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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 유황온천

 문강 유황온천
문강 유황온천 ⓒ 이상기

하루 종일 빗속을 걸어 문강온천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15분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몸을 씻기 위해 온천으로 간다. 문강온천은 유황온천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피부의 각질을 연화시켜 피부각화증, 만성습진 등의 피부병에 특히 좋다. 그리고 모세혈관을 확장시켜 만성 류마티즘, 고혈압, 당뇨병과 부인병, 동맥경화, 무좀 치료에 뛰어난 효능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처럼 마실 수도 있는데, 냄새도 그렇고 해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유황온천물을 마실 경우 몸속의 중금속과 약물 등이 해독될 수 있다고 한다. 문강 온천지구는 2005년 3월부터 사업을 시작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0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웰빙 휴양형 온천으로 개발되었다. 문강 온천지구의 면적은 2,483㎢이고, 1일 가채수량은 6,100t이다. 현재 문강 유황온천에는 호텔과 아이템플 문강연수원 등이 영업을 하고 있다.

온천에 들어가니 유황냄새가 확 끼쳐 온다. 그런데 뜨거운 온천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지난 몇 일간 팔다리가 햇볕에 타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니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얼하다. 나는 바로 찬물로 들어가 온천욕을 한다. 지금까지 온천에 가서 찬물에서만 지낸 건 난생 처음이다. 전체적으로 온천 시설도 좋고 바깥 조망도 좋다. 문강 유황온천은 수안보 온천, 앙성 탄산온천과 함께 충주를 대표하는 삼색 온천이다.

장고개를 넘어 세성리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수회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수회리 ⓒ 이상기

아침에 일어나니 대지가 촉촉이 젖었다. 어제 비 때문인지 옅게 안개도 끼었다. 그렇지만 공기에 습기가 있으니 오히려 상쾌하다. 우리는 문산의 윤갈미 고개를 넘어 세성리로 가지 않고, 수회리 신원으로 해 장고개를 넘을 예정이다. 장고개는 옛날 충주에서 수안보 문경으로 가는 옛길에 있는 중요한 고개다. 장고개라는 이름은 충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노루(獐)가 자주 나타나는 고개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우리는 신원의 과수원을 지나 장고개로 올라선다. 온 길을 되돌아보니 수회리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회리는 한때 면이 있던 큰 마을이었다. 연풍군 수회면 주막동(酒幕洞)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무두리, 원통, 새터를 합쳐 수회리라 했다. 처음에는 괴산군 상모면 수회리였다가 1963년 중원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되어 현재는 충주시 수안보면 수회리이다.

 장고개를 넘는 대원들
장고개를 넘는 대원들 ⓒ 이상기

수회리는 적보산(績寶山, 九峰山, 첩푸산) 아래 고운천과 석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물이 돌아가는 동네라는 무두리 또는 무더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적보산 북쪽사면에는 신임경찰 교육기관인 중앙경찰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1987년 9월 개교해 2012년 7월 27일까지 272기의 신임경찰을 배출했다. 수회리는 현재 200가구가 살고 있으며, 그 중 농가가 167가구, 비농가가 33가구이다.

고개에는 옛길이 분명하다. 관찰사가 부임차 가고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가면서 지나다닌 길이라, 마차나 가마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폭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하지를 않아 나무들이 길을 침범해 폭이 많이 줄었다. 고갯마루에 이르니 최근에 생긴 절이 보인다. 대웅전, 산신각 등을 새로 짓고 앞마당과 축대에 꽃을 잘 가꿨다. 스님이 마침 길을 청소하고 있어 대화를 나눠 보니 환경과 조경에 관심이 많다.

 장고개에 새로 지은 절집
장고개에 새로 지은 절집 ⓒ 이상기

고갯마루에는 느티나무도 있고, 돌무더기도 있다. 서낭당이 있었는데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조금은 훼손된 것 같다. 여기서 우리의 다음 목적지 세성리 사과탑까지는 1 ㎞ 남았다. 내려가는 길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혔다. 고개를 내려오니 3번과 36번 국도가 지나간다. 우리는 충주의 상징조형물인 사과탑을 지나 세성1리로 간다. 마을 입구에는 유영길과 유항 부자의 신도비가 있다.  

신매리 유물관에서 옛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다

세성리에서 충주시 종민동으로 가려면 설운리를 지나 신매리로 넘어가야 한다. 신매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신매 고개고, 그곳에서부터 충주호를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신매리에서 재오개리를 거쳐 목벌리로 넘어가며 계속 충주호를 볼 수 있다. 길은 충주호에 연한 산자락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고개를 넘어 신매리 전주이씨 화의군파 유물관에 이른다.

 매남 전주이씨 유물관
매남 전주이씨 유물관 ⓒ 이상기

그곳에는 유물관을 관리하는 이홍선씨가 나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영모각 안으로 우리를 안내한 그는 자신은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면서 겸손해 한다. 그러면서 먼저 이병숙공 초상화에 대해 설명한다. 이병숙(李炳淑: 1828-1880)공은 살미면 매남에서 태어나 1855년 무과에 급제한 다음 1866년 병인양요 때 절제겸포사(節制兼捕使)로 강화도 정족산성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 때 적의 총탄에 귀를 잃어 초상화를 정면으로 그리지 않고 약간 측면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쪽 귀를 표현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1868년 7월 강화도 주민들은 '행절제겸포사 이공병숙 영세불망비'를 세워 그 공을 기리고 있다. 그 내용을 보니, 공은 위기를 맞아 그것을 일거에 극복하였으니, 그 재주로 인해 간성이 되어 만고에 그 이름이 남을 것이라고 썼다. 나는 병숙공의 그 다음이 궁금해졌다. 마침 옆에 교지가 있어 내용을 살펴보니, 병숙공은 1871년 8월 21일 절충장군 영종포진 수군첨절제사 겸 경기수군 좌방어사 진무영좌해방장 인천감목관에 임명되었다.

