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창밖을 두드리는 이슥한 밤, 전화벨이 요란스럽다. 몽롱한 정신으로 전화를 받자마자 여자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제XX, 지겹도록 끈질기게 따라붙는 몽달귀신 같은 고약한 인연(因緣)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모처에 글을 썼는데 자기가 쓴 글에 댓글 안 달아줬다고 새벽 3시에 걸려온 전화였다. 내가 별난 사람인지 내 주변 사람들이 별난 건지 나에게는 별별 웃기지도 않는 인연들이 수두룩하다.
"으~흐흐흑~~~ 흑흑~~~." "아이 낌짝이야! 누구야? 왜 그러세요?" "누나다 상연아. 으흑흑~~~." "누구세요? 아이참!" "흑흑~~~ 누나야. 이제는 목소리도 잊었니?" "이 밤중에 웬일이슈? 옆에서 누워 자던 서방이 죽었수? 왜 울고 그래?" "그게 아니구, 내 글에 너는 댓글 안 달더라? 너 누나 미워하니?" "제XX, 잠 좀 자게 전화 좀 끊어 제발." "이 자식아 너 누나한테 그러면 안 돼. 으~흐흑~ 흑흑~~~." "옆에 누워 있는 서방 안 죽구 멀쩡히 살아있으면 울지 말고 이제 그만 좀 끊어 제발." "야 상연아, 으~흐흐흑~흑흑~~~ "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고 댓글도 품앗이라고 어떤 이가 그러더라만 제법 공감이 가는 얘기다. 그렇다고 새벽 3시에 전화까지 걸어가며 댓글 구걸은 좀 우습지 않은가? 소통이라는 것이 꼭 오고가는 게 있어야만 소통이 아니다. 마음으로는 분명 뭔가 와 닿는데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댓글을 못 쓰는 수도 있고 나처럼 게을러서 안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글에 댓글을 달아달라는 구걸을 하기 전에 일부러 내 글을 클릭해서 읽는 상대방의 귀한 시간을 아깝게 하지는 않았는가? 부터 반성할 일이다.
기사도 마찬가지다. 메인에 실리는 기사든, 쪽 기사든 신문사에서 정해놓은 잣대라는 게 있다. 오마이뉴스 같은 경우 잉걸기사는 잉걸기사 만큼, 버금은 버금만큼, 으뜸이나 오름 역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 나도 간혹 '사는이야기' 쪽에 소소한 일상사를 보내지만 열에 아홉은 잉걸기사다. 그러나 나는 안다. 왜 내 기사가 잉걸수준에 머무르는지를.
기사 속에 심오한(?) 철학이 들어 있느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신문이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도 메인을 차지하기 위해서 눈에 안 보이는 경쟁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내 기사가 메인에 안 실리는 것을 탓하기 이전에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철저한 자기반성이 앞서야 되지 않겠는가.
가수가 음반 안 팔린다고 기획사 탓을 하고 소설가가 책 안 팔린다고 출판사의 마케팅전략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래를 잘 하면 마케팅이 없어도 음반은 팔리고 소설의 내용이 재미있고 글 속에 알맹이가 있으면 대형서점의 안 보이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책이라도 독자들은 귀신같이 찾아낸다. 엄밀히 말하면 노래나 글도 하나의 상품이다. 상품의 질이 좋으면 소비자는 더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매할 수밖에 없다. 루이비통이 그렇고 독일의 아우디가 그렇다.
가수가 음반 안 팔린다고 기획사의 마케팅 전략을 탓하며 소설가가 책이 안 팔린다며 출판사의 마케팅전략을 탓할 일은 아니다. 또한 내 글에 댓글 안 달아준다고 타박할 일도 아니다. 일차적인 문제는 노래를 못하는 가수 자신에 있고 알맹이가 없는 글을 쓴 자신에게 있지 마케팅을 주도하는 그룹이나 소비자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의 노래가 최고요, 내 글이 최고라며 소비자를 향해 옥석도 구분 못한다고 손가락질을 해대는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새벽 3시에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귀신 곡하는 소리도 무작정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게 가수나 소설가나 또는 댓글 안달아 준다고 안달하는 누이나 그들의 철딱서니 없는 모습에서 알싸한 연민의 정을 느끼는 까닭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의 욕심이 다 그렇고,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지 싶은 게다. 나라고 뭐 별 수 있겠나? 아무튼 자기 글에 아는 척 안 해준다는 누이의 한밤중 전화 속 눈물로 별스런 글을 다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