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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에 대부분 우리들은 친가족을 만나서 단란하고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친가족을 맘대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해외입양인들이다. 내가 만난 많은 해외입양인들은 한국 친부모를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 돈, 휴가, 에너지를 쓴다. 거의 유럽과 북미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려서 입양 보내진 이들은 성장하여 어느 시기가 되면 마치 동물의 귀소본능처럼 한국을 찾는다.

그러나 이 해외입양인들이 한국의 친부모를 찾아서 무작정 북미나 유럽에서 한국을 찾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들이 모국을 방문하기 전 먼저 심리적, 감정적, 그 후 경제적 준비기간이 몇 년 혹은 심지어 몇십 년 걸린다. 대체적인 양상을 보면 해외입양인들이 10대 때는 유럽이나 북미 백인국가에서 소수 황인종으로 살며 극심한 인종차별과 정체성혼란으로 큰 어려움과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를 버린 모국을 증오한다.

그 후 30-40대 나이가 되면 이 해외입양인들은 자기 생명의 비밀 즉 뿌리가 궁금해진다. 그래서 자기를 버린 나라 한국에 대한 증오나 분노를 잠시 뒤로 하고 한국역사, 사회, 문화 등에 관한 책이나 문헌을 접한다. 그리고는 결국 빈곤이나 한국사회의 혼혈인과 미혼모에 대한 차별과 어려움 때문에 친모 혹은 친부모가 자기를 어쩔 수 없이 해외입양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결론에 이르러도 유럽이나 북미에서 보면 극동에 있는 모국을 그냥 쉽게 방문하기가 쉽지 않다. 심리적, 감정적으로 친부모를 찾거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국인 모국에 오기 위해선 안정된 재정이 필요하다. 직장에선 몇 주간 휴가를 받아야 되고 휴가비도 준비해야 하는데 요즘처럼 경제위기와 비정규직이 세계를 뒤흔드는 세상에서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간난신고를 겪고 어렵게 모국을 방문해도 문제는 이제부터다. 자기를 해외입양 보낸 입양기관을 방문하고 해외입양인들 다수는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는다. 많은 해외입양인들이나 그 친부모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거나 (혹은 입양기관들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있어도 조작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기록 상실과 조작, 그리고 자기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친부모 등의 이유로 해외입양인들이 친 부모를 찾는 비율은 2007년 통계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2.7% 밖에 안 된다.

최근 기자와 인터뷰한 해외입양인 최명호씨도 기사가 나간 후 경찰과 방송의 도움으로 친모가 나이와 이름이 같은 여성을 다 섯 명이나 찾았다(관련기사 : <최혜은씨, 이국에서 마음고생한 아들이 찾습니다>). 그러나 그 다섯 여성 모두 '과거'를 부인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외입양인들이 친부모와 재회하는 일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라 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정착하여 살고 싶은데 너무 어렵네요!"

내가 만난 많은 해외입양인들이 한 말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보다는 부유한 유럽이나 북미에서 살고 있지만 어려서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자신의 괴로움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백인 양부모와도 거의 교류가 없다. 그래서 이 해외입양인들 중엔 한국에서 살면서 친부모를 찾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선 막강한 경제력이 필요하다.

해외입양인들이 한국 친부모를 찾기 위해 쓰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만난 해외입양인들 중 다수는 상당한 돈과 시간을 2.7%의 성공률 밖에 안 되는 친부모를 찾는데 탈진하고 있다. 나는 이제는 우리 정부가 나서서 해외입양인들의 친부모 찾기 서비스를 지원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연구에 의하면 해외입양인들의 결혼이나 자녀 출산비율도 일반인보다 현저히 낮다. 이것도 해외입양인들의 경제적 불안정한 상태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입양 보내지기 전
▲ 박기출 입양 보내지기 전
ⓒ 박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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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인 한국에 돌아와서 살고 싶어 하는 해외입양인들에 대한 열악한 정부지원 문제를 생각하며 지난 2일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탈리아 입양인 박기출씨(이탈리아 이름 Giovanni Iovane)를 만났다. 박씨는 1967년 6월 12일 경남 밀양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69년 3월 그는 서울역에서 버려진 채로 행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후 고아원과 홀트를 거쳐 1971년 11월 5일 박씨는 이탈리아로 해외입양 보내진다. 박씨 양부모에 의하면 어려서 박씨는 한국어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국어를 전혀 모른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한국과 관련한 어린 시절도 이탈리아 공항에 도착하여 양부모가 자기를 맞이하는 기억이 전부다. 그의 한국어와 한국에 관한 기억이 그의 뇌에서 전부 사라진 것이다. 사실 이런 모국어와 모국에 대한 망각증 현상은 해외입양인들에게 종종 발견된다.

한편 박씨 입양부모는 1927년과 1930년 생으로 입양부는 엔지니어 입양모는 고등학교 수학교사였다. 입양부모는 박씨 위로 친아들 하나와 아래로 친딸 하나를 두었다. 3남매 중 박씨만 해외입양인이고 나머지 둘은 친자녀다. 박씨도 다른 해외입양인들처럼 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리면서 자랐다. 그러나 자신이 매일 매일 직면하는 인종차별의 아픔을 백인 입양부모나 입양형제는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외톨이였다.