 이병숙공 초상화
이병숙공 초상화 ⓒ 이상기

쉽게 말하면 영종도를 지키는 수군첨사로 인천감목관을 겸했다는 뜻이다. 인천과 영종도를 지키는 최전방 수군부대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1874년 그는 남양부사를 지냈고, 1880년 세상을 떠나 화의군 충주지파 선영에 장사지냈다. 병숙공의 아들인 정화(正和)공도 1874년 무과에 급제했고, 손자인 관성(觀性)공도 1889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러고 보니 병숙공 집안은 무사의 기질을 타고 난 모양이다.
   
이곳에는 또한 교지가 여럿 더 있다. 그리고 시권도 있다. 상형(商衡)공의 시권이 눈에 띈다. '내부지거(乃復持去) 부(賦)'라는 제목으로, '이에 다시 지키며 가련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식년감시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상형공이 바로 병숙공의 아버지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민속자료전시관
민속자료전시관 ⓒ 이상기

이곳을 보고 나서 우리는 민속자료전시관으로 간다. 민속자료전시관에는 의식주, 의례, 신앙, 교육, 의약, 농축산업, 상공업에 관한 것이 분야별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저울도 보이고, 구유도 보이고, 농기구도 보이고, 제기도 보인다. 그리고 다른 방에는 고서가 따로 전시되어 있다. 고서로는 사서삼경, 고문진보, 두시, 역서, 화의군파보, 호구단자 등이 보인다. 그 중 『이생원댁 행실록』이 눈에 띈다. 모두 34쪽이며 가로 16.5㎝ 세로 30㎝의 필사본이다.

이생원댁 행실록 살펴보기

<이생원댁 행실록>은 살미면 매남에 사는 이생원댁에 전해 내려오는 내방가사다. 여기서 이생원댁은 전주이씨 화의군파 충주지파 12대 종가를 말하고, 행실록은 올바른 행실을 하도록 알려주는 책을 말한다. 이 책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가 훈민해몽가고 다른 하나가 복선화음가다. 훈민해몽가는 백성을 가르쳐 무지몽매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노래다. 복선화음가는 선한 사람이 복을 받고, 음탕한 사람이 재앙을 당하는 노래다.

 훈민해몽가 마지막 부분: 14, 15장, 후기
훈민해몽가 마지막 부분: 14, 15장, 후기 ⓒ 이상기

훈민해몽가는 모두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삼강오륜, 권농과 권학, 마음가짐과 서로 돕기, 말조심 등으로 되어 있다. 14장 말조심의 일부를 옮겨본다.

남의 말 듣기 좋다 남의 말 전치 말고
언짢은 말 듣더라도 말씀 참아 생병 될까?
쌀은 쏟고 줍거니와 말은 하고 못 줍나니
성나거든 말을 말고 남의 충동 더욱 참소.

 복선화음가
복선화음가 ⓒ 이상기

복선화음가는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가, 시집살이, 고진감래, 남편 출세, 딸의 딸의 출가, 친정어머니의 당부, 친정어머니의 꾸중이 그것이다. 부자집 규수가 가난한 집으로 출가해서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누리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복선화음이라는 제목과는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인이 출가를 해서 참고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음탕한 생각을 하면 재앙을 당할 수 있으니,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이 책은 고인이 된 전주이씨 화의군파 충주지파 종손이던 이재붕씨가 1990년 현대어로 고치고 주석을 달아 발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풍속화가 김만희 선생이 그린 삽화가 들어있어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더욱이 마지막 부분에는 내방가사답게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민요로 작곡하여 악보를 붙여놓았다. 작곡은 충주시립 가야금연주단 상임지휘자이던 정장선씨가 맡았다.

이생원댁 전통가양주 백엽주 이야기

 백엽주를 담그는 이재붕씨
백엽주를 담그는 이재붕씨 ⓒ 이상기
매남 이생원댁에는 또한 백엽주(柏葉酒)라는 전통가양주가 있다. 이생원댁 종손인 이재붕씨의 조부모로부터 3대에 걸쳐 전해 내려왔다. 백엽주는 이정표(李正杓: 1872-1950) 공과 할머니 순흥안씨 인보(順興安氏 仁輔: 1873~1950) 여사가 1936년 서울 신길동에 있는 화의군파 대종가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한다.

문헌을 통해 우리는 백엽주의 역사가 800년이 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엽주에 대한 기록은 고려와 조선시대 시문에서 수없이 많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궁중과 사대부 집에서 연초에 즐겨 마셨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백엽주는 조선시대 대중주라기보다는 지위 높은 사람들이 특별한 때 마시는 축원주(祝願酒)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한 술이 조선 후기로 오면서 양반가에 전승되는 전통가양주로 변했고, 이생원댁에까지 그 제조법이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엽주 제조법은 그 후 며느리인 안산김씨 제수(安山金氏 濟壽:1894~1964) 여사에게 전승되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이재붕씨도 할머니와 어머니 고부(姑婦)가 매년 초여름 백엽주를 함께 빚는 것을 보고 제조법을 익혀왔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1964년부터는 이재붕씨 자신이 직접 술을 빚어 여름에 차게 해서 마시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이재붕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현재 백엽주의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살미면#문강 유황온천#수회리#신매리 박물관#백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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