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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가 마련돼 있다.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가 마련돼 있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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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2명이다.

지난달 30일,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아무개씨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 21번째 죽음 이후 '다시는 죽음의 숫자를 세고 싶지 않다'며 절규하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바람이 두 달이 채 안 돼 무너지고 말았다.

더구나 희망퇴직자, 무급 휴직자, 분사된 시설팀의 노동자, 노동자 부인 혹은 가족이었던 21명의 사망자와 달리 함께 투쟁했던 정리해고 당사자가 사망한 것은 이씨가 처음이다.

이에 서울시 중구 대한문 앞에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씨의 분향소가 마련됐다. 봄햇살이 따뜻하게 서울 하늘을 내리쬐지만 콘크리트 바닥 위 마련된 분향소는 한없이 쓸쓸하다. 21에서 22. 덧붙여진 하나의 숫자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3년의 긴 싸움과 절망의 시간이 응축돼 있다.

2009년 정리해고 이후 3년을 구직자로 살다 삶 마감

3월 30일, 쌍용차 정리해고자 이씨가 김포에 위치한 자신의 임대아파트 23층에서 투신 자살했다. 이씨의 죽음이 알려진 것은 나흘이 지난 이달 3일, 이에 쌍용차 노조는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고인의 죽음 앞에 술 한 잔 올리고, 향불이라도 피워 외롭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이마저도 하지 못해 살아 숨 쉬고 있는 해고노동자들의 가슴을 더 후려 판다"고 말했다.

1000일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지난 2009년 4월 8일, 쌍용차는 노동자 2646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당시 쌍용자동차 총 구조조정 인원은 희망퇴직자 2026명, 정리해고자 159명, 무급자 461명 등 총 2646명이었다. 이는 전체 직원의 36%에 이르는 규모다. 당시 해고의 사유는 '경영적자'였으나 쌍용자동차의 생산자 1인당 매출액은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였고, 2010년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도 이 때 해직된 노동자 중 한 명이다. 이씨는 1995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해 부품품질팀 등에서 15년간 일해온 장기간 근로자였다. 조용하고 차분했던 그는 해고 후 5월부터 진행된 77일의 평택공장 점거농성에 참여하며 사측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 이 투쟁기간 동안 쌍용차 사측은 경찰을 앞세워 테이저건(전기 충격총) 사용, 헬기로 최루액 다량 공중살포, 장기간 단전단수로 생명 위협, 응급치료 방해, 토끼몰이 진압 등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버티며 투쟁을 이어갔다. 사측은 이씨에게 '정리해고자'에서 '희망퇴직자'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이후 그는 평택을 떠나 새 직장을 찾아 다녔다. 즉, '사측'과의 투쟁에서 '살기'위한 투쟁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

그러나 그후 약 900일이 지난 1월까지 그는 여전히 구직중이었다. 이에 이씨는 쌍용차 부당해고 무효소송에 희망을 걸었으나 소송은 1심에서 패소했다. 쌍용차 노조는 "숨진 이아무개씨는 소송에서 1심 패소 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비관해 2심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2월, 그는 쌍용차지부 사무실을 방문해 "취직하러 면접을 보러 갈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3월 30일 그는 결국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부모도, 형제도 없었다. 아직 미혼인 36살의 젊은 청년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해고자'가 되어 청춘과 인생을 콘크리트에 바쳤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일까. 지난 3년간의 시간을, 23층 아파트 위에서 떠올린 마지막 생각을 그에게 묻고 싶고, 그를 위로하고 싶어도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억울해서... 버티고 있다"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지키던 고동민씨의 뒷모습.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지키던 고동민씨의 뒷모습.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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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문 앞에는 얼굴없는 영정이 걸린 이씨의 분향소가 설치돼 있다. 7일 찾은 서울시 중구 덕수궁앞 대한문에 마련된 분향소 주위는 떠들썩했다. 때마침 시작한 덕수궁앞 수문장 교대식과 시청광장의 '언론탄압 저지를 위한' 플리마켓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시청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향소는 주변 분위기와 달리 너무나 고독했다. 무엇보다 분향소 주변을 서성이는 경찰들은 자리를 찾는 이들을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분향소를 찾아온 이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지키던 쌍용차 노조원 고동민씨의 목소리는 소년처럼 맑았다. 늘 현장 맨 앞에서 소리내어 외치던 모습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 연약한 청년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복직'이다.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에 그는 "복직이 돼야 뭘 하든 하겠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정리해고라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지 사회에 알려졌고..."라며 말을 하다 멈추더니 "해고된 이들이 무엇보다 복직이 되어야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치유센터 '와락'의 정혜신 박사는 지난달 25일 쌍용차 문화제에서 "한 쌍용차 노동자가 21번째 죽음 때 어떻게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괴로움을 호소해 왔다, 최근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힘들어 하는 분들을 많이 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감정의 상태가 어떤가'라고 물어보자 고씨는 "자신은 무뎌지지 않는다"며 "결코 무뎌질 수 없고 가슴은 늘 아프다"고 말했다.

