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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어간다. 걸어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일 없이 하루 종일 걷는 것도 좋아한다. 그럴 때면 먼 길 떠나던 선비처럼 닳아져서 너덜거릴 신발 밑창을 위해, 갈아 신기 위한 다른 신을 준비하기도 한다. 한 번이라도 아파서 누워 자신의 몸을 제대로 건사해보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내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인지.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때,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제대로 잡아주며 일어설 수 있게 돕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아파 본 경험 때문인 것도 같다. 지금 건강한 몸으로, 그 행복과 축복을 누리기 위해, 오늘도 길을 찾아갔다. 봄. 산. 길. 그 아름다운 길을 보고 싶어서 지난 19일 북한산으로 향했다.

 

지하철 길은 길이면서도, 걸어갈 수 없는 길이다. 그 먼 길을 대신 걸어가 주는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에 내려 걸어갈 수 있는 길을 걸어간다. 4월은 꽃대궐이다. 골목마다 담장 너머로 꽃들이 만개해서 꽃잎을 바람결에 날리고 있다. 북한산 들어가기 전 골목길 어느 집 담 밑에 목련꽃이 눈처럼 날리며 길에 쌓여있다.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꽃잎은 향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골목길은 산으로 이어진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 잎이 돋아나고, 잎이 나오기도 전에 꽃을 피우는 진달래 덕분에 고운 연두와 갖가지 초록 속에 수줍은 분홍색이 섞여, 길 양쪽으로는 온통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그 잔잔한 색들의 어울림.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며 화려한 등산복으로 수채화 속에 들어간다.

 

길은 바위 길로 이어진다. 그 길을 걸을 때는 다른 곳을 보면 안 된다. 걷는 것에 집중해야만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아차, 하는 순간 구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산은 적당한 곳에 바위와 돌과 흙길을 섞어놓아 자만하지 않고 걷도록 해준다. 

 

4월. 산 길 옆에는 진달래와 소나무가 친구처럼 맞이해 준다. 소나무 사이사이 핀 진달래. 일찍 핀 꽃은 시들어가지만, 바로 그 옆에는 가장 아름다운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고, 그 위에는 이제 피려고 준비하는 꽃봉오리도 있다. 피카소 그림처럼, 갈라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진달래꽃은, 초록 속에 켜진, 분홍 등불 같다.

 

산길은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한다. 항상 다니는 길이라고, 단골이라고 산은 봐주지 않는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며, 발걸음을 옮겨도 길은 고무줄처럼 늘어나 있는 것 같다. 자바라 물통처럼 접어서 그 거리를 좀 좁힐 수 있다면, 그 땐 길이 아닌 것인가? 

 

한참 힘 들 즈음에 산은 길을 살포시 아래로 내려놓는다. 너럭바위에 잠시 앉아 쉬면 바람이 건듯 불어 땀을 식혀주고, 저 멀리 걸어 온 길을 돌아다보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의 가르마처럼 선을 그어놓았다. 잎이 무성해지는 여름이 되면 가르맛길은 보이지 않겠지.

 

아픈 다리도 쉬고, 걷는 것이 편안해지면, 길은 다시 바위로 이어진다. 진달래는 바위 사이에 피어나, "지금은 봄이에요!"라고 큰소리로 외치듯이 열을 지어 서 있다. 길 위에만 없고, 길이 아닌 곳에는 여기저기 피어있는 진달래. 너 참 아름답구나.

 

길에서는 서 있기가 힘들다. 누군가 지나가야 하니, 한 쪽으로 비켜줘야 하거나, 걸어가야 한다. 길에서 멈추는 것은, 방향을 바꾸거나, 신발 끈을 다시 묶거나, 가는 길을 잃어 사방을 둘러보아야 할 때다. 길 위에서 휴식을 취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지금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 때때로 확인해야 한다. 눈앞에 길이 잘 보여도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  그럴 때 길을 제대로 아는 선량한 사람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평소 눈 밝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볼 일이다.

 

때론 길을 개울이 끊어 놓기도 한다. 소금쟁이가 노니는 개울물. 졸졸졸 실타래처럼 풀어져 길을 지나 계곡으로 간다. 물에 젖지 않으려 폴짝 뛰어 건너서 다시 길을 걸어간다. 사람들은 길이 아닌 곳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꽃그늘 아래서 점심을 먹거나 담소를 나눈다. 자리를 편 사람들의 목소리는 즐겁고 행복하다. 짜증을 내거나 싸우는 소리가 없다.

 

하산 길. 길은 아래로만 펼쳐져 다리가 덜 아프다. 대신에 오로지 걷는 것에만 집중하게 한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산길을 걷다가, 어떤 사고로 다치게 되면, 누군가는 나를 데리고 가야하니, 얼마나 큰 민폐인가? 스스로를 책임지려면 길 위에서 걷는 것을 잘 해야 한다. 

 

오늘 걸은 길은 내일 걸을 길과 다르다. 북한산길. 정진사 입구로 시작해서 족두리봉 아래를 지나, 향로봉 쪽으로 가다가, 향림담으로 내려가 불광공원을 지나 불광사에서 끝이 났다. 차나 오토바이 자전거가 없는 산에서 길을 걸을 때는, 힘들고 숨이 차면서 몸 밖으로 쓸데없는 것들이 빠져나가고, 맑은 공기가 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진달래 핀 산길을 걸은 오늘. 마음 속 창고 정리가 제대로 되었다.

 

그 길을 걷는데 내내 같이 한 사람은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7년의 밤>이다. 살아가면서 걸어가고 있는 인생길에도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두 사람. 그리고 책! 인생 길과 현실의 길이 두 가지가 아닌가 보다. 이 길이나 저 길이나 중요한 것은 역시 잘 걸어야 하는 것. 앞도 옆도 뒤도, 위도 밑도 잘 보면서….


태그:#북한산의 봄, #북한산 등산길, #진달래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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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위생사 . 구강건강교육 하는 치과위생사. 이웃들 이야기와 아이들 학교 교육, 책, 영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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