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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아내와 나는 호박 밭에서 늙은 호박 10통과 단 호박 5통을 따냈다. 봄에 심은 호박이 어느새 이렇게 익어 선풍기처럼 커지다니…. 수레에 가득 호박을 싣고 나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와 엄청 부자가 된 기분이다. 아니 우리는 이미 호박부자가 되어있었다.

잘 익은 늙은 호박을 수레에 가득 수확을 하고 나니 엄청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잘 익은 늙은 호박을 수레에 가득 수확을 하고 나니 엄청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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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호박은 하얀 서리를 맞은 것처럼 겉에 흰 가루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늙은 할머니가 얼굴에 흰 분을 발라 화장을 한 것처럼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잘 익은 호박은 흰 분가루를 묻힌 것처럼 겉이 하얗게 변해 간다.

잘 익은 호박은 하얀 서리를 맞은 것처럼 흰 분가루가 묻어있다.
 잘 익은 호박은 하얀 서리를 맞은 것처럼 흰 분가루가 묻어있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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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만 이 호박들은 결코 그냥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큰 호박을 따 내기까지는 여러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금년 봄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언 땅을 일구어 구덩이를 10개나 깊게 파서 퇴비를 듬뿍 뿌려 주고 호박씨를 심었다. 다행히도 건강한 호박 싹이 돋아났다.

그런데 호박을 심은 후 3개월이 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다. 104년 만에 찾아왔다는 극심한 가뭄 때문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호박 밭에 물을 주어야하는 고된 노역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무리 물을 주어도 불볕 같은 햇빛은 땅을 금방 마르게 하여 호박덩굴은 항상 갈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 끝에 갑자기 쏟아져 내린 우박은 여린 호박잎을 여지없이 난도질 하여버렸다.

1.구덩이를 파고, 2.호박씨를 심어서, 3.가뭄과 우박을 이겨내고, 4.꽃을 피워, 5.애호박이 열리고, 6.늙은 호박이 되기까지 호박의 일생
 1.구덩이를 파고, 2.호박씨를 심어서, 3.가뭄과 우박을 이겨내고, 4.꽃을 피워, 5.애호박이 열리고, 6.늙은 호박이 되기까지 호박의 일생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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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을 맞은 호박잎은 마치 따발총을 맞은 것처럼 구멍이 송송 뚫려 아사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우리 집 근처에 단 호박을 2000평이나 심은 농부는 돌풍을 수반한 우박으로 완전히 망가져버린 호박 넝쿨을 거둬내며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애써 가꾸어 놓은 호박이 일거에 쑥대밭이 되어버린 농부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물을 주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호박은 가뭄과 우박이란 호된 시련을 이겨내고 무럭무럭 자라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주었다. 아침마다 활짝 피어나는 호박꽃을 바라보며 호박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호박꽃도 꽃이냐고 그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건강한 호박꽃에 벌들이 찾아들어 꿀을 빨아 먹는 평화로운 풍경을 본 사람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피워주는 호박꽃은 삭막한 집안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바꾸어 놓고 있다.

미각을 돋구어 주는 애호박
 미각을 돋구어 주는 애호박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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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호박 덩굴에 애호박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애호박을 날마다 한 개씩 따서 된장국을 끓여먹기도 하고, 호박잎과 함께 넣어서 부침개를 해 먹기도 했다. 호박잎을 살짝 데쳐 쌈을 싸 먹거나 수제비국을 끓여 먹는 맛은 별미 중의 별미다. 그리고 풀숲에 가려 미처 따먹지 못한 호박들은 이렇게 선풍기처럼 크게 자라서 곱디 고운 늙은 호박이 되어주었다.

곱게 늙은 호박만큼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있을까? 가을에 따내는 늙은 호박은 분명히 풍요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처럼 잘 생긴 늙은 호박을 수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좋은 호박 씨에 풍부한 밑거름도 필요하다. 밑거름이 모자라면 호박은 익어가다가 도중에 썩어 버리기도 한다. 사람이나 호박이나 늙어갈수록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해야 곱게 늙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햇빛이 잘 받도록 긴 풀과 나뭇가지를 잘라주고 호박이 썩지 않도록 지면이 닿는 부위에 마른 풀이나 나뭇가지를 깔아 주어야 한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을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건강한 호박일지라도 보살피지 않는다면 어찌 이처럼 잘 생긴 호박이 탄생할 수 있겠는가?

호박은 풍요의 상징이다. 그러나 곱게 늙은 호박을 키워내기란 쉽지않다.
 호박은 풍요의 상징이다. 그러나 곱게 늙은 호박을 키워내기란 쉽지않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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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의 진면목은 뭐니 뭐니해도 늙은 호박에 있는 것 같다. <동의보감>에 보면 '호박은 성분이 고르고, 독이 없으며, 오장을 편하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의학에서도 호박에는 베타카로틴, 비타민A, B, 미네랄, 식이섬유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이뇨작용과 노화방지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늙은 호박 한통을 썰어서 호박죽을 끓였다. 지난 4월 11일 텃밭에 호박을 심은 후 139일 만에 드디어 맛있는 호박죽을 끓여 먹는 순간이다. 호박을 나박나박 썰어서 찹쌀과 떡국 그리고 팥을 넣어 푹 끓인 호박죽은 그야말로 별미중의 별미다.

호박죽을 끓이기 위해 썰어 놓은 늙은 호박
 호박죽을 끓이기 위해 썰어 놓은 늙은 호박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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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섬진강 변에 살고 있는  혜경이 엄마가 보내준 찹쌀과 팥을 넣어 끓인 늙은 호박죽
 구례 섬진강 변에 살고 있는 혜경이 엄마가 보내준 찹쌀과 팥을 넣어 끓인 늙은 호박죽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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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팥과 찹쌀은 구례 섬진강 변 수평리 마을에 살고있는 혜경이 엄마가 보내준 것이어서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혜경이 엄마는 손수 지어 수확한 찹쌀, 팥, 도라지뿌리, 검은 콩, 말린 머위대 등을 바리바리 싸서 택배로 보내왔다. 정이 듬뿍 묻어나는 혜경이 엄마의 손때가 묻은 선물을 받고나서 아내와 나는 한동안 서로 멍하니 마주보며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정말 너무 고맙군요. 혜경이 엄마가 보내준 팥과 찹쌀로 이번 겨울은 호박죽을 실컷 끓여 먹을 수 있겠네요?"
"그러게 말이요. 잊지않고 이렇게 귀한 선물을 보내주다니 우린 무엇으로 보답하지요?"

겨울에 먹기 위해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저장해 놓은 늙은 호박
 겨울에 먹기 위해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저장해 놓은 늙은 호박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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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섬진강 수평리 마을에서 우리가 이곳 동이리 임진강변으로 이사를 온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아내와 나는 혜경이 엄마가 보내준 선물꾸러미를 앞에 놓고 섬진강변에서 살았던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수평리에서 사는 동안 정이 듬뿍 들었던 혜경이 엄마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아내와 나는 이번 가을엔 꼭 섬진강으로 가서 혜경이 엄마를 만나보기로 다짐했다.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혜경이 엄마가 보내준 찹쌀과 팥으로 쑨 바로 호박죽 속에 행복이 들어있다. 행복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것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호박죽을 맛있게 먹으며 창밖에 죽 늘어놓은 늙은 호박들을 바라보았다.


태그:#늙은 호박, #호박죽, #행복, #구례 섬진강, #연천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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