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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9일, 군산시립도서관 5층 교양문화실에서 열린 '군산학'(群山學·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네 번째 강좌에서 군산대학교 건축공학과 송석기 교수는 개항(1899) 이후 군산의 도시계획과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 중심으로 강의했다.

송 교수는 대한제국 관제행정의 유일한 건축유산인 구 군산세관 건물 ▲ 외국인 거류지(각국 조계지) 흔적과 격자형 가로망 ▲ 부잔교(뜬다리)로 보는 1930년대 내항 ▲ 임피역과 군산선 철도 ▲ 군산 공설시장과 대야주조장 건물 ▲ 최대 번화가였던 중앙로 1가 등에 대해 설명했다. 그 중 몇 곳을 따라가 본다.

대한제국이 남긴 유일한 건축유산 구 군산세관  

구 군산세관. 해방 후에도 일반인은 신원을 확인하고 출입할 수 있었다
 구 군산세관. 해방 후에도 일반인은 신원을 확인하고 출입할 수 있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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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는 "구 군산세관 건물(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을 개항 초기 이 지역이 행정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건축 유산"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제국 시절(1908) 공사비 8만6천 원을 들여 완공한 건물로 1909년 작성된 '군산세관설비평면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

당시 세관평면도에는 내항과 인접해있고, 주변에는 목포 영사관 군산분관, 우편국(우체국), 일인 거류민회 등이 표시돼 있었다. 당시 세관 앞길은 본정통 출발 지역이었으며, 도로 좌우로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 미곡검사소, 미두장(미곡취인소), 병원 등 식민지 관리기관이 집중돼 있어 군산의 중심지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중세 건축양식 건물인 군산세관은 처음엔 창고와 선박 입출항을 감시하는 망루 등 부속 건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1993년 현 청사를 신축하면서 망루는 헐렸고, 세관 기능이 신축 건물로 옮겨가면서 민원 안내실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국인 거류지 흔적과 격자형 가로망

두부를 자른 것처럼 도로가 반듯한 군산 중앙로의 일본식 건물.
 두부를 자른 것처럼 도로가 반듯한 군산 중앙로의 일본식 건물.
ⓒ 송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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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는 "대한제국 정부의 외국인 거류지 설정은 군산이 근대도시로 탄생한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골격이 유지되고 있는 격자형 가로망은 근대 개항도시 군산의 원형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흔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제가 만든 지도(1906)를 보면 외국인 거류지를 1조통~9조통으로 나눠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동쪽은 죽성포구(째보선창), 서쪽은 월명공원, 남쪽은 명산동,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했는데, 당시 일본영사관 앞길(1조통)에서 지금의 대학로(6조통)까지 도로는 바둑판처럼 정교하다. 

초기 격자형 가로망으로 적용되었던 내항 일대와 금동, 신창동 일부, 장미동 등은 일제강점기 일인들의 상업 및 주거, 행정, 금융시설 등의 건물이 모여 있던 지역으로 가장 번화한 중심지였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건물로 채만식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구 조선은행을 들 수 있다.

거류민단 시절의 군산 거리(1910년 전후)
 거류민단 시절의 군산 거리(1910년 전후)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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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는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했던 문학작품들이 묘사한 것처럼 경사가 급한 언덕에 초가와 토막집이 다닥다닥 있던 지금의 개복동, 창성동, 둔율동, 지역을 격자형 가로망으로 조성된 군산 원도심의 중심지역과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공간으로 꼽았다.

훗날 '말랭이'로 불리었던 개복, 창성 지역은 식민지 근대도시 군산의 이중적인 공간 구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이러한 이중성은 개항 당시 외국인 거류지역을 설정하는 과정에 이미 내재했던 차별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진단했다.

