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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5월 23일 전직 대통령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640만 달러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고 한달 전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러한 검찰의 집요한 수사와 언론의 경마식 보도로 인해 노 전 대통령과 그의 가족을 향한 여론은 싸늘해졌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그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끝냈다.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계기는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였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작업은 지난 2008년 7월 국세청에서 시작됐다. 국세청에서 박연차 회장이 운영하는 태광실업을 대상으로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벌인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위기감을 고조시킨 촛불집회 직후였다.

당시 한상률 국세청장으로부터 '태광실업 세무조사 투입' 지시를 받았던 안원구 전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박연차 게이트의 출발은 한상률 체제의 국세청 기획조사였고 마무리는 검찰에서 했다"고 주장했다. 국세청-검찰로 이어지는 권력기관의 '협공'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한상률 청장 "1주일에 한두 번 MB와 독대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입수한 안 전 국장의 비망록 <잃어버린 퍼즐>(초이스북)에 따르면, 지난 2008년 7월 하순, 안 전 국장(당시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은 한상률 국세청장의 호출을 받고 국세청장실로 갔다. 이례적으로 회의용 탁자에 앉아 있던 한 청장이 얘기를 꺼냈다.

"부산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자금줄이다. 그쪽(노무현 대통령)을 치려면 태광실업 베트남 신발공장의 계좌를 '까는'(계좌를 확보해 거래목록을 열람한다는 뜻)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박연차 회장이 베트남에서 국빈대우를 받고 있어서 계좌 확인에 어려움이 많다. 안 국장이 베트남 국세청 사람들과 잘 알고 있으니 베트남에 가서 협조를 얻어내 달라." - <잃어버린 퍼즐> 20-21쪽

한상률 전 국세청장. 그는 그림로비를 통한 인사청탁 의혹과 태광실업에 대한 표적 세무조사 의혹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자료사진)
 한상률 전 국세청장. 그는 그림로비를 통한 인사청탁 의혹과 태광실업에 대한 표적 세무조사 의혹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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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조세관리관 시절 국세청장과 함께 베트남에 갔고, 베트남 국세청장이 방한했을 때 영접한 경력이 있는 안 전 국장을 태광실업 세무조사에 투입하려고 여름휴가 중인 안 전 국장을 불러냈던 것이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국장도 아닌 세원관리국장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 자체가 의심을 불러왔다.

"태광실업은 부산지역 기업이고, 재계 순위도 200위권 밖에 있는 회사였다. 세무조사는 엄연히 해당지역 조사국에서 하는 것이고, 부산기업이라면 부산지방국세청 조사국에서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본청 소속도 아니고 업무도 관련이 없는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이 조사업무에 투입되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어,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이 어떻게 조사업무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 <잃어버린 퍼즐>, 22쪽

이에 한상률 청장은 "필요하다면 서울청장에게 지시해 공식적인(세무조사) 명령을 내려주겠다"며 "그동안 태광실업 계좌 확보를 위한 방법이나 강구하면서 기다리다가 명령을 받으면 바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이어 한 청장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명박) 대통령과 일주일에 한두 번 독대를 하고 있다. 이번에 일을 잘 해내면 대통령에게 조사결과를 보고해서 당신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 - <잃어버린 퍼즐>, 23쪽

안 전 국장은 "대통령과 독대해서 세무조사 결과를 보고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준다는 얘기는 곧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대통령과 국세청장이 의논한다는 뜻이며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기획조사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중에 한 청장이 태광실업 세무조사 결과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독대 보고' 했다는 보도가 나와 이러한 안 전 국장의 증언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지난 2008년 11월 27일 자 <조선일보>는 "지난달(10월) 24일 끝난 1차 세무조사의 결과는 최근 한상률 청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전달됐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한 청장에게 "국세청이 대단하다"고 크게 칭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 2009년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이 대통령은 지난해(2008년) 11월 국세청의 세무조사결과를 보고받고 '우리쪽 사람 중에도 관련되는 사람이 있겠지만 원칙대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이 한 청장을 독대했는지는 최종 확인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이 대통령이 국세청에게 태광실업 세무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와 국세청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한 청장은 지난 2009년 4월 13일 <한국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독대는 없었다"면서도 "(만약 독대했더라도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정치적 목적"에서 기획된 몇 가지 이유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
한 청장의 지시에 따라 안 전 국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태광실업 세무조사에 실제로 투입되지는 않았다. 국세청에서 먼저 홍콩을 통해 태광실업의 베트남 신발공장 관련 계좌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홍콩 계좌를 확보하게 된 과정도, 박연차 회장 밑에 있는 직원들의 개인 비리를 캐내 이를 덮어주는 대신 태광실업의 홍콩 계좌를 알아낸 것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 <잃어버린 퍼즐>, 26쪽

국세청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결과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한 뒤 박연차 회장을 탈세 혐의로 대검에 고발했다. 이와 함께 '세종증권 매각 비리' 의혹을 수사하고 있던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씨와 박 회장을 잇따라 구속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그의 핵심 측근들이 구속되고, 부인과 아들 등 가족들이 소환조사를 받았다.

