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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대 앞에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깁니다. 새마을 시장에 가서 장을 볼까 하다가 상품권을 사용하려고 모처럼 마트에서 장을 봤는데 계산대 세 곳이 모두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깁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줄에 맨 꽁무니에 가서 서 있는데, 누군가 내 뒤에 와서 섰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안녕하세요."

돌아보니 같은 동네에 사는 할아버지입니다. 나도 얼마나 반가웠는지를 모릅니다. 오래간만에 만났습니다.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아도 서로 살고 있는 동이 다르기 때문에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장 보셨군요. 그간 별 일 없으셨어요?"
"그럼요.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네요."

칠십 후반이신 어르신은 덕담부터 하고 조용히 웃습니다. 숱이 많은 흰머리는 여전한데 눈가에 잔주름이 많이 늘었습니다. 내 친구이기도 한 어르신의 아내는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르신은 혼자 살고 있습니다.

아내를 잃고 담배를 다시 태우는 어르신

어르신의 바구니에는 요즘 한창 쏟아져 나오고 있는 미국산 오렌지가 몇 개 들어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하긴 어르신은 부식 문제로 장을 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며느리가 여러 가지 밑반찬들이며 생선조림, 김치, 깍두기, 나물무침, 심지어는 사골곰탕까지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준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전기밥솥에 밥만 하면 됩니다. 빨래는 물론 세탁기가 하고요.

어르신도 내 장바구니를 보았습니다. 시금치와 새송이버섯이 맨 위에 있습니다. 어르신이 뭐라고 말을 할 것 같은 눈치였지만, 줄이 줄어드는 바람에 나는 얼른 돌아서서 줄을 따라 한 걸음을 다가갔습니다. 어르신도 내 뒤에서 한 걸음을 다가 왔습니다. 어르신이 잔기침을 합니다. 담배냄새가 났습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모양입니다. 언제부터 태웠을까. 아마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일까.

어르신 부부와 나는 십년지기입니다. 동네 울타리 길을 도는 걷기운동을 하다가 알게 됐는데, 그때 이미 어르신은 담배 애호가였습니다. 알고 보니 어르신 부부와 나는 비슷한 나이로 동시대를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르신 부부도 나도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통하는 게 아주 많았습니다. 걷기운동을 하다가 어르신 부부를 만나면 길섶 긴 의자에 앉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흘러간 그 옛날 이야기를 하고는 했습니다.

내가 20대 초반에 관람한 나탈리우드와 워렌비티 주연의 감성적 영화 <초원의 빛>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애절한 사랑이 담긴 영화 속 명장면들을 추억하느라 나는 어르신이 자꾸 피워대는 담배연기를 심각하게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달랐습니다. 어르신은 그 다음 날부터 금연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는데, '마누라 도끼눈 안 보려면 끊어야지 별 수 있냐구'라는 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피우는 모양입니다.

어르신과 나는 나란히 마트를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는 지하철역이 있는 지하도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자 맑은 햇살이 한창입니다. 춥지도 않고 바람도 없고 하늘도 푸르렀습니다. 나는 '날씨가 참 좋아요'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마트에서도 지하도에서도 몰랐는데 햇살을 받은 어르신은 어딘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걷기운동 안 하시나 봐요. 지난해부터 한 번도 못 뵜어요."
"안 해요. 그 사람 웃는 소리가 들려서요."

나는 가슴이 뭉클해 졌습니다. 아내의 웃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면서 조그맣게 허밍으로 부르는 노래 소리까지 들렸을 것입니다.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차 소리 등등 온갖 소리가 다 들려오는 울타리 길에서도 아내의 웃는 소리가 들리는데 아내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는 집에서는 오죽할까. 대체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그 아픈 가슴속이 무디어 지기 시작하는 것일까.

입맛이 없어요... 무짠지만 있으면 되는데

"그럼 집에만 계세요?"
"매일 노인복지관에 가요. 이것저것 배울 게 많아요. 이젠 친구도 많아졌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겠어요. 언제 한 번 와 보세요."
"네, 한 번 가볼게요."

어르신은 멋지게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몇달 동안은 충격으로 인해 체중이 줄기까지 했던 어르신입니다. 하나뿐인 자식인 아들은 분가해서 살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외롭게 혼자만이 남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달라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르신이 또 담배 냄새를 풍기면서 잔기침을 합니다. 잔기침이 아니라 목에 가래가 끼여 일부러 컹컹 기침을 해서 내려 보내는 소리입니다.

"다시 담배 피우시는 군요."
"이젠 끊어야겠어요. 가래가 생겨서 불편한데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다가 요즘 통 입맛이 없지 뭐예요. 시원하고 새콤한 무짠지 국물을 떠먹으면 입맛이 돌 것 같아서 무짠지를 사러 나온 건데 반찬코너에 무짠지가 없더라구요. 집사람이 살았을 적에는 가을이면 꼬박 무짠지를 했는데…."

입맛이 없으면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경험이 많은데, 그냥 식빵 한 조각이나 음료수 한 잔으로 때우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들과 달리 노인들은 그 티가 금방 얼굴에 나타납니다. 아까 어르신이 기운이 없어 보였던 것은 그래서일 것입니다.

무짠지를 챙기다... 가슴이 뭉클

어르신의 입맛을 찾아줄 것입니다
▲ 무짠지 어르신의 입맛을 찾아줄 것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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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김치냉장고 속에서 맛있게 잘 익었습니다
▲ 김치냉장고 속에 무짠지 겨우내 김치냉장고 속에서 맛있게 잘 익었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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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짠지 하나 드릴게요. 요즘 김장김치가 군내가 나서 며칠 전부터 무짠지를 꺼내먹고 있어요."
"아이구, 고맙습니다. 요즘이 딱 무짠지 먹는 시기죠. 글쎄 내가 무짠지가 먹고 싶다구 했더니 아들도 며느리도 그 짠 걸 왜 먹냐구 그래요. 아들은 어렸을 적에 무짠지를 먹었으면서 그 개운한 맛을 잊어먹었나 봐요. 하긴 식생활이 옛날과 달라졌지요."
"우리 아들도 무짠지 안 먹어요. 이러다가 무짠지가 추억 속에 음식이 될 것만 같아요."

무짠지는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의 반찬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가을이면 집집마다 배가 불룩한 큰 대독 가득히 왜무로 무짠지를 담갔습니다. 요즘은 왜무를 보기가 어려워서 그냥 가을무로 무짠지를 담그지만 그때는 굵고 긴 왜무가 많았습니다. 왜무로 담근 무짠지는 아주 연해서 아이들도 잘 먹고는 했습니다. 무짠지는 김장김치가 떨어질 무렵인 이른 봄에 꺼내 먹기를 시작해서 빨강 봉숭아꽃이 한창인 한 여름에 오이지를 담글 때까지 먹고는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김치냉장고를 열었습니다. 잘 익은 무짠지 두 개를 꺼냈습니다. 어르신이 무짠지를 먹고 입맛이 돌게 되면 더 건강해지고, 또 복지관에서 취미가 같은 여자친구도 사귀어 더 멋진 나날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세상을 떠난 친구의 순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미안해,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태그:#무짠지, #어르신, #십년 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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