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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낙동강 너머로 부산이 보이는 장낙나루(허황옥 때의 도두촌 추정) 풍경. 오른쪽의 산비탈이 이어져 수로왕이 그녀가 오는지 살펴보던 산 꼭대기, 즉 뒷날 그녀를 위해 왕후사가 지어지는 산줄기에 닿는다.
 서낙동강 너머로 부산이 보이는 장낙나루(허황옥 때의 도두촌 추정) 풍경. 오른쪽의 산비탈이 이어져 수로왕이 그녀가 오는지 살펴보던 산 꼭대기, 즉 뒷날 그녀를 위해 왕후사가 지어지는 산줄기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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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에서 와서 도두촌(渡頭村)에 닿았다고 되어 있다. 도두촌은 과연 어디일까? '건널 도(渡)'에 '머리 두(頭)'이니, 이곳은 아마도 강이나 바다를 건너와 배를 대는 포구였을 것이고, 아마 산자락이나 선착장이 머리처럼 툭 튀어나온 지점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결혼 기사를 더 읽어보자. 수로왕이 7세이던 해(48년)의 7월 27일 기사이다.

구간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아직 구하지 못하셨습니다. 신들의 집에 있는 딸들 중에서 가장 예쁜 처녀를 골라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니,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아유타국의 공주가 찾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왕은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경주(輕舟)와 준마를 가지고, (서울 남쪽의 섬인)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했다. (중략)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단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향해 달려왔다. (이를 본)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렸다. (배에서) 사람들이 앞을 다투며 육지로 내려왔다. 신귀간이 대궐로 달려가 왕께 아뢰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신하들이 (허황옥을) 바로 모시고 대궐로 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궁궐로) 돌아가서 (왕에게) 왕후의 그 말을 전했다. 왕도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겨 (중략) 대궐 아래 서남쪽으로 60보쯤 떨어진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하략)

허황옥 때의 도두촌으로 여겨지는 장낙나루의 고목. 과거에 배를 댈 때 묶었던 나무로 전해진다.
 허황옥 때의 도두촌으로 여겨지는 장낙나루의 고목. 과거에 배를 댈 때 묶었던 나무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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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의 신하들은 허황옥의 배를 마중하기 위해 망산도에서 기다렸다. <삼국유사>에는 망산도가 '서울의 남쪽에 있는 섬'으로 나온다. 물론 섬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허황옥의 배가 오는지 보기위해 신하들이 산처럼 솟은 섬에서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망산도를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 188-1번지 일원'의 바위섬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이 망산도에서는 남해의 배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없다. 망산도의 남쪽에는 섬과 바다를 철저하게 가로막는 산이 솟아 있기 때문이다. 낮은 섬 망산도에서 그보다 수십 배 높은 산 너머의 배를 어찌 바라볼 것인가. 적어도 망산도는 그 남쪽이 바다여야 하고, 물길이 북쪽으로 이어져야 하며, 뭍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로왕의 신하들이 마중을 나가는 보람이 있고, 또 '서쪽에서 북쪽으로' 배가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망산도는 유주암으로 보는 게 좋을 듯

강서구 망산도를 '부산광역시 기념물 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데에는 그럴 듯한 사연이 있다. 허황옥이 타고 온 배에 얽힌 설화과 관련이 된다. 허황옥을 태우고 그 멀고 먼 바다를 건너온 돌배는 그녀를 뭍에 내려준 후 아유타국으로 돌아가려고 출발했다가 바닷물 속으로 전복되었다.

이는 파사탑의 위력을 강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올 때에는 심한 풍랑을 진압해 주는 힘을 가진 진풍탑(鎭風塔), 즉 파사탑을 싣고 있었으므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탑을 공주와 함께 낯선 땅에 내려버린 까닭에 아유타국의 사람들은 파도 앞에서 불가항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돌배는 돌섬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에 유주암(維舟巖)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가 가지 못하도록 묶어둔(維) 바위(巖)라는 뜻이니, 아주 그럴 듯한 작명(作名)이다.

흔히 망산도라 부르는 곳
 흔히 망산도라 부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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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강서구의 망산도는 온통 바위들의 결집체이다. 나중에 조금 쌓인 흙을 먹으면서 약간의 나무와 풀들이 자라나기는 했지만, 돌섬 그 자체는 거북등 같은 무늬를 한 돌들이 아래위로 첩첩 쌓인 돌무덤 형태이다. 돌배가 뒤집어지면서 부서진 듯이 보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허황옥이 타고 온 배가 부서져 생긴 그 유주암이 망산도라는 내력은 그것이 망산도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수로왕의 신하들이 허황옥을 기다린 곳이 망산도라 했는데, 어찌 그들이 배가 뒤집혀 생겨난 돌섬 위에 올라 허황옥을 기다렸을까. 삼국유사의 기록과 시간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다.

망산도로 보기에 적당한 곳이 김해에 있다. 서낙동강에서 김해시로 접어드는 가락동의 나지막한 봉우리가 바로 그곳이다. 김해시 앞의 평야가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바다였으므로, 이 야산은 본래 섬이었고, 남해에서 서낙동강으로 배가 서진(西進)하여 북향(北向)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기에 아주 적격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김해평야는 바다였다. 식민지 시대 이후 메워져 들판이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가락동 들판에 불쑥 솟은 이 작은 봉우리야말로 진짜 망산도가 아닐까 추정된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김해평야는 바다였다. 식민지 시대 이후 메워져 들판이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가락동 들판에 불쑥 솟은 이 작은 봉우리야말로 진짜 망산도가 아닐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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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산도는 부산 강서구 아닌 김해 가락동

이제 수로왕의 신하들은 허황옥이 타고 온 배를 뭍에 대도록 안내했을 것이다. 허황옥이 망산도에서 하선(下船)을 하면 다시 배를 타고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니, 일을 그렇게 진행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수로왕의 신하들은 망산도에서 기다렸고, 허황옥은 도두촌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두촌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의 뒷산인 명월산(明月山) 아래 장낙나루로 보인다. 지금은 서낙동강의 물과 명월산의 낭떠러지 사이 좁은 땅이 온통 차들이 쌩쌩 질주하는 산업도로가 되어 나루터의 흔적이 묘연하지만, 그래도 가장 굽이가 두드러지는 도로 한복판에 홀로 버티고 커다란 고목은 20년 전만 해도 강을 건너는 배를 묶어두던 나루터의 신목(神木)이었다. 강을 건너온 배가 산의 튀어나온 머리 부분에 정박했으니, 이곳 장낙나루야말로 허황옥의 배가 닿은 도두촌 별포나루로 추정해도 무리가 없을 법하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0월부터 ~ 2012년 2월 사이에 김해 일원을 여러 차례 답사하였습니다.



태그:#망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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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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