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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개론> 벌써 털렸다
영화 <건축학개론>벌써 털렸다 ⓒ 명필름
며칠 전이었다. 출근길에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올린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봤는데,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앞에서 말도 잘 못하는 것 등 완전히 자신의 20대 때 이야기 같다는 소감이었다.

나는 영화를 본 30대 남성들의 일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녀석은 영화를 극장이 아닌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봤다고 적어놨다. 400만 관객을 들이며 한국멜로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아직도 절찬리에 상영 중인 영화 <건축학개론>을 극장이 아닌 지하철에서 봤다는 것이었다.

<건축학개론>이 벌써? 비록 나는 녀석의 글 아래에 '나한테도 당장 파일을 넘기라'는 농반 진반의 답글을 남겼다. 하지만, '이건 아닌데'라는 마음으로 관련 뉴스를 찾아봤다. 아무리 그래도 현재 상영 중인 한국영화가 불법 파일로 돌아다니는 경우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의 말은 진실이었다. 수많은 언론은 영화 <건축학개론>이 불법 유출됐고, 제작사 측이 포털 등에 의뢰해 파일의 확산을 막고 있지만, P2P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는 불법파일을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도했다. 과거 소리바다, 당나귀, 푸르나 등을 거쳐 최근에는 토렌토(torrent)에 마그넷(magnet)까지. 소비자의 공짜에 대한 욕망은 항상 규제보다 앞서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 욕망이 <건축학개론>을 삼킨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무척이나 감명 깊게 본 사람으로서 내게 이번 유출 사건은 꽤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영화, 특히 한국영화의 불법복제는 보통 극장 상영이 끝났을 때 시작되는 게 관례이며 그것이 '예의 아닌 예의'인데 이번에는 그 바닥의 룰이 깨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실수일까? 아니면 돈을 노리고 벌인 일일까? 혹여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불법복제 시점이 더 당겨지는 것은 아닐까?

그나마 다행인 건 영화 <건축학개론>이 아직 순항 중이라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이번 불법유출의 폐해를 덮는 건 아니다. 이번 사건은 많은 이들의 창작욕을 꺾었을 것이다. 근 10년을 준비한 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사회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이 불법유출로 인해 유통되었을 때 느껴야 하는 창작자의 허무함. 금전적인 문제도 있지만 아마도 불법유출은 그 제작자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쉽게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함이 항시 존재하는 것이다.

6년 만에 등장한 <삼국지12>

드디어 출시된 <삼국지12> 정식 발매만 기다릴 뿐이다
드디어 출시된 <삼국지12>정식 발매만 기다릴 뿐이다 ⓒ 코에이

사실 내가 이번 <건축학개론>의 불법유출에 대해 새삼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것은 지난 4월 20일 일본에서 발매된 PC게임 코에이의 <삼국지12> 때문이다. <삼국지11> 발매 이후 6년 만에 속편이 나온 <삼국지12>.

아는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일본 코에이사의 <삼국지>는 국내에도 많은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게임 시리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근 20년 동안 <삼국지2>에서부터 <삼국지11>까지 수많은 밤을 중국 통일을 위해 밤을 지세웠으며, 온라인 까페 등을 가봐도 나와 같은 폐인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이런 <삼국지12>가 '삼국지11pk'에 이어 한국 시장에 한글화되어 정식발매될지는 아직 미지수란다. 일본에서의 가격이 원화로 무려 17만 원씩이나 해도 <삼국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지12>의 한국 출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많은 마니아들의 속만 까맣게 태우고 있는 중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6년을 기다렸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6년을 기다렸다 ⓒ 코에이

도대체 왜? 결국 그것은 한국의 불법복제 문화 때문이다. 2010년 코에이코리아는 게임물등급위원회의 심의료 인상 등을 이유로 한국에서 철수했는데, 많은 이들은 그 실제적인 이유로 불법복제가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는 우리 사회의 문화를 꼽는다. 창작자의 수고로움을 전혀 모르는, 정식 제품을 구매하는 이가 오히려 바보가 되는 풍토에서 일본 코에이는 게임 발매로 이윤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판단은 아직까지 유효한 듯하다. 실제로 <삼국지12>가 일본에서 발매된 지 며칠 안 되어 국내 인터넷에서는 <삼국지12>의 불법파일이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물론 출시 다음날 즉시 자국의 문자로 불법유통되기 시작한 중국보다야 양호한(혹은 능력이 부족한) 편이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불법복제는 시간의 문제일 뿐, 아직까지도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삼국지12>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이미 인터넷을 통해 유통시킨 한글패치도 얻을 수 있다. 아마 그것만으로도 난 큰 불편함 없이 게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게임 등장인물들의 일본어 대사들은 완벽하게 알아볼 수 없어도 삼국지 게임만 20년 경력이면 그 정도는 대충 눈치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불법복제된 <삼국지>를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의 발매 취소가 공식화된다면 갈등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파일을 소유하든, 그렇지 않든 <삼국지12>가 정식발매된다면 무조건 구매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국지 마니아로서의 예의이며 <삼국지13>을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불법복제 시장은 어마어마하다. 많은 이들이 불법복제에 앞서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해주기 바란다. 정당한 대가 없는 창작물의 소비는 결국 창작욕을 꺾는다는 것과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부디 <삼국지12> 한글판이 한국에 정식발매 되기를 바란다.


#삼국지#건축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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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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