20세 때인 지난 1987년 박씨는 당시 이탈리아군의 의무복무를 마치고 군에서 전역하며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자기가 자라난 나라인 이탈리아의 인종차별에 대해 넌더리를 느낀 그는 군 제대 직후 홍콩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 웨이터로 직장을 구해서 출국한다. 그 후 박씨는 홍콩에서 1년, 영국에서 4년, 독일에서 1년, 남미 베네주엘라와 콜롬비아에서 3년을 식당 웨이터로 일하면서 외국생활을 전전한다.

홍콩에 살면서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중국인들을 매일 보면서 박기출씨는 모국인 한국을 방문하고 그래서 꿈에서 그리던 친부모를 찾고 싶어졌다. 홍콩에 살면서 박씨는 자기가 이제 더 이상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시달리지 않고 같은 황인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1988년 5월 그는 홍콩에서 무작정 한국을 방문한다. 그리고는 홀트로 달려갔다.

그러나 홀트에서 박씨는 친부모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지 자기가 밀양이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서울역에서 미아로 발견된 후 이름도 본명이 아니라 병원의사가 지어준 것이라고 통보받은 것이 그가 아는 자기 뿌리에 대한 전부였다.

홀트에서 풀이 죽어서 돌아오다가 그는 길거리에서 한 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아장아장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박씨는 극도의 질투심이 느껴졌다. "왜 나는 저럴 수가 없었나? 왜 나는 친부모 손을 잡고 걸을 수 없었나? 삶이 왜 이렇게도 불공평 한가?" 하는 자괴감, 절망감, 불쾌감, 알 수 없는 아픔이 갑자기 그를 엄습했다.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그는 한국에 온 것을 크게 후회했고 한국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간신히 표를 구해 한국에 온지 이틀 만에 박씨는 한국을 급히 떠났다. "다시는 이 저주의 나라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그는 절규했고 마음 깊이 다짐했다.

입양 보내지기 전
▲ 박기출 입양 보내지기 전
ⓒ 박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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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2년이 흘렀다. 그 중 절반을 박씨는 해외식당을 전전하며 일했고 절반은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식당에서 일하며 지냈다. 22년 동안 그는 '저주의 나라' 한국을 다시는 방문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에선 친부모와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견딜 수 없이 새어나왔다.

결국 그가 졌다. 지난 2010년 9월 박씨는 다시는 안 오겠다던 모국을 다시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재정적. 시간적 어려움 때문에 닷새만 한국을 방문한 그는 입국하자마자 다시 홀트로 달려갔다. 친부모에 대한 흔적을 다시 찾기 위해서. 세월이 22년이 흘렀지만 친부모와 자신에 대한 새로운 기록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번에도 극심한 절망감, 자괴감과 뜨거운 눈물이 그의 앞을 가렸다. 그러나 박씨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꿈에 그리던 친부모를 못 찾고 다시 출국했다.

그리고 또 2년이 흘렀다. 지난 6월 20일 박씨는 어려운 살림 가운데에서도 웨이터를 하면서 근근이 모은 돈으로 다시 한국을 3번째로 방문했다. "이번에는 친부모님을 꼭 찾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여러 해외입양인들의 도움으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친부모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역시 이번에도 아무 것도 없었다.

박씨는 절망했다.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9월 3일 자기가 머무르던 해외입양인 숙소 '뿌리의집'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뿌리의집' 식구들이 그를 부리나케 S병원 응급실, 중환자실로 옮겼다. 뇌졸중, 뇌출혈 이었다. 하루를 치료 받았는데 치료비가 무려 120만 원이 나왔다. 그리고 박씨의 오른팔과 다리는 마비되었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뇌졸종 이었다. 주위 도움으로 여러 분들이 간신히 치료비를 마련하고 그를 좀 더 저렴하다는 C병원으로 옮겼다.

우측 인터뷰 중
▲ 박기출 우측 인터뷰 중
ⓒ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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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기자는 이 병원을 방문했다. 병원 데스크에 치료비를 물어보니 9월 4일부터 10일 1일까지, S병원보다 저렴하다는 이 C병원에도 치료비가 무려 657만 원이 나왔다. 박기출씨는 지금도 오른팔과 오른발이 마비가 되어 있다.

즉시 박씨 이탈리아 사촌에게 국제전화를 하고 그간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오는 10월 6일 박씨 이탈리아 친척이 이탈리아에서 치료비를 마련 한국을 방문하여 10월 8일 그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출국할 예정이다. 친부모를 찾으러 왔다가 졸지에 뇌졸중 환자가 된 박기출씨, 그는 향후 6개월에서 1년 정도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이 기사를 쓰면서 기자는 마음이 내내 무겁고 우울했다. 왜 해외입양인들은 이렇게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언제까지나 해외입양인들의 이런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어야 하는가? 친부모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픔, 모국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 말이다. 박씨가 해준 마지막 말이 지금도 기자의 고막을 심하게 울린다.

"자기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친부모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인터뷰 중
▲ 박기출 인터뷰 중
ⓒ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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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박기출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3210-2451)으로 연락 바란다.



태그:#박기출, #입양, #김성수, #이태리, #치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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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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