군산선과 부잔교로 보는 1930년대 군산항

내항까지 뻗어나간 철도. 창고 왼쪽으로 부잔교와 금강이 보인다.
 내항까지 뻗어나간 철도. 창고 왼쪽으로 부잔교와 금강이 보인다.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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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는 "군산항(내항)의 출발은 세관 인근에서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축조는 철도 연결과 밀접하게 연관돼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이제 막 개항한 도시에서 철도는 항만의 해상교통과 육상 교통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여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송 교수는 "삼남지방의 곡식 운반을 위해 1912년 개통된 군산선은 1차 축항공사가 끝나는 1915년께에는 현재의 장미동과 금암동 북쪽까지 철도가 연장·증설됐다"며 "이 지역이 축항공사의 주된 대상지로 1931년에는 군산항 역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군산항 축항공사(1905~1938)는 4차로 나뉘어 이뤄진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치르면서도 공사를 강행한다. 특히 3차 축항공사(1926-1933) 때는 3천 톤급 기선 세 척이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는 부잔교 3기가 설치되면서 현재의 내항 모습이 완성된다. 

항구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군산 내항과 부잔교
 항구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군산 내항과 부잔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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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의 변화에 따라 하루 두 차례씩 오르고 내리는 부잔교는 군산이 항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시설로 수탈의 도시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에는 군산으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이 꼭 들러보았던 추억의 근대 유물이기도 하다. 

3차 축항공사 기공식(1926년 6월)에 참석하여 부두에 산더미처럼 쌓인 쌀을 바라보던 사이토 총독의 외마디 탄성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은 일제의 곡식 수탈과 조선의 비극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로써 개항 35주년이 되는 1934년에는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쌀이 2백만 석을 넘어서게 된다.

애잔하게 다가오는 임피 간이역 

홀로 외롭게 군산선을 지키고 있는 임피 간이역
 홀로 외롭게 군산선을 지키고 있는 임피 간이역
ⓒ 송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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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는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 1912년 완공된 군산선(군산-익산) 역사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은 임피역(등록문화재 제208호)이다"며 "임피역은 1924년 준공돼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했고, 현재의 역사는 1936년 신축된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군산-익산 중간 지점에 있는 임피역은 건물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건축사적, 철도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본래 임피면 읍내리에 건립될 예정이었으나 산이 끊기고 기(氣)가 훼손된다는 풍수 지리적 이유로 지금의 술산리를 거치게 됐다고 전한다.

임피역을 거치는 군산선은 삼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 이웃 역들이 모두 사라지고 혼자 남은 역사(驛舍)는 세월 속에 묻혀버린 수많은 사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여인처럼 애잔하게 다가온다.

임피역 건물은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아름답다. 전면과 후면 입구를 맞배지붕으로 구성하였고, 대기실 출입구에 차양을 덧달아 본채 지붕과 차이를 두어 입체감과 함께 그늘을 제공하는 등 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인 건축양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임피역은 1924년 간이역으로 출발해서 통근열차가 없어지는 2007년 12월 31일까지 군산선을 지켜왔다. 한 때는 철도 역사상 최초로 새마을호가 정차하는 무인역이 되기도 했으나 수요가 극히 낮아 2008년 5월 1일부터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군산의 최대 번화가였던 중앙로 1가

1930년대 모더니즘 건축물로 알려지는 군일유리점
 1930년대 모더니즘 건축물로 알려지는 군일유리점
ⓒ 송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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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일유리점 건물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건물로 알려지는 서울 미도파백화점
 군일유리점 건물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건물로 알려지는 서울 미도파백화점
ⓒ 송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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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는 1930년대 군산의 중심도로이자 번화가였던 명치통(중앙로 1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근대유물로 '군일유리점' 건물을 꼽았다. 크지는 않지만, 1930년대를 상징하는 유물로 서울의 단성사, 미도파백화점 등과 비교되는 가장 첨단의 건축물이라는 것.

이어 송 교수는 "이 건물(군일유리점)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넓은 유리창을 사용하고 모서리 부분을 곡선으로 처리한 점 등에서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반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모더니즘 건축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로 1가는 이름에서 나타나듯 최근까지 군산의 중심 상가였다. 1934년에 만든 군산 지도에는 군일유리점 자리에 '대야사진관'(大野寫眞館)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먹고 살기도 바빴던 당시 조선 백성에게 사진관은 꿈을 찍는 장소로 느껴졌으리라. 

송석기 교수는 "1930년대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모더니즘 건축은 식민지 도시에서 상업적 소비문화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며 "소비문화 확산에 따라 1930년대에는 백화점, 극장 등 민간인 상업 건축물 신축이 증가했고, 이들 중에는 모더니즘 경향의 건축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설명을 끝으로 강의를 마쳤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군산학 강의, #송석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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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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