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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11일 치러지는 19대 총선에 사상 최다인 20개 정당이 비례대표 등록을 했다고 한다. 생소한 군소정당들이 많았지만, 종교적 색채를 띠는 이름의 정당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기독교자유민주당, 불교정토화합통일연합당, 한국기독당 등인데 크게 보면 불교와 기독교가 현실정치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각 종교에도 여러 정파가 있으니,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이유로 불교와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교일치와 정교분리는 희비를 교차했지만, 현재 대다수 나라에선 국교가 있어도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정교분리'는 기본적으로 종교의 세속화를 막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인간은 어느 사회의 구성원이든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과 무관하게 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는 이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관심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오해는 마치 종교가 정치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것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그 때문에 특정 종교가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면 "왜,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느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사회 현안에 대한 종교인 목소리, 난 찬성한다

지난 3월 12일 오전 문규현 신부가 해군 제주기지사업단 앞에서 열린 '제주 해군기지 반대' 미사에 참석해 기도를 하고 있다.
 지난 3월 12일 오전 문규현 신부가 해군 제주기지사업단 앞에서 열린 '제주 해군기지 반대' 미사에 참석해 기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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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개신교인이기 때문에 개신교로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불교 정당도 나오긴 했지만, 종교라는 큰 맥락에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며 불교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종교는 현실정치에 관심을 둬야한다'다. 그 근거는 종교인 역시도 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사회 구성원은 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호국불교'는 낯설지 않은 단어이며, 기미년 3·1운동 당시에도 불교와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70년대 유신독재 하에서는 진보적인 개신교단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통일운동도 한 바 있다. 80년대 통일운동을 이끌었던 문익환 목사도 진보적인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일원이며, 그가 속해있던 교단도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외의 다양한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종교계가 힘을 모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치 문제가 단지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는 현실 정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느냐?"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나는 "종교 본연의 업무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다. 개신교의 경우 보수적인 태도를 가진 분들이나 보수신앙을 가진 분들이 "정치이야기 하지 말고 말씀만 전하라"고 요구한다. 한미FTA나 강정마을 해군기지, 4대강 문제 등 민감한 사회 이슈를 가지고 설교를 하면 대부분 "말씀이나 전하시지..."라며 불편해 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종교단체에 대해서도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예로 언급한 한미FTA나 해군기지문제, 4대강 문제가 이 나라 국민에게 미칠 영향과 자연환경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침묵하면서 전하는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권 획득이 목적인 정치와는 엄격히 분리돼야 한다

십자가의 정신은 어디로 갔나?
 십자가의 정신은 어디로 갔나?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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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삶과 괴리된 종교, 지금 이 땅의 부조리한 문제는 등한시하고 사후세계에만 관심을 둔 종교와 종교인(교인)들에게 삶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는 종교가 건강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종교는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기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개신교의 경전인 성서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선언적인 고백이 있다. 다양한 신학적인 해석들이 있겠지만, 정부에서 추진하는 '4대강 사업'을 성서 정신에 비춰보며 신앙적으로 찬성이든 반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명백하게 비신앙적이며, 그 결과가 국민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 정치적이라 비난하고, 찬성하는 쪽은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점이다.

다른 여타의 현안에 대해서도 거의 동일하다. 종교는 특정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면서, 혹은 말씀만 전해야 한다면서 침묵으로 찬성표를 던진다. 이럴 때 반대하는 쪽에겐 정치적이라고 온갖 비난을 쏟아 붓지만, 찬성하는 쪽은 정치적이지 않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한 사회구성원이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반면, 정당의 목적은 '정권의 획득 혹은 권력의 획득'에 있다. 종교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세속정치, 정권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와는 엄격하게 분리돼야 한다. 이런 뉘앙스에서의 '정교분리'를 주장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인간의 삶을 옭아매는 정치적인 현안들이나 여타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겠다는 건 문제가 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비례대표에 이름을 올린 정당들은 3%의 표를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자기가 속해있는 종교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부는 그것이 하나의 선교 영역 확장이라고도, 그런 정치적 힘을 가져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으며, 세속적인 욕심의 극대화를 통해 더 많은 자기만의 권리를 누리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권력 좇는 종교인들, 얼마나 타락할 작정인가

오늘날 많은 종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지탄을 받고 있다.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를 세상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불교는 부처의 이름으로 부처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개혁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정당정치를 통해서 이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종교들은 그동안 세력 확장을 위해서 가난한 자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해야 한다. 권력을 잡은 자들의 편에 서서 부화뇌동했던 것,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사이비성 신비주의에 치중하였던 것, 종교를 삶으로 살지 않고 머리로 살게 했던 것, 오로지 자기 배만 채우는데 골몰했던 것, 수많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침묵했던 것 등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종교는 인간의 제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국회의원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하게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그런 양심적인 행동에 대해선 '정치적'이라고 돌팔매질을 하던 이들이, 세속정치에 도전장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 신앙인으로서 자괴감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나 타락할 작정이고, 얼마나 당신들이 신봉하는 신(神)을 욕 먹일 작정인가.

덧붙이는 글 | 김민수 기자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입니다.



태그:#종교정당, #기독교당, #한국기독당, #기독자유민주당, #불교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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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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