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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고구마 맛을 본 멧돼지들에겐 라디오 소리나 태양광 전등 따위는 
전혀 장해물이 될 수 없었다.
▲ 멧돼지가 퍼헤친 고구마 밭 재작년에 고구마 맛을 본 멧돼지들에겐 라디오 소리나 태양광 전등 따위는 전혀 장해물이 될 수 없었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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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 있으면 콱! 쏴 죽이고 싶어."

멧돼지가 엎어버리고 간 고구마 밭에 엎드려 파헤쳐진 뿌리를 호미로 묻어주면서 집사람이 내뱉는 탄성이다. 곁에서 "이제 버린 농사이니 다시 묻어준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네" 하면서 집사람을 말리는 나도 심기가 심히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작년에도 멧돼지에게 고구마 밭을 상납했다. 고구마 모종 값도 비쌌다. 남원 시장에서 12만 원어치 모종을 사와 비가 오기 전 날 심어야 한다는 농사의 기본 원칙도 모른 채 메마른 밭에 심었다. 순이 말라 죽지 않게 상당한 거리가 떨어진 데다 비탈길인 시랑헌에서 일주일 동안 물을 날랐고 잡초 때문에 매일 아침 해뜨기 전 1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했던,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수확 철이 되기도 전에 멧돼지가 먼저 거둬갔다. 멧돼지 코도 분명 살아있는 짐승의 가죽이거늘 삽이나 괭이보다 단단한 것 같다. 코로 뒤집어 엎어버린 밭에는 잘린 고구마 조각하나 남아있질 않았다. 도대체 몇 마리나 왔기에 300㎡가 넘는 밭의 고구마를 모두 먹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재작년까지는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고구마를 수확하는 쏠쏠한 재미를 봤다. 밭 주변에 태양광 전등을 설치해 멧돼지 피해를 방지했다. 고구마 농사에 약간 자신이 생긴지라 작년에는 재배면적을 늘렸다. 그동안 멧돼지 피해를 입지 않아 태양광 전등을 설치하는 것조차 잊고 고구마 50여 상자 정도는 수확할 수 있으리란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어제 저녁에 멧돼지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올해는 고구마 밑이 들 때가 되면 태양광 전등을 설치할 계획이었지만 작년에 큰 재미를 본 멧돼지들은 워낙 조급했던 모양이다. 고구마 모종들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고구마 밭 한 고랑을 뒤졌다. 워낙 먹을 게 없었는지 나머지 부분은 성한 채로 남겨뒀다.

파헤쳐진 부분을 다시 묻어주고 이미 시들어버린 모종은 다시 심었다. 일을 마치고 태양광 전등 설치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해볼 테면 해봐! 작년에는 태양광 전등을 6개 설치했지만 이번에는 배로 늘려 12개나 설치해뒀으니 고구마 밭으로 들어오려면 오금이 저릴 거야!"

멧돼지들은 고구마 씨알이 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를 비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뿌리 중간부분이 약지 손가락만큼 굵어지자 태양광 전등을 청사초롱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고구마 밭에서 가든파티를 벌였다.

귀촌 생활도 취미생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다가 목공일을 택했다. 아랫층은 목공작업실이고 이층은 정자로 사용할 생각이다. 완공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수행과 요가활동이 가능하다.
▲ 공방과 정자 귀촌 생활도 취미생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다가 목공일을 택했다. 아랫층은 목공작업실이고 이층은 정자로 사용할 생각이다. 완공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수행과 요가활동이 가능하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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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인 공방 이층 정자에서 집사람과 같이하는 참선과 108배를 끝내자 먼동이 터 오르고 주변이 밝아진다. 길 건너 고구마 밭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파한 시골 장터 같이 난장판이다. 집사람이 "여보! 또 당했어! 고구마 넝쿨이 없어져 버렸어!" 당황해 어쩔 줄 모른다. 

