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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개인들의 모습을 그림 그려볼 수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끼면, 절대악 사루만은 프로도의 모습을 반지를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개인들이 자신들의 모습들을 숨기거나 익명화시키기를 원해도 사루만이 자신과 연결되는 절대반지를 통해서 프로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주민등록번호'는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는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공적, 사적으로 네트워크화 되어 있는 개인들의 모습을 그림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국가기관에 의하여 개인식별번호로 부여되고 있는 주민등록제도는 1962년 주민등록법의 제정으로 처음 나타났다. 당시 주민등록법은 그 목적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듯이 처음부터 분단국가라는 현실에서 국가가 국민을 감시, 관리하고자 하는 목적이 주된 것이었다. 이후 이 법의 제1차 법률개정으로 주민등록번호제도가 나타났으며 이 주민등록번호 앞의 여섯 자리는 생년월일, 뒤의 일곱자리는 성별, 지역, 등록순서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주민등록번호는 이 번호와 연결된 개인의 생년월일, 성별, 출생신고지역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도 주민등록번호 생성기는 민간분야에서 널리 주민등록번호 도용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주민등록번호 생성 알고리즘은 더 이상 민간에서조차도 암호가 아닌 공지의 사실이 되었다.

 

주민등록번호는 우리나라에서는 인터넷실명제와 결부된 전자상거래(E-Commerce)의 급격한 발달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들끼리 서로 참조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즉, 주민등록번호는 오늘날 개인정보 노출의 우려가 쉬우면서도 심각해지는 한 원인이며, 국가기관이나 기업들이 개인들의 각종 사적 활동과 공적 활동들을 매우 쉽게 감시, 관리할 수 있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익명성의 구현이 가능한 인터넷 네트워킹의 기능을 실명의 레이어로 변경시키면서 정보접근성의 측면에서 개인들의 모든 것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 또는 쉽게 그것을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들에게는 여과없이 공개되는 상황으로 변화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민간에서 활용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점은 이미 수년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다. 인터넷 실명제는 주민등록번호 제도의 프라이버시 침해의 문제를 민간에까지 전이시킨다는 점에서 두 제도는 문제를 상호 간에 심화·발전시키는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개인정보유출사고가 구체화되기 전까지는 쉽사리 공론화되지 못했다.

 

익명성은 표현의 자유의 핵심에 해당한다

 

그간 우리 사회는 사실상 범죄자를 잡고 불법정보의 유통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익명성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속성으로 이해하여 왔다.

 

하지만 이미 헌법재판소도 밝힌 것처럼, 익명이나 가명으로 이루어지는 표현의 경우 정치적 보복이나 차별의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전파하여 권력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하여 정치적 약자나 소수자의 의사를 국가의 정책결정에 반영되도록 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의 핵심에 해당한다.(2008헌마324)

 

우지숙 교수(2005)는 "우리는 프라이버시라는 권리를 위하여 이러한 종류의 식별되지 않을 권리, 불투명할 권리, 나아가 거짓말을 할 권리를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러한 의지가 있는가? 이러한 새로운 네트워크 환경에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만을 얻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버시권을 위해서는 식별되지 않을 권리가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네트워크상 프라이버시를 위해 투명성과 관료적 효율성을 희생할 의지가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프라이버시를 얻기 위해 기본적 윤리 개념을 재고할 준비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않고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하기 위한 기술적, 사회적 방법들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주장하고,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프라이버시 또는 익명성의 정도는 기술이나 법제도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사회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태도에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일방적이면서 강제로 제공되는 주민등록번호

 

최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개인정보침해의 모습들은 더 이상 우리가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예이기도 하며, 현재 익명성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제기된 주민등록변경소송은 이러한 점에 대한 관계당국에 대한 입장변화를 촉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일방적이면서 강제로 제공되는 주민등록번호는 분단국가라는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너무 과한 측면이 있다.

 

주민등록번호 변경소송은, 주민등록번호로 인식되는 개인에게 피해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하여 주민등록번호라도 변경해 달라는 취지의 소송이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들에게 예상할 수 없는 손해가 발생할 경우 이러한 위험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자신의 개인식별번호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면 개인정보를 변경할 수 있는 권리 역시 개인정보관리통제권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것이다.

 

이미 법원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서 변경하기 어려운 성별조차도 성전환자의 경우에 허용해주고 있으며(2006. 6. 22. 선고 2004스42), 개인의 가장 중요한 식별장치인 이름도 개명절차를 통해 변경해주고 있다. 법원이 성별을 변경하는 경우에도 정정절차를 변경으로 해석하여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행법상의 주민등록번호 정정절차 역시, 변경절차로 해석하여 운용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 등으로 인하여 중국시장에서 주민등록번호가 팔리는 등 개인들에게 예측할 수 없는 손해를 발생시킴에도 그의 변경을 아무런 이유 없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성별, 이름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합당하지 않은 차별적 조치이다.

 

주민등록번호 변경소송은 무엇보다도, 그간 무의식적으로 받아 들여온 주민등록번호에 대하여 회의하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프라이버시의 범주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모쪼록 그간 국가기관에 의하여 사회의 합의와 무관하게 이루어졌던 인터넷 실명제 등과 같은 익명성과 관련된 법절차들의 생성․변화에 대한 논의가 이번 주민등록변경소송을 통하여 정상적인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공론화 되기를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 김보라미 기자는 법무법인 동서파트너스 변호사입니다.
* 이 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주민번호, #주민번호변경소송, #프라이버시, #익명성, #개인정보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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