3년 동안 가장 안타깝고 힘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분향소를 가리키며 "이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눈물로 가득 차올랐다. 3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그는 "억울해서... 억울해서 버티고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무엇보다 주변을 감시하며 서성이는 경찰들은 이들의 마음에 더 크나 큰 감옥을 만들었다. 지난 5일에도 이씨의 분향소를 설치하려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쌍용차 노조원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이에, 고씨는 "분향소를 마련한 첫날은 영정사진을 찢기도 하며 분향소 설치를 말렸다"며 "그나마 지금은 조금 괜찮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에게 집회신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분향소는 고인을 기리는 추모제"라며 "추모제는 집회와는 성격이 달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4월5일 서울시청 앞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지부 스물두번째 희생자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노동자, 시민들이 분향소에 설치할 희생자 영정이 담긴 현수막을 경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4월5일 서울시청 앞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지부 스물두번째 희생자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노동자, 시민들이 분향소에 설치할 희생자 영정이 담긴 현수막을 경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 금속노조 제공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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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5일 서울시청 앞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지부 스물두번째 희생자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한 노동자, 시민들이 분향소를 설치하려하자 한 경찰이 쌍용차지부 선전물을 탈취해 달아 나고 있다.
 4월5일 서울시청 앞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지부 스물두번째 희생자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한 노동자, 시민들이 분향소를 설치하려하자 한 경찰이 쌍용차지부 선전물을 탈취해 달아 나고 있다.
ⓒ 금속노조 제공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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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발걸음... "가슴이 아프다"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찾은 대학생들.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찾은 대학생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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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음식, 시설하나 마려 돼 있지 않은 분향소에 놓인 영정그림만이 이곳이 분향소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분향소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분향소 방문을 위해 용인에서 올라온 이부터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 주말임에도 많은 이들이 분향소를 찾았다. 덕수궁을 방문 온 외국인들도 분향소를 발견하고 주위를 서성이거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4명으로 무리를 지은 대학생들은 분향소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조문을 했다. 이태준 학생은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해도 쌍용차 사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가슴이 아프다. 서울 한복판에 분향소까지 만들며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느 누구도 해결 하려 하지 않는다. 왜 무조건 안 된다며 무마시키려고 하는지... 너무 안타깝다."

어린 학생들은 조문이 낯설어 분향소 옆편에 마련된 모금함에 모금을 하기도 했다. 시청광장에서 진행 중인 플리마켓을 가기 위해 들른 여중생은 "쌍용차 사태를 알고 있고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 들렸다"고 말했다.

중후반의 한 남성은 분향소에 오자마자 눈물을 와락 터트리며 자신의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고동민씨를 끌어 안더니 끝내 소리내어 울었고 고동민씨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찾은 사람들.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찾은 사람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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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찾아 용인에서 올라온 유호섭씨와 그의 자녀들.
 대한문앞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를 찾아 용인에서 올라온 유호섭씨와 그의 자녀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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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서 어린 2자녀를 데리고 올라온 유호섭씨도 분향소를 방문했다. 유씨는 "나도 일하는 사람이고 이제 내 나이도 40대 중반"이라며 "나도 언제 이렇게 내쫓길지 모르니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음에 미안함이 남아있어 왔다. 지금 선거철인데 어느 정치인도 관심 갖지 않고 있어 더욱 가슴이 아프다. 3년이나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해결 되지 못했을까.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 아닌가."

여전히 소식조차 모르는 해고노동자만 2000명 정도 남아있다. 이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하다. 현재, 쌍용차 노조는 지난달 21일 쌍용자동차의 새 인수 기업 '마힌드라'의 본국인 인도 대사관을 방문하여 수상과의 공식적인 면담을 요청을 하며 지속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서고 있다.

한편 쌍용차사태 3년을 맞는 4월 8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 후원바자회인 "REMEMBER THEM"이 홍대 앞 두리반에서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개최되며, 21일은 해고노동자 원직복직을 위한 쌍용차 포위의 날 '4차 희망텐트'가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열릴 예정이다.

대한문앞 마련된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 앞을 지키는 노조원. 사람들의 바쁜 걸음 사이로 보이는 분향소는 더욱 외로워 보인다.
 대한문앞 마련된 22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 앞을 지키는 노조원. 사람들의 바쁜 걸음 사이로 보이는 분향소는 더욱 외로워 보인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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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쌍용차 노동지부, #쌍용차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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