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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두발단속에서 교사에게 가위로 머리카락이 잘린 학생의 모습. (자료 사진)
 학교 두발단속에서 교사에게 가위로 머리카락이 잘린 학생의 모습. (자료 사진)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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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 머리 모양 어때요? 데이비드 베컴 같지 않아요?"
"와우~ 멋진데! 어디서 했니? 선생님도 한 번 해볼까?"

머리카락을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닭 볏 모양으로 잔뜩 멋 부린 한 아이가 농을 걸듯 던진 물음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대꾸해주었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학생부로 끌고 가서 호되게 처벌하고 문제아로 낙인찍을 만한 '범죄'인데, 사제간에 스스럼없이 웃고 떠드는 대화의 소재가 됐다. 나름 놀랄 만한 변화다.

"처음에는 근사해 보였는데 금방 싫증이 났어요. 머리가 흐트러지면 어쩌나 하고 자꾸만 거울 앞에 서게 되는 것도 그렇고, 시간도 아깝고 돈도 많이 들더라고요. 그냥 예전처럼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편할 것 같아요.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요."
"두발 제한 규정이 사라지면 원 없이 머리카락을 기르고 염색해보고 싶다더니만, 이렇게 일찍 싫증을 내다니, 의외인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육 운운하기 쑥스러울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 교사들이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 길고 염색한다고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건 아니잖나. 언제 처음 만들어졌고, 또 언제 개정되었는지 모호한 케케묵은 학교생활규정 내용에 교사들이 여태껏 의문 하나 던지지 않고 순응해 버린 탓이다.

교복의 치마 길이가 짧다고, 화장했다고, 등교할 때 교문에서 정색하고 체벌을 하는 황당한 일상에 대해 교사들은 '우리도 그땐 그랬다'며 방조하거나 되레 두둔해온 게 사실이다. 갓 부임한 젊은 교사들도 그런 인식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부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제지간에 얼굴을 붉혀야 하는 일은 피차 고통스러운 일인데도 말이다.

TV에서는 채널마다 반라 차림의 아이들 또래 연예인들이 온갖 선정적인 쇼를 선보이고 인터넷엔 음란 동영상이 널려 있는 게 현실이다. 교사라면 우선 책임 있는 기성세대로서 그런 현실을 뜯어고치려 하기는커녕 나 몰라라하고 외려 즐기기까지 하면서, 교문에서 그깟 일로 아이들을 무릎 꿇리는 건 그야말로 뒷북치는 일이다.

교육하는 교사나 지도를 받는 학생이나 그러한 해프닝이 학교생활규정을 따르기 위한 '기계적'인 일과일 뿐 그런 지도 방식이 아무런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관행처럼 굳어진 일상을 문제 삼는 것이 서로 귀찮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지도하는 시늉만 내면 되는 교사 입장에서는 교무실에 괜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 같아 두려워서이고, 학생들은 학교생활규정을 고쳐달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돌아오는 건 매뿐이라는 걸 누누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교생활규정은 시나브로 교사고 학생이고 그저 눈치껏 대응해야 하는 고리타분한 '봉건적 매뉴얼'로 전락해버렸다.

정부는 학교 교실 스마트 환경으로 바꾼다라는데... 현실은 스마트폰 일괄 수거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 소지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 시행 중인 광역자치단체의 학교들에서조차 여전히 학교생활규정에 별도의 세부 지침을 만들어 통제하려고만 든다. 이를테면, 등교할 때 담임교사가 일괄 수거해서 종일 보관한 다음 하교할 때 나눠주는 방식 등의 지침 마련을 고민하고 있다.

