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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했네"

동네 울타리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동네친구입니다. 친구의 모양새를 보니까 걷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두터운 오리털 잠바에 패딩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고 목도리도 둘렀습니다. 아주 따듯해 보입니다. 늘 성당에서만 보던 우리는 오랜만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갑니다.

"어디 좋은 데 다녀오나 보네?"
"점심모임 다녀오는 길이라구." 
"근데 그 백, 새로 샀구나. 웬일이야, 그런 수십만 원짜리 고급 백을 다 사고 말이야." 
"딸애가 사 줬다구. 난 이런 고급 백 들고 갈 데도 없는데 말야."  

그러면서 '돈으로 주면 좀 좋아'라는 말을 막 하려고 하는데, 친구가 속이 상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행복하시네. 난 열불이 나서 걷기운동 하는데."

내 생전 처음 가져보는 고급 백입니다
▲ 딸이 사준 백 입니다 내 생전 처음 가져보는 고급 백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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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묘해졌습니다. 상대방의 기분도 헤아리지 못하고 주책없이 딸 자랑, 고급 백 자랑을 한 꼴이 되었습니다. 기왕 그렇게 된 거 확실하게 자랑을 하려고 나는 친구 앞으로 백을 반짝 들어 보였습니다. 친구는 웃기만 합니다. 하긴 친구에게는 백만 원이 훨씬 넘는 명품 백이 있습니다. 비교가 안 됩니다.

친구가 명품 백을 처음 가지고 성당에 왔을 때, 같이 있던 어르신들까지 한눈에 명품 백인 것을 알아보고 즐거워하였던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명품 백인지 아닌지를 볼 줄을 몰랐던 나는 그냥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때 나는 성당에 갈 때만 가지고 다니는 재질이 뭔지도 모르는 까만 작은 백을 들고 있었습니다. 딸이 아주 오래전에 화장품을 사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것인데, 가볍고 크기가 <매일미사> 책과 하얀 미사 보 그리고 묵주, 손지갑, 화장지 같은 것을 넣고 다니기에 알맞았습니다.

고급 백보다 더 편하고 애착이 갑니다
▲ 재질이 뭔지는 모르지만 고급 백보다 더 편하고 애착이 갑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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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내 까만 작은 백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명품 백이나 사은품으로 받은 백이나 속에는 똑같은 미사도구가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렇지도 않아졌습니다. 나는 지금도 성당에 갈 때는 그 백을 들고 갑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백이 오래 입은 옷처럼 편하고 얼마나 좋은지를 모릅니다. 딸애가 사 준 이 고급 백 보다 더 애착이 갑니다.

"왜, 열불이 나는데?"  
"글쎄, 아침에 아들이 출근길에 들려서는 용돈이 떨어졌다고 손을 벌리지 뭐야." 
"저런! 엄마한테 손 벌린 걸 보니까 와이프가 무섭나 보네."
"무섭지, 무서워서 손 못 벌리지. 며늘애가 맞벌이하면서 살림을 무섭게 한다구. 집 장만을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근데 아들이 아껴 쓸 줄도 모르고 그 모양이잖아" 

"그래서 줬어?" 
"기 죽을까 봐 줬다구. 내가 좀 힘들더라두 줘야지 어쩌겠어. 어이구!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애비가 그 꼴이라구." 

친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숨 소리를 들으니까 아들이 용돈이 떨어졌다고 손을 내미는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월급을 몽땅 주고 매달 용돈을 타서 쓰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아들처럼 용돈이 떨어졌다고 머리가 하얀 부모에게 손을 내미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물론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있기는 합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한 달 용돈을 생각 없이 써버리고는 번번이 손을 내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내밀 적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데... 밉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내가 잘못 기른 것도 같고." 

아들이 손을 내밀면 얼마를 주는 것일까. 십만 원? 이십만 원? 지갑에 현찰이 없을 적도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쩌나. 카드를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머리를 쥐어박을 수도 없고. 

"난 자랄 때, 부모가 마음 아파할까봐 웬만한 것은 참고 견디고 아끼면서 살았다구. 아들놈에겐 그런 게 아주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아이구 열불 나."  

문득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친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핸드폰을 받는 친구의 목소리가 갑자기 솜사탕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알았다, 이따가 퇴근길에 나 좀 보고 가렴."

친구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면서 '며늘애야' 하고 환하게 웃습니다. 아까와는 아주 다른 표정입니다. 맞벌이하면서도 살림을 알뜰하다 못해 무섭게 하는 며늘애의 목소리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사랑스러운 모양입니다. 

"며늘애가, 토요일 날 친정에 간대. 걘 일반 백을 들구 다닌다구. 이참에 내 명품 백을 줘버려야겠어. 그래서 퇴근길에 들리라구 했지. 요즘 그 나이에 여자들도 에르메스, 루이뷔통, 샤넬 같은 명품들 많이 들었더라구. 얼마나 부러웠을까. 그런데두 그런 티를 낸 적이 없지 뭐야."

말은 시원스럽게 하면서도 노후에서야 처음 장만한 명품 백이라 서운한 마음이 드는 모양입니다. 

"산 지 딱 두 달 됐다구, 두 달. 아주 큰 맘 먹고 산 건데." 

내가 딸 덕분에 내 생전 처음으로 비싼 백을 가지게 된 것처럼 친구 역시 노후에서야 처음으로 명품 백을 장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백을 선뜻 며늘애한테 줄 생각인 것을 보면 아마도 친구는 명품 백을 들고 외출을 할 적마다 며늘애에게 미안하여 마음이 편치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딸도 일반 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딸애가 내게 이 고급 백을 선물했을 때 나는 너무 미안해서 '내겐 안 어울리니까 니가 써라'라고 했습니다. 외국 출장이 많은 딸애는 어디서나 신경을 써야 하는 고급 백보다는 일반 백이 서류도 더 많이 들어가고 더 편하고 좋다고 했습니다. 하긴 일반 백도 재질이며 색깔, 디자인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서 구입한 일반 백을 어깨에 걸치고 활기차게 출근을 하는 딸의 뒷모습은 아주 근사합니다.

"며늘애에게 백을 주면 당장 하나 사야겠네?"
"전에 쓰던 거 쓰지 뭐. 사실은 전에 쓰던 일반 백이 손에 익어서 더 편하다구. 이 나이에 명품 백 가져봤자 얼굴에 주름이 펴지길 하나 내가 부잣집 마나님으로 돋보이길 하나. 내가 명품 백을 산 날 우리 영감이 '망구가 낼 모래인데 미쳤지, 미쳤어. 아들놈은 걸핏하면 손 내미는데 한 달 생활비를 날리다니!' 하구 소릴 지르지 뭐야. 열불나데. 난 명품 백 가지면 안 돼? 왜 안되냐고 무섭게 맞섰지. 속으로는 영감 말이 백 번 옳다구 생각하면서도 말야"  

친구는 유쾌하게 웃습니다. 한 달 생활비를 날렸다고 소리 지르던 남편과 오기로 맞섰던 일을 훌훌 털어버린 유쾌한 웃음입니다. 그러나 나는 친구가 안 되어 보입니다. 나는 내 백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말을 돌렸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졌네. 곧 개나리도 필 거야 하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태그:#명품 백 , #일반 백, #딸이 사준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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