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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의 눈부신 성공 이후, 전국에 걷기 좋은 이런저런 길이 생긴 것이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걷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잘 알고 있다.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훌쩍 떠나는 것도 좋지만, 바쁜 일상에서 늘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도심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찾아가 가볍게 돌아오기 좋은 길을 소개한다. 고양시의 '고양 누리길'이다. 현재 다섯 개의 코스 40km가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 완성단계는 아니다. '고양 누리길'이 고양시 둘레를 품어 안듯이 감싼 길이 되려면 길이 더 이어져야 하기 때문에 길을 조성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고양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성 고양시장은 “고양 누리길이 제주올레 못지않게 아름다우면서 걷기 좋은 길”이라고 강조한다. 최 시장의 말은 맞다. 고양시장의 입장에서야 '고양 누리길'이 제주올레 뿐만 아니라 산티아고길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는 자신감을 갖는 건 당연하다. 그만큼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보니 그럴 수밖에. 그 길을 여섯 번에 걸쳐 직접 걸은 뒤 소개한다. [편집자말]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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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도시는 낯설기 마련이다. 내게 고양시가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고양 누리길> 5개 코스를 다 걸었더니, 고양시는 더 이상 낯선 도시가 아니라 익숙하면서도 정겨운 도시로 바뀌었다. 길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으로 이어져 그리움으로, 추억으로 남는다. 그러니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지난 17일, <고양 누리길> 다섯 개 코스 가운데 '고봉누리길'을 걸었다. 이 길, 고봉산길을 거쳐 황룡산까지 이어지는 아주 걷기 좋은 도보여행 코스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숲길이 상당히 호젓해 잠시나마 강원도의 어느 깊은 산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이날 도보여행에는 이태형 고양시 녹지과장과 녹지과 관계자가 동행했다.

고봉누리길은 고양시 중산동의 안곡초등학교에서 시작돼 안곡습지공원을 지나간다. 안곡습지공원은 고양시 일대가 개발될 때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주민들의 요구로 살려낸 곳으로 유명하다. 잠시 이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습지 안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볼거리가 많아 유치원 아이들의 견학코스로도 활용된다. 이 날도 어린이들이 습지공원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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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곡습지공원 입구에 고봉누리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므로 출발하기 전에 코스를 꼼꼼히 살피는 게 좋다. 고봉누리길의 전체 길이는 6.72km, 예상 소요시간은 2시간 반. 가볍게 산책하듯이 걷기 좋은 코스요, 길이다. 고봉산과 황룡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져 가끔은 가쁜 숨을 내쉬어야 할 때도 있다.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널찍한 황톳길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길을 천천히 걷는다. 길바닥에 자잘한 나무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김종천 팀장이 '우드 칩'이라고 설명해준다.

"산에 난 길은 비가 많이 올 때는 수로(水路)가 되어서 물이 내려오거든요. 그러다 보면 흙이 같이 쓸려 내려가서 나무뿌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길이 그랬는데, 흙을 가져다가 나무뿌리를 덮어주고 우드 칩을 뿌렸더니 보기가 좋아졌어요."

우드 칩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썩어서 퇴비를 뿌릴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사람이 걷는 길이 비가 많이 올 때는 물이 내려가는 물길로 변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가끔 산길을 걸을 때 나무들이 깊이 묻혀 있어야 하는 뿌리를 드러내는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산길도 사람의 섬세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더불어 깨달았다.

고봉산과 황룡산 일대에는 리기다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단다. 예전에 산이 헐벗었을 때 조림하면서 심은 수종이란다. 그 소나무들 사이사이에 진달래들이 숨어 가녀린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수줍게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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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가 피었다. 봄이다.
 진달래가 피었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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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은 따가웠지만 이따금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어찌나 시원한지 가슴속이 말갛게 개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천사로 가는 갈림길에 있는 체육시설에서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체력단련을 하면 도심의 헬스클럽에서 하는 것보다 몇 배의 효과가 날 것 같다.

"이게 이무기 바위입니다."
"어느 거요?"

길 한쪽에 바위 한 덩어리가 놓여 있다. 얼핏 보면 이무기 같기도 하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성이 잔뜩 난 멧돼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가 눈, 여기는 코, 그리고 요기가 입처럼 보이지 않나요?"

김종천 팀장이 이무기의 얼굴을 일일이 짚으면서 설명을 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이무기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결정적으로 너무 작다. 이무기라면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남은 거대한 구렁이 같은 게 아니던가. 하긴 작을 수밖에 없긴 하겠다. 머리통만 삐죽이 내민 형상이라 몸통이 보이지 않으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슬프다. 욕망은 있으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존재가 아니겠나. 그래서 이무기 바위가 더 작고 초라해 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아나, 천둥번개가 몹시도 심하게 치는 날 저 이무기가 온몸을 비틀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릴 지.

틈새바위
 틈새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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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이무기 바위를 지나 넓고 평평하게 이어진다.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길이다. 이번에는 틈새바위가 나타났다. 흥부가 타놓은 박처럼 가운데 잘린 채 벌어진 바위. 그 사이에 돌을 던져 집어넣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나. 김종천 팀장이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그 사이로 던진다. 들어간 것 같았는데 돌멩이가 다시 튕겨져 나온다. 생각보다 쉽지 않구만요, 하면서 웃었다.

