 양피사(당시 피촌)에 이르러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편지를 뜯어보면 한 사람이 죽고, 안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

서출지
 서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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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솟아나왔다. 노인이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겉봉에는 '이것을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소지왕은 재위 14년(492) 가뭄이 들었을 때 스스로 자책하면서 자신의 끼니를 줄였던 사람이다. 당연히 왕은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한 사람이 죽는 게 낫지 아니한가. 뜯지 말라'고 했다. 신하가 반대했다.

"한 사람은 임금이고 두 사람은 백성입니다." 

결국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거문고 통을 쏘라'는 글씨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 왕은 궁궐로 돌아가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안에서 간통을 하던 중과 궁녀가 활에 맞았다. 둘은 임금을 살해할 음모를 꾸민 위인들이었다. 중과 궁녀는 사형을 당했다.

중이 궁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것도 궁궐 안에서? 자유롭게 궁궐 안에 드나들 수 없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설화는 소지왕 시대에 이미 불교가 신라의 궁궐 내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요당에서 바라본 서출지의 못둑. 물에는 살얼음이 살짝 서려 있다.
 이요당에서 바라본 서출지의 못둑. 물에는 살얼음이 살짝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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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때가 언제인데 이처럼 궁궐 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비처왕 때에 아도화상이 모례의 집으로 왔다'고 증언한다. 비처왕은 소지왕의 다른 이름이다. 즉 서출지 설화는, 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즉시 왕실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나 불교는 서출지 사건(488년) 40년 뒤에 공인을 받는다(528년, 23대 법흥왕 15년).

서출지는 그리 큰 연못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연꽃이 만발하는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둘레는 수백 년 된 배롱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특히 붉게 꽃을 피울 때면 더욱 절경이 된다. 1664년에 임적이 세운 '이요당'이라는 정자도 서출지의 멋을 한껏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한몫을 한다. 서출지는 사적 138호다.

신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공인받는 불교

남산사터 석탑, 보물 124호
 남산사터 석탑, 보물 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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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에서 봉화골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보물 124호인 남산동 3층쌍탑이 서 있다. 소지왕의 신하들이 까마귀를 놓친 바로 그 양피사 자리이다.

9세기 작품인 남산동 쌍탑은 동탑과 서탑이 서로 양식이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치 다보탑과 석가탑이 서로 다르듯이 말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7.04m 높이의 동탑은 벽돌을 쌓은 듯한 모전석탑의 면모를 보여주고, 돋을새김한 팔부신중 좌상 조각을 자랑하는 5.85m의 서탑은 석가탑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균형미를 뽐낸다.

팔부신중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神將)들을 가리키는데, 머리가 셋에 팔이 여덟인 아수라상, 뱀관을 쓰고 있는 마후라가상 등 모두 여덟 명이다. 그러므로 서탑에는 팔부신중이 각 면마다 둘씩 새겨져 있다. 안내판은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염불암터
 염불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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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면 마을이 끝나면서 사적 311호인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이 나타난다. '전'이 붙은 것은 정확하지는 않고,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다는 뜻이다. 경남 산청의 '전 구형왕릉'이 그 대표적 사례다.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데 확실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곳에도 쌍탑이 있다.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에 이 자리에 세워졌던 본래의 쌍탑은 없어졌고, 지금 남산을 배경으로 우아하게 서 있는 두 석탑은 보는 이의 눈을 무척이나 즐겁게 하지만, 근래에 새로 만든 것들이라 문화재적 의미는 없다.    

염불암이라는 이름은 한 스님 때문에 생겼다. 그 스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염불을 외웠는데, 법당에 앉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서라벌 17만 호 그 어느 집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님을 공경하여 염불사(念佛師)라 부르고, 나중에는 절도 염불사(念佛寺)라 불렀다.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남산에서 보는 국보, 칠불암 마애불상군

칠불암, 국보 312호
 칠불암, 국보 3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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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터를 떠나 봉화골을 30분 가량 오르면 국보 312호가 기다리고 있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칠불'에 '마애'라 했으니 절벽[涯] 등 바위[巖]에 일곱[七] 불(佛)상이 새겨져[磨] 있다는 뜻이다.

