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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 도서 <잡초는 없다> - 윤구병(2011.7.16, 보리)
잡초는 없다도서 <잡초는 없다> - 윤구병(2011.7.16, 보리) ⓒ 백승범

여기서는 모두 새로 배워야 한다. 내 이웃에 살면서 농사짓는 어른들은 젊으나 늙으나 모두 내 선생님들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들은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는다. 그리고 일부러 어려운 시험문제를 내서 골탕을 먹이지도 않는다. 내가 몰라서 쩔쩔매면 자기 일 팽개치고 와서 도와준다. 나는 여기에 살면서 이제까지 한 문제에 정답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온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몸으로 깨닫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봄에 콩을 심으려는데 언제 심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동네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물으면서 마음속으로 틀림없이 몇 월 며칠에 심는다는 대답을 해주실 줄로 믿고 달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할머니 대답이 뜻밖이었다.

"으응,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

이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 책을 보고 날짜를 따져서 씨앗을 뿌리겠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지역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도 온도도 다르고 내리는 비도 바람길도 다른데, 그래서 지역에 따라 씨뿌리는 철도 거두어들이는 철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마치 몇월 며칠이라고 못을 박아야 정답인 것 같고, 다른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시기를 기준으로 대답하면 틀린 것으로 여겨온 내 교과서식 지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 할머니 대답 이상으로 '과학적인' 해답이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감나무가 유난히 많다. 집 안에도 울 밖에도 온통 감나무 천지다. 늘 보는 감나무의 철맞이를 잣대 삼아 콩 심고 팥 심는 때를 가늠하는 시골 어른들의 지혜는 오랜 세월을 두고 해온 세심한 관찰과 경험이 쌓여 생겨난 것이다. 씨 뿌리는 시기를 몇 월 며칠 식으로 못박으려면 온 나라의 땅과 기후와 온도와 강우량과 바람길, 그리고 강과 들과 산을 모두 획일화 해야 한다. 생명의 세계를 기계의 세계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하느님도 할 수 없다. 그뿐더러 그렇게 해놓은 결과는 너무나 끔찍할 것이다. 어느 한 가지 조건만 달라지더라도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은가.

서울대학교에서 수년간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윤구병 교수의 글이다. 그는 책만 읽고, 삶을 놓쳐 버린 것같은 후회 때문에 진정성있는 삶, 교육을 실천해 보고자 서해 변산 지역에 작은 공동체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다시 몸으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진정한 삶은, 진정한 삶의 행복은 자기 스스로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늠하고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할 지 그 방향을 결정짓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걷고 있는 삶의 방향을 알기는커녕, 내 삶의 현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산다. 아니 알기를 거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교육자로 반평생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역시나 학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교육에 닿고 있다.

......그러고 보니 현재 우리 학교 제도도 공장과 비슷하다. 저마다 다른 학생들의 소질과 소망과 능력과 취향을 무시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 내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학생들은 미래를 꽃피울 소중한 씨앗들이고 그 씨앗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데, 하다못해 한 콩깍지에서 나온 콩이라도 자라면서 달라지는데, 어쩌자고 똑같은 나사못으로 깎아내려고만 들까. 그리고 나도 무엇에 홀려 그런 일에 앞장서 왔을까.....

학생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나의 입장도 그러하다. 하물며 학생들의 키와 몸무게도 언제 어떻게 자라고 늘어나느지 가늠할 수 없다. 몇 년을 자라지 않다가 한 해만에 훌쩍 크는 아이도 있고, 갑자기 살이 늘어낳다가 몇 년동안 변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학교 현장의 교육과정은 어떠한가? 수많은 학생들의 꿈과 소망과 진로희망도 다를 것인데, 똑같은 커리큘럼을 똑같은 교재로 똑같은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몸서리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학생들을 닥달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훼손하는 일이 분명하다.

달라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그들이 꿈꾸는 미래도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의 답으로 한 줄 세우기는 우리 인생에 아무런 행복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좀더 느리게, 좀더 여유롭게, 좀더 깊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견지해야 할, 미래를 다듬어 갈 유일한 교육의 희망일 될 것이다.

풀 꽃
                 -  나태주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윤구병#교육#학생#잡초는 없다#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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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 경북경육청 소속 중등 국어교사 평소 시사적인 사안에 관심이 많으며, 개인적인 고민과 생각을 함께 공유하며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또 학교현장에서 느끼는 감회와 앞으로의 비전, 기대 등을 소개하여 공교육의 미래상을 함께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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