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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세련된 문장과 독특한 발상의 소설을 내놓는 작가다. 그의 소설 <어둠의 저편>은 하룻밤 사이에 도시의 한 쪽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다룬 것으로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의 언니를 둔 평범한 동생 마리. 그녀가 한 밤중에 일곱 시간 동안 겪는 기이한 경험들이 소설 안에서 세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마리에게 있어 언니는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다.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일찌감치 잡지 모델이 되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언니는 집안에서는 공주 대접을 받았고, 그 덕분에 언제나 숭배의 저 꼭대기에 놓인 인물이었다. 결국 이 모티브는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며 욕망의 대상과 그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자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어진다.

대중의 욕망을 받으며 여중생 시절부터 모델 활동을 해온 미모의 언니와 그녀를 부러워하는 못 생긴 동생. 하지만 언니는 자신의 미모로 인해 대중의 기대와 응시에 갇혀 살 수 밖에 없고, 이를 돌파하고 싶어 하는 언니의 심리를 소설 속에서는 2개월간의 깊은 잠으로 표현하고 있다.

티비를 켜놓은 채 잠든 언니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저항할 힘이 없는 한 마리 짐승처럼 대중의 시선을 떠날 힘도 의지도 없다. 그저 도피할 방법이 없기에 물에 뜬 듯 부유하며 살고 있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현대인의 표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이미지기로 환기되기도 한다. 이는 결국 대중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 미디어 문화가 가지는 쾌락의 본질로도 연결되어진다.

그런 한편 마리가 한밤 중에 만난 호텔 여지배인에게서 느낀 깨달음도 이와 같다. 원래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있던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일에 휘말리고 타인의 욕망을 강하게 거부하지 못한 이유로 쫒기는 신세가 된다. 깨어서도 쫒기고, 자면서도 쫒기며 그녀의 존재감은 사라져 버린다. 또 하나, 마리가 한밤의 폭력사건에 얽혀서 달려간 곳에서는 돈 때문에 남자의 성적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중국인 매춘부를 통해 새디즘적 폭력과 그로 인해 인간의 무너진 존재감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언니에게 둘러쳐진 대중적 욕망, 그리고 파괴적 충동과 증오를 여자의 몸을 통해 발산하려는 남자들의 욕망. 이것을 현대사회의 보편적 욕망이란 카테고리에 담아서 그려낸 이 소설 안에서 작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여겨지는 의도를 내비쳐 준다. 주제나 줄거리는 크게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여러 사건이 일관성 없이 펼쳐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주인공의 사건이 확연히 매듭짓지도 못한 채 끝나는 것은 우리 일상의 여러 현상들이 가지는 특징과도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작가인 하루키가 이미 말한 바 있는 총합소설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총합소설이란 다양한 인물들이 저마다 다른 사연을 들고 나와서 서로 얽히면서 복합적으로 연결되며 새로운 양상으로 나아가는 형식을 말한다. 우리 삶 자체가 이러한 총합적인 구성 체계를 갖춘 하나의 소설 형식과 다를 바 없다는 점 또한 새삼스럽다. 또한 이 작품 은 그 같은 점에서 한 사람의 하루 일과를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도 매우 흡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결말이란 것은 없다. 단지 지난하고 다양한 방식의 삶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삶이란 것도 누군가의 가치 판단에 의해 희극도 되고 비극도 될 수 있다는 점, 그로 인해 미완성인 동시에 가능성을 품은 것이란 점에서 이 소설은 매우 참신하게 다가온다.


어둠의 저편 - 중독자와의 삶의 길을 찾아서

조혜자 지음, 문예운동(2009)


#어둠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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