높게 드리워진 절벽의 가장 아랫부분에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 앞을 살짝 가로막고 있는 돌출 바위에도 사방으로 불상이 새겨져 있다. 사면불이다. 합하면 모두 칠불이다.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칠불들은 모두 화려한 연꽃 무늬 위에 두둥실 앉아 있다.

흔히 '남산에 문화재가 많은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라고 한다. '경주 남산'의 무수한 문화재와 역사유적 중에도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특히 '국보'다. 남산 유일의 국보인 이 걸작을 못 본 채 하산해서야 '헛걸음을 했다'는 호통을 들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칠불암 마애불상군 앞에서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삼존불상 뒤편 절벽 꼭대기에는 보물 199호인 신선암 마애보살상이 있다. 그렇다고 신선암이라는 암자가 그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선이 노닐었을 것 같은 바위에 불상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칠불암 삼존불과 사면불의 오른쪽으로 가파른 바윗길이 나 있다. 줄을 잡고 나무를 붙들면서 올라간다. 금세 남산을 종주하는 등산로와 마주친다. 멀리 서쪽 삼릉골이나 포석정에서 이곳까지 줄곧 걸어온 등산객은 여기서 칠불암으로 내려가 잠깐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풍겨내는 불향에도 취한다.

아찔한 절벽 위를 걸어 신선암 마애보살상 구경

칠불암 위로 신선암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가 아득하게 보인다.
 칠불암 위로 신선암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가 아득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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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암 마애보살상 가는 길은 고위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등산로는 칠불암의 배경을 이루는 거대 암벽 위로 줄곧 올라가야 하지만, 마애보살상은 절벽을 옆으로 타고 아슬아슬하게 들어가야 한다. 절벽에 새긴 보살상이니 바위 위에선 볼 수가 없다.

신선암 마애보살상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른쪽이 암벽, 왼쪽이 아찔한 낭떠러지다. 그 사이로 실날 같은 바윗길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곧장 저 아득한 칠불암 앞마당으로 툭 떨어질 것만 같은 좁다란 틈, 더러는 오금이 저려 겁을 먹고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길이다. 

절벽 위 좁은 돌길을 20여 미터 들어가면 문득 사람 서너 명이 설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나온다. 마애보살상은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식은땀을 흘리며 이곳까지 들어온 답사자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오른쪽부터 바라본다. 오른쪽이 절벽이니 그쪽부터 눈길이 가는 것은 공포 본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다.

아, 이게 무슨 조화인가! 마애불상이 아니라, 이토록 가슴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려고 아찔한 절벽 위를 걸어왔단 말인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낭산이 깔려 있고, 그 너머로 토함산이 한눈에 들어오더니, 다시 그 너머로는 동해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절경이 이어진다.

신선암 바로앞 절벽 위의 마애불(보물 199호) 앞에 서면 멀리 토함산까지 보여주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신선암 바로앞 절벽 위의 마애불(보물 199호) 앞에 서면 멀리 토함산까지 보여주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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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경치다. 그뿐이 아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눈앞 왼쪽의 벼랑을 바라보면, 거기 마애불이 있다.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보물 199호 신선암 마애보살상이다.

마애불은 발 아래에 훨훨 나는 듯한 구름 그림을 거느리고 있다. 아마도 이 조각을 새긴 신라의 석공은 이곳이 바로 구름을 타고 노닐 만한 신선의 세계로 여겼던 듯하다. 구름이 발 아래로 흐르는 곳이니 석공이 그렇게 구름 그림을 불상 아래에 아롱아롱 새겨넣은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문득 나그네도 두려움을 잊고 마치 구름을 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마애불 사진 한 장을 최고로 잘 찍어보려고 슬금슬금 낭떠러지 쪽으로 다가간다.

신선암
 신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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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칠불암, #통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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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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