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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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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점점 무르익어 가면서 이웃 텃밭에도, 들녘에도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피고지고 피고 지던 뜰 안과 뜰 밖의 꽃들이 이젠 꽃이 앉았던 자리에 씨앗에게 자리를 내주고, 씨앗이 꽃잎 앉았던 자리에 내려앉아 있다.

여름까지만 해도 오이와 토마토, 호박, 가지 등이 한창이었다. 그것들이 어찌나 앙증스럽고 사랑스러운 꽃을 피우는지, 보랏빛 가지 꽃도 피고, 샛노란 오이꽃도 피고, 호박꽃도 흐드러지게 피더니, 꽃 앉았던 자리에 가지가 달리고 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렸다.

꽃말은 '행운'이랍니다...
▲ 고구마꽃... 꽃말은 '행운'이랍니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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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호박꽃은 피고 지면서 불을 옮겨 붙이듯 꽃불을 놓더니 아기 종주먹만 한 호박이 달렸다. 호박은 며칠 밤이 지나고 나면 눈덩이 굴리듯 불어나 아기 엉덩이만 해져 있곤 했다. 들갯잎에 깨꽃 지고 난 뒤에 들깨 씨앗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하얀 고추꽃자리엔 고추가 익어가고, 방아꽃 지는 자리에 방아씨앗도 점점이 그 작은 씨방 속에 담겨 있어 신기했다. 노란 콩꽃 진 뒤에 꼬투리 안에 콩들이 나란히 누워 자라갔다.

시나브로 피고지고, 피고 지면서 열매들이 알알이 영글었다. 동녘 하늘에서 밝아오는 아침 해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바라기는 온 몸짓으로 해를 향해 웃고 있고 아주까리 나무에는 아주까리가 주렁주렁 노오란 수세미꽃 피고 또 피고 피더니 점점 커져 가는 수세미가 나날이 굵어졌다.

백 년에 한 번 핀다는 고구마꽃입니다...
▲ ... 백 년에 한 번 핀다는 고구마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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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른 아침에 남편 출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침 공기가 '싸아'하고 찹찹하고 상쾌한 것이 발걸음을 산책로와 골목길로 이끌었다. 길을 걸으며 늘 그러했듯이 길가에나 텃밭을 살폈다. 어머나 이게 웬일이람. 여기저기 보다 말고 내 눈이 고구마밭에서 멈췄다.

불과 얼마 전에 백 년 만에 필까 말까 한다는 고구마꽃이 피었다고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지만, 눈으로 직접 보긴 처음이다. 넓은 고구마 잎들 사이로 고구마꽃이 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하도 신기해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카메라에 부지런히 고구마꽃을 담았다. 백년 만에 핀다는 고구마꽃, 왜 하필 지금 핀 것일까. 신기했다. 단 한 번도 고구마꽃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가다.

꽃이 앉았던 자리에 열매들이 대신하고...
▲ 깊어가는 가을... 꽃이 앉았던 자리에 열매들이 대신하고...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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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모든 열매는 꽃에서 온다. 꽃이 피는 식물들은 열매를 맺는다. 동백꽃에서 동백 열매가 오고, 들깻꽃에서 들깨가 오고 방아꽃에서 방아씨앗이 온다. 아주까리 꽃에서 아주까리 열매가 오고 호박꽃에서 호박이, 벚꽃에서 버찌가, 살구꽃에서 살구가, 모과꽃에서 모과가, 감꽃에서 감이, 흰 고추꽃에서 고추가, 보라색 가지꽃에서 가지가 온다. 노란 수세미꽃에서 수세미가 오고, 하얀 감자꽃에서 감자가 오며, 안개 자욱한 듯 흰 메밀꽃에서 메밀이 온다. 그렇게 그렇게 꽃에서 온다.

고구마꽃은 원산지가 중남미로 열대성 식물이라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나팔꽃과 비슷한 고구마꽃은 우리나라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변하면서 자주 보이기 시작하였다고들 말하기도 한다는데 무척 보기 어려운 꽃인 것은 분명하다.

얼핏 보기엔 나팔꽃을 닮은 고구마꽃은 하얀 바탕에 꽃술이 있는 안쪽은 보랏빛으로 흰색과 남보라 빛으로 어우러진 종모양의 꽃이었다. 고구마의 생김새를 배반하는 이율배반적인 꽃, 깨끗하고 청신한 이미지였다. 무성한 고구마 줄기와 잎들 사이에 숨어 있는 듯 보일 듯 말듯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
꽃이 앉았던 자리에 열매들이 앉다...
▲ ... 깊어가는 가을... 꽃이 앉았던 자리에 열매들이 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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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는 그의 회고록에서 고구마꽃을 '백 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꽃'이라 적기도 했단다. 고구마꽃의 꽃말은 '행운'. 고구마꽃이 피면 나라의 길조와 그 텃밭 주인집에 행운이 찾아든다는 속설이 있다 한다. 실제로 1945년 광복 때와 1953년 휴전, 1970년 남북 공동성명 발표 직전에 국내에서 고구마꽃이 피었다 한다.

어쨌든 생에 한 번 보기도 드문 고구마꽃이 피어 신기하기도 하고 꽃말이 '행운'이라고 하니 나라에도 모든 사람에게도 행운이 파도처럼 밀려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수탈의 시대에서 이기고 출애굽하듯 광복을 맞았던 것처럼, 우리 삶에 억압된 것과 무거운 것과 눌린 것과 눈물겹고 서러운 사람들에게 슬픔 대신에 화관을, 눈물 대신에 기쁨과 감사가 회복되고 억압되고 눌린 것에서 해방되고 소망과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들기를 바라는 마음. 고구마꽃을 보낸다. 여러분에게.


태그:#고구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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