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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성산 산정에서 제21회 오성문화제전이 열리고 있다.
오성산 산정에서 제21회 오성문화제전이 열리고 있다. ⓒ 조종안

나라를 위해 의연히 목숨을 바친 백제(百濟) 다섯 노인(오성인:五聖人)의 우국 충절을 기리는 제21회 '오성문화제전'이 4일(목) 오전 11시 군산시 성산면 소재 오성산(227m) 산정에서 600여 명의 시민과 관계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군산시가 후원하고, 군산문화원(원장 이복웅)이 주최한 이날 제전은 성산면 주민으로 구성된 고살매농악단의 '땅울림' 풍물공연에 이어 제1부(오성대제례), 제2부(개막식), 제3부(문화행사)로 나뉘어 치러졌으며, 행운권 추첨으로 참가자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헌관이 예를 올리기 위해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다.
헌관이 예를 올리기 위해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다. ⓒ 조종안

 임귀성 원장이 오성인의 한을 풀어주는 혼풀이 춤을 추고 있다.
임귀성 원장이 오성인의 한을 풀어주는 혼풀이 춤을 추고 있다. ⓒ 조종안

제1부 행사는 집례관의 봉제선언을 시작으로 오성산 산정에 묻힌 오성인의 혼(위패)을 묘지에서 행사장으로 모셔오는 신위 봉안, 헌공다례, 삼헌례(초헌례, 아헌례, 종언례), 독축, 헌시 낭송, 헌화, 오성인 혼풀이, 종제 선언 순으로 진행되었다.

위패가 제단에 모셔지고, 자손들에게 숭고한 호국 정신을 심어준 오성인에게 정성껏 끓인 우리의 전통 차를 올리는 헌공다례, 삼헌례, 오성인의 혼을 보내드리는 의식으로, 축문이 적힌 한지를 불태워 하늘로 날리고 재는 땅에 묻는 분축식을 경건하게 거행했다.

백제 의자왕 20년(서기 660년) 적장 소정방의 칼에 죽어간 오성인에게 바치는 헌시 낭송, 내빈들의 헌화에 이어 임귀성(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제97호 살풀이춤 전수자) 예도원 원장이 원귀들을 위로하는 혼풀이 춤을 선보일 때는 행사장에 숙연한 기운이 감돌기도 했다.

 대회사를 하는 이복웅 군산문화원장
대회사를 하는 이복웅 군산문화원장 ⓒ 조종안

제2부 개막식에서 이복웅 원장은 "나라를 지키고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섯 노인(오성인)의 숭고한 정신은 군산의 자랑이요, 전 국민에게 본보기가 되는 참다운 교훈"이라며 "이 제전을 통해 호국정신을 다시 한 번 다지고 애국심을 고양하여 지역발전에 이바지하자"고 강조했다.

문동신 군산시장은 "오성문화제전은 우리 고장 선인들의 충혼이 서린 기상을 드높이고 우국 충절의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 있는 행사"라며 "부디 아름다운 전통 행사로 자리매김하여 시민의 화합과 단결을 촉진하고 군산발전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 시장은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바쳐가며 조국을 수호한 오성인의 애국충절과 그 뜻을 근대사에 일어난 일들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며 군산 구암동의 3·5 만세운동(1919), 옥구 농민 항일항쟁(1927~1928) 등을 거론했다. 모두 오성인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12시 20분 개막식이 끝나고 중식시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뒤 제3부 문화행사에서는 어르신 문화학교 이수자들의 하모니카 연주, 군산문화예술단(단장 김갑식) 단원들의 민요, 가야금 병창, 한량무(예도원) 등 우리의 전통 민속공연으로 오성문화제전 마지막을 장식했다.

백제인 애국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는 오성인 묘

 다섯 노인이 잠든 오성산 정상의 오성인 묘.
다섯 노인이 잠든 오성산 정상의 오성인 묘. ⓒ 조종안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오성산 위 둘레(약 436m)에 4정(町)의 석성(石城)이 있는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 공멸 시 주군(駐軍)처라 전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성산이 삼국시대부터 금강연안 방어의 주요한 요충지였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일찍이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당(唐)나라 고종은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을 주어 서해를 건너 서쪽에서 공략하고, 신라는 김유신 장군에게 정병 5만을 주어 동쪽에서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백제 의자왕 20년 5월 산둥반도를 출발한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동년 6월 21일 덕물도(서해 덕적도)에 이르고 신라는 태자 법민(法敏)으로 하여금 병선 100척을 이끌고 당군(唐軍)을 영입코자 당은포(경기 남양만)를 떠나 덕물도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나당연합군이 각각 동서에서 협공하여 7월 10일 사비성 남방에서 재회하여 사비성 공격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와 격전을 치렀고, 당군은 금강 오성산 방어선에서 혈전을 벌였다. 오성산에 얽힌 소정방에 관한 전설은 당시 치열했던 오성산 전투의 일면을 시사해주고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임피현 고적도(古蹟條)에는 "소정방이 오성산에 병(兵)을 주둔하고 안개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섯 노인을 만났는데, 그들에게 사비로 가는 길을 묻자 '너희가 우리나라를 치러 왔는데 우리가 어찌 길을 가르쳐 줄 것이냐' 하고 항거하였다. 이에 격분한 소정방은 노인들을 참살했는데, 후일 물러갈 때 이들의 충절을 기이하게 여기고 오성산에 장사지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여 산 정상에 나란히 모신 다섯 노인의 묘는 백제인 애국충절의 표상으로, 후손들은 그들을 성인(聖人)으로 숭앙하면서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성문화축전#군산문화원#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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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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