"당시 검찰은 세종증권(현 NH증권) 매각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 로비 의혹과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와 내부정보를 활용, 세종증권 주식을 대량 사고팔면서 100억여 원의 차익을 남긴 의혹으로 박연차 회장을 조사중이었다. 그러나 이 조사에서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련고리를 찾아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박연차 회장을 탈세혐의로 국세청이 고발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수사가 본격화된 것을 보면 국세청이 태광실업 세무조사에서 확보한 홍콩 계좌가 노무현 대통령을 옭아맬 주요 단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 <잃어버린 퍼즐>, 33쪽

한상률 국세청장이 주도한 태광실업 세무조사 결과가 노 전 대통령을 검찰에 소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안 전 국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정치적 목적에서 시작된 조사"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와 관련, 먼저 안 전 국장은 세무조사가 태광실업을 관할하는 부산지방국세청이 아닌 '심층세무조사'를 전담하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었다. 이에 한 청장은 "당시 태광실업 세무조사는 통상적인 교차 세무조사였다"며 '기획(표적)세무조사'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안 전 국장을 이러한 한 청장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교차조사란, 지역토착(토호) 세력들과 국세청 직원들의 유착을 차단하기 위해 지방청 간에 서로 손을 바꿔서 조사하는 제도를 말한다. 당초 한상률이 주장했던 '교차조사'의 개념이라면,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서울지방국세청이 조사하는 대신 '교차'로 부산지방국세청에서 조사한 서울지역 기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국세청장이 조사관할을 조정할 경우에 국세청 훈령에 따른 구체적인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태광실업이 여기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 <잃어버린 퍼즐>, 28쪽

이어 안 전 국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61학번 동기로 그의 '50년 지기'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벌인 로비조차 통하지 않는 점을 '기획세무조사'의 근거로 들었다. 박연차 회장은 국세청에서 세무조사에 착수하자 천 회장과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등에게 줄을 댔고, 이들은 '세무조사 무마 대책회의'까지 열었다.   

"박연차 회장은 '형님'으로 모시는 천신일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고, 천 회장은 '대학원 동기'(서울과학종합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한 청장에게 세무조사 무마를 청탁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조사였으면 천 회장의 청탁으로도 해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세무조사는 계속됐다. 이는 천 회장보다도 더 '힘 있는' 누군가가 뒤에 있어 천 회장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며 그의 지시에 의한 기획조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 <잃어버린 퍼즐>, 29쪽

끝으로 안 전 국장은 "당시 국세청 조사국장과 서울지방국세청장 등 중간라인이 있었지만 한 청장은 실무진한테 상황을 직접 보고받으며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하는 등 태광실업 세무조사에서도 특유의 점조직을 운영했다"며 "이 또한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한상율 청장에 의해 기획된 조사였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50년 지기의 로비조차 무력화시킨 '힘'은 어디에서 나왔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1일 새벽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검찰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1일 새벽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검찰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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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대통령의 '50년 지기' 천 회장의 로비조차 무력화시킨 "천 회장보다도 더 '힘 있는' 누군가"의 실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안 전 국장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박연차(태광실업) 조사 관련' 문건 등을 통해 "태광실업 세무조사는 BH(청와대를 뜻하는 영문 이니셜)와의 교감하에 이루어진 조사여서 (세무조사 무마) 로비시도는 있을 수 있어도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3월 11일자 "태광실업 세무조사, 청와대와 교감했다" 기사 참조).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사실상 정권의 심장부인 청와대의 비호 아래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특히 한상률 게이트를 수사했던 검찰이 한 전 청장을 어떻게 '예우'했는지를 보면 이러한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한 전 청장은 '학동마을' 그림로비, 태광실업 세무조사 직권남용, 정권 실세에 국세청장 유임 청탁, 안 전 국장에게 3억 원의 뇌물 요구, 도곡동 땅 문건, 거액의 자문료 수수 등의 의혹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그림로비와 거액의 고문료 수수 의혹만 기소했다. 게다가 '45일'로 끝낸 부실수사는 잇따른 무죄 판결로 이어졌다. 검찰이 그에게 면죄부를 준 모양새다. 

앞서 검찰은 민주통합당 등 야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도피성 유학중이던 한 전 청장을 소환하지 않았고, 신성해운 국세청 로비 의혹도 "로비 당사자들이 모두 로비사실을 부인했다"는 이유로 수사를 서둘러 종결했다.

정권 차원에서 한 전 청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들이다.


태그:#안원구, #한상률, #태광실업 세무조사, #노무현,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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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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