영천사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자승 인형들을 구경했다. 머리를 박박 민 귀여운 아기 스님들의 표정은 밝았다. 점심 때 이곳을 지나가면 절에서 점심공양을 할 수 있으려나, 흑심을 품고 절을 기웃거렸지만 인기척이 없다. 요사채까지 굳이 찾아 들어가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점심공양을 하기는 이른 시간.

영천사 동자승들
 영천사 동자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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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고봉산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고봉산은 고양시의 일산과 벽제를 대표하는 산으로 높이는 208m. 예전에 이곳에 봉화대가 있었다고 하나, 군사시설 안에 있어 확인할 수 없다. 산 위에 올라왔더니, 확실히 전망이 좋다. 멀리 아파트촌이 내려다 보인다.

"사진 안 찍어요?"

볼이 메어져라 보쌈을 입 안에 우겨 넣고 열심히 씹고 있는데 이태형 과장님이 슬쩍 눈치를 준다. 아차차,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늘 '염장질'을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겨야 하는 건데, 먹겠다는 일념 때문에 잠시 잊었다.

서둘러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다시 앉아 먹기 시작한다. 두부는 고소하게 감칠맛이 나고, 보쌈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보쌈 생채 옆에 놓인 하얀 것은 두부다. 여기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심정이 된다.

음식이 감칠 맛이 난다.
 음식이 감칠 맛이 난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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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에서 내려오니 12시가 훌쩍 넘었고, 고봉산 자락 아래에 있는 두부전문점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터였다. 고봉누리길은 오전 11시경에 출발해 1시간쯤 고봉산 길을 걸은 다음에 점심식사를 한 뒤 황룡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 게 제격이라는 생각을 쌀과 보리가 반반씩 섞인 밥에 나물과 고추장, 들기름을 잔뜩 넣고 비비면서 했다. 사진은 먹느라고 바빠 생략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이 뚝 끊긴 것처럼 도로가 나타난다. 자동차도로를 건너 다시 길을 찾아든다. 길 위에서 불쑥 금정굴을 만났다.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현장이다. 한국전쟁 당시였던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북한군에 부역한 사람이나 그 가족 150여 명을 경찰이 이곳 금정굴에서 총살해 암매장한 사건이 금정굴 학살사건이다. 학살당한 이들은 고양과 파주지역의 주민들이었다.

금정굴 입구 표시
 금정굴 입구 표시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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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현장은 걷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역사의 현장을 기웃거린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더불어 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빈다.

고봉산에 이어 황룡산에도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철조망을 따라서 걸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길은 걷기 좋은 산길이요, 숲길이다. 리기다소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길 곳곳에 봄꽃이 봄빛을 맞으면서 피어나 환하게 웃으면서 걷는 이들을 반긴다.

이 길, 평일은 물론이요 주말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걷기 좋은 길이라는 게 김종천 팀장의 귀띔이다. 누군가의 무덤가에 무리지어 피어난 개나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반짝인다. 걷기 좋은 날, 걸으러 나왔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돌은 정성스럽게 놓아야지 소원이 이뤄진다는데...
 돌은 정성스럽게 놓아야지 소원이 이뤄진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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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서원으로 가는 길, 돌무더기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돌멩이 하나를 집어 정성스럽게 돌무더기 위에 얹는 김종천 팀장. 보고 있노라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고양누리길을 직접 걸으면서 코스를 이은 이가 김 팀장이니, 길 곳곳에 흔적과 더불어 정성을 남기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콘크리트로 만든 농수로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저수지나 하천에서 농사에 쓸 물을 끌어오려고 만든 인공수로다. 지금도 물길로 사용되는 듯 수로에 난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와 농수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논으로, 밭으로 물을 끌어가려는 옛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농수로
 농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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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서원
 용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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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용강서원으로 이어졌다. 태극문양이 그려진 용강서원의 3개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용강서원은 조선 태종이 태조 이성계를 모셔오고자 보낸 문안사 박순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었다. 서원은 숙종 때, 박순이 죽임을 당한 함경도 용흥강변에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분단으로 인해 후손들이 제사를 모실 수 없게 되자 1980년에 이곳 황룡산 자락에 용강서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용강서원을 지나 상감천 마을로 들어서면서 고봉누리길은 끝난다. 상감천 마을로 내려가는 길, 어느 집 마당에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엄청나게 큰 나무였다. 몇 백 개의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봄이 무르익긴 익었나 보다.

고양시의 봄은 서울보다 일주일쯤 늦게 찾아든단다. 다음 주면 고양시의 벚꽃들이 만개할 터, 그 시기에 맞춰 꽃박람회까지 열린다니 이 봄이 가기 전에 고양시에서 꽃과 더불어 봄을 만끽한다면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고봉누리길 : 안곡초등학교 --> 안곡습지공원 --> 영천사 --> 고봉산 --> 금정굴 --> 황룡산 --> 용강서원 --> 상감천마을 (난이도 중하)

[고양누리길 ①] 행주누리길을 걷다
[고양누리길 ②] 서삼릉 누리길을 걷다
[고양 누리길③] 공릉천 따라 백로 날아오르는 '송강누리길' 걷다
[고양누리길 ④] 고양동 누리길을 걷다


태그:#고양누리길, #고봉누리길, #고양시, #장희빈, #금정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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