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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인 줄 알았다"

지난 4월 경기도 수원에서 20대 여성이 성폭행 후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피해 여성은 당시 112에 구조를 요청했으나 경찰은 '부부싸움인 것 같아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날 범인이 피해자를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이웃조차 '부부싸움인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민주통합당 남윤인순, 서영교, 최원식 의원이 공동으로 1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주최한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아래 가정폭력법) 개정 공청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수원사건 당시 경찰과 이웃이 보인 반응은 한국사회가 가정폭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고 입을 모았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인 김상희 의원은 축사에서 "가정폭력법을 제정하기 15년 전, 처음으로 '매 맞는 아내' 문제를 지적했을 때 '여자가 집에 있던 일을…창피하지 않냐'는 비판에 부딪쳤다"며 소회를 밝혔다. 김 위원장은 "15년 걸려 만든 가정폭력법이 제정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매 맞고 사망한 사람은 줄어들지 않았다"며 "왜 여전히 여성들이 가정에서 폭력에 희생당하는가를 근본적으로 검토해 정말 바꿀 수 있는 방안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정폭력은 법이 만들어졌음에도 한동안 증가세를 보였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과가 집계한 결과, 1999년 1만 1850건이었던 가정폭력 발생 건수는 2003년 1만 6408건까지 늘어났다. 2004년에는 1만 3770건, 2005년 1만 1595건, 2006년 1만 1471건으로 조금 줄어들었지만 매년 1만여 건 이상은 발생했다.

남편·동거인 손에 목숨 잃은 여성들 상당수가 가정폭력 피해자

9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 공청회에서 발제를 맡은 조인섭 변호사와 남윤인순 민주통합당 의원
 9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 공청회에서 발제를 맡은 조인섭 변호사와 남윤인순 민주통합당 의원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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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연구센터장이 1990~2002년간 발생한 살인사건을 분석, 200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피해여성의 46.4%는 자신의 배우자이거나 내연·동거관계인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들 상당수가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폭행·학대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배우자 등에게 살해당한 남성 역시 16%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35%는 가정폭력 피해여성이 폭력에 대항한 사건이었다.

이날 발제를 맡은 조인섭 변호사는 "이러한 수치는 가정폭력을 방치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신고된 가정폭력 사건은 형사기소율이 낮다"고 지적했다. 형사처벌 등 적극적인 조치는 잘 취해지지 않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정도의 보호조치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조 변호사는 "미국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기소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채택했고, 영국은 피해자의 증언 없이도 사법처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했으며 독일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떠나고, 그 희생자가 집에 남는다'는 원칙을 세웠다"며 가정폭력법 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제안한 개정안의 핵심은 ▲ 가정폭력이 범죄임을 명확히 하고, 엄격하게 대응하도록 법률용어 재정의 ▲ 가정폭력 행위자에 대한 체포 우선주의 도입 ▲ 가정보호사건 처리 기준 구체화 ▲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페지 등이다.

토론자로 참석한 정춘숙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며칠 전에도 한 공무원이 부인을 죽이는 등 많은 가정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있지만 제대로 사법처리된 게 얼마인지 의문"이라며 "성폭력은 처벌이 가벼워서 문제라면, 가정폭력은 처벌되지 않는 게 최대 문제"라고 말했다.

"가정폭력은 처벌되지 않는 게 최대 문제"

9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가정폭력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 공청회에 참석자들. 왼쪽부터 김은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연구센터장, 박재진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과장, 박지영 법무부 여성아동팀장, 서영교 민주통합당 의원
 9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가정폭력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 공청회에 참석자들. 왼쪽부터 김은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연구센터장, 박재진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과장, 박지영 법무부 여성아동팀장, 서영교 민주통합당 의원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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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대표는 특히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는 가정폭력의 처벌을 무력화한 핵심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는 가정폭력 행위자가 성실히 상담받는 것을 조건으로 기소유예처리하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은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의 명확한 기준이 없어 검사마다 결정하는 게 다르며 가정폭력 재발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폐지'를 주장해왔다.

유숙영 전국가정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 역시 "제정 당시에는 (법의) 탄생 자체가 목적이어서 처벌과 보호의 이원체계를 받아들였지만, 처벌강화가 필연적인 상황"이라며 "가정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게 농후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개정안처럼 입법목적에 '가정보호'라고 명시한 내용을 삭제, 가정폭력이 범죄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유 대표는 언급했다. 언어적·정서적 폭력 역시 가정폭력 중 하나인데 현행법은 가정폭력의 범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점도 지적했다.

김은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연구센터장은 한 발 더 나아가 "가정폭력은 미래의 심각한 범죄를 만들어내는 인큐베이터일 수 있다"며 "가정폭력을 '가해자 엄정처벌'보다는 '미래 폭력 에방, 피해자 안전보호'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20여 년 넘게 미국에서 가정폭력을 다룬 사람도 '가해자 처벌을 공공안전 프로그램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박지영 법무부 여성아동팀장은 "(가정폭력은) 법보다는 제도 운영의 문제"라며 "보호처분의 경우, 가정을 지키기 위해 특정 사건에 한정하려는 좋은 취지였지만 제대로 운영을 못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다만 "가정폭력의 범위를 확대하고 '직접적 피해자'란 표현을 삭제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사실 가정폭력 피해자는 그 가정 구성원 전체"라고 말했다.


태그:#가정폭력,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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