서둘러 고구마 밭으로 달려갔지만 멧돼지들은 오간데 없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 "이럴 수가! 분명히 태양광 전등을 12개나 설치했는데… " 고구마 맛을 본 멧돼지들에겐 태양광 전등이 이미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변의 태양광 전등에서는 아직도 희미한 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우리 밭 아래는 박 씨 아저씨 고구마 밭이다. 아저씨는 작년에 밭에다 라디오를 켜 놓아 멧돼지 화를 면했다. 수확한 고구마 중 고구마 한 상자를 가져와서 멧돼지 피해를 면하고 싶으면 라디오를 켜놓으라고 권했다. 저녁 10시가 되면 아저씨 밭에서는 구성진 옛날 가요가 흘러나오고 날이 저물면 우리 밭에서 12개의 태양광 전등이 주변을 밝히며 보초를 섰다. 

멧돼지들은 태양광 전등을 가로질러 우리 고구마 밭을 초토화 시켰듯이 박 씨 아저씨 라디오를 축구공 삼아 놀면서 고구마 밭을 뒤집어 엎어 놓았다. 망연자실한 우리 집사람과 넋을 잃은 박 씨 아저씨의 멧돼지 성토가 이어진다.

"아저씨! 오토바이 아저씨가 작년에 우리 고구마 밭을 엎은 멧돼지를 잡았기 때문에 올해는 멧돼지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하셨지 않아요?"

"그놈이 아니었던 갭이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꼬마 도깨비의 선물'에서 점심인 빵을 잃은 가난한 시골 농부는 "부스러기에 불과한 내 빵을 누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훔쳐갔을까? 부디 내 빵으로 허기를 면했으면 좋겠군" 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꼬마 도깨비가 자기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계략에 말려들지 않았다.

"다음은 전기충격 울타리다" 하면서 인터넷매장에서 모델을 고르고 있는 나는 꼬마도깨비의 계략에 말려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생존경쟁의 첫 번째 조건인 자연의 선택압력을 견디기 위해서 전기 충격 울타리를 설치하고 이게 무너지면 엽총 들고 야간보초라도 서야한다는 것일까?

집사람은 당뇨병을 지병으로 앓고 있고 합병증인 뇌졸중까지 겪은 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고구마를 꼭 필요한 식량으로 여기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감자는 당뇨병에 좋고 당분이 많은 고구마는 해로운 음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고구마는 섬유질이 많고 혈관의 지방을 제거하는 기능 때문에 당뇨병 환자들에게 매우 유익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고구마가 생산되는 시기부터 하루에 한 끼는 고구마를 먹어왔다.

작년에는 유독 고구마가 비싸 만원어치 사봐야 한두 끼 밖에 먹을 수 없었던지라 올해 50여 상자 고구마 생산 목표는 집사람이 지리산 시랑헌으로 귀농하게 된  이유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평생을 살 계획인 집을 짓느라 눈코 뜰 새가 없는 상황에서도 집사람이 새벽 6시가 되면 텃밭으로 달려가는 까닭이다. 덕분에 오이, 호박, 들깨, 상치, 부추, 수수, 땅콩 등 밭작물들이 싱싱하고 풍성하게 식탁에 오르지만 사실 이들은 고구마를 돌보는 틈새 시간을 이용한 부수작물이다.

이런 상황의 집사람과 공생을 위한 합의 조건은 합리적이고 공평해야할 것이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농약을 하지 않기 때문에 1/3은 잡초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이고,  1/3은 야생동물을 위한 것이라면 나머지 1/3은 힘든 고생을 하며 건강을 지켜보겠다는 노부부 몫으로 남겨 놓아야 된다는 것이다.

멧돼지는 고구마가 굵어지기도 전에 싹쓸이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내년부터는 전기충격 울타리를 설치할 것이고 그것도 무너지면 집에서 기르는 진돗개 '호야'와'햇살이'를 배치할 것이고  그들을 지원할 엽총을 준비할 생각이다. 생존을 위한 것이다.

자연과 상생하겠다며 귀농한 우리 노부부의 선택이지만 멧돼지와의 공생관계는 이렇게 깨졌다.


태그:#고구마, #멧돼지, #귀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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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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