인권조례에 따라 소지품 검사 등을 통해 전자기기의 소지 자체를 막을 수 없게 되다 보니 온갖 편법이 동원되고 있는 셈인데, 무엇이든 금지 규정에만 익숙해진 교사들의 발상은 그처럼 한결같이 고루하기 짝이 없다. 소지를 제한하는 쪽으로만 고민하다 보니 전자기기 사용에 대한 에티켓 교육 같은 교육적인 부분에는 정작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은 정부가 앞장서서 수년 내로 종이 교과서를 전자 교과서(e-book) 형태로 대체하고 각급 학교 교실을 스마트 환경으로 바꾸겠다고 호언하면서, 정작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소지와 활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소지품 검사를 금지하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는 몽니를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애먼 교사들도 덩달아 부화뇌동하고 있다. 우선은 정부가 사교육비 절감의 성공 사례라고 손꼽는 교육방송(EBS) 등 인터넷 강의를 적극 활용하라며 부추겨서다. 그들은 웬만한 교실마다 자습 시간에는 피앰피나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라는 걸 알면서도 다짜고짜 전자기기 소지를 문제 삼으며 소지품 검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꼰대'라는 말이 학생에게서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교사들이 시대의 변화를 못 읽고, 세대 간의 차이를 도통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조롱에 다름 아니다. 곧, '불통'이라는 의미인데, 사제지간에 소통되지 않으니 모든 교육활동이 겉돌 수밖에 없다. 교사들이 관행에 찌들고 교육과는 별 상관없는 애먼 곳에 에너지를 빼앗긴 결과다.

학교가 개선의 동력을 상실한 채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이라는 '외부 자극'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인권조례가 일선 교사들의 '교육력' 낭비를 어느 정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수업 준비하고 상담할 시간도 빠듯한데, 학생들을 무슨 죄인 다루듯 감시하는 눈초리로 쳐다봐야 하는 일상이, 교사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괴롭기 때문이다.

인권조례, 흉포화되는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해법

아침마다 교문에서 머리카락과 허벅지에 자를 들이대 길이를 재야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보지 않아도 되고, 흡연자라고 지목된 아이의 소지품을 뒤지며 얼굴 붉히는 실랑이도 더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교복을 마음대로 변형시켰다며 봉제된 부분을 가위로 기어이 뜯어내야 하는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성적에 따라 순위를 매겨 특별반을 꾸려야 하는 양심상 거리낌도 더이상 감내할 필요가 없다.

일부에서는 "교사가 그런 것들 안 한다면 교육을 포기하란 말이냐"며 목청을 돋운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교육을 추억하고 흠모하는 낡은 구세대의 생떼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막무가내로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학교 교육이 무너진다고 몰아세우고 있다. 그들은 인권조례의 내용을 헤아려보기는커녕 그 취지조차 폄훼하기 일쑤다.

나아가 인권조례 때문에 학교폭력이 늘어난다고 근거 없이 단언하고, 교사들의 생활지도가 어려워져 학교 현장이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거의 인권조례에 대한 '저주' 수준이다. 일부 교사들과 특정 교원단체와 학부모단체를 등에 업고 정부조차 나서서 이러한 저주를 언론을 통해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있으니 한심한 작태다.

경기도가 이태 전 첫걸음을 뗐고 광주광역시는 고작 두 달도 채 안 됐는데, 학생인권조례가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식의 부정적 평가가 터져 나오고 있다.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족히 10년 정도는 겪어봤다는 투다. 하나 분명한 건, 인권조례의 시행을 준비하는 일선 학교 현장의 분위기는 일부 언론에서 악의적으로 떠들어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인권조례 자체를 낯설어하며 시기상조라고 우려하는 교사도 많고, 혼란을 우려하는 학부모들도 있으며, 이를 악용하려는 영악한 아이들 또한 있는 게 사실이지만, 취지에 공감하고 기존의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교육 방식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자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나아가 그들 중에는 인권조례를 학교에 제대로 정착시키는 것이야말로 갈수록 흉포화되는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충고한다.

많은 교사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이들과 쓸데없는 일로 갈등하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니, 어떻게 하면 그들과 제대로 소통하며 관계 맺기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진짜 교육적인 고민이 생겨나더라는 것이다. 왜 머리카락을 짧게 깎아야 하는지, 왜 화장을 하면 안 되는지 등에 대한 아이들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답변을 머뭇거리던 부끄러운 모습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교사로서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우리 교육에도 '햇볕 정책'이 필요하다

단언컨대, 우리 교육에도 학생인권 보장에 기반한 '햇볕 정책'이 필요하다. 입시 노예로 만들어 현실의 고통을 무작정 인내하도록 묶어두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고, 일벌백계식의 획일적인 통제가 통하는 시대도 아니다. 아이들을 마구 주눅들게 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

더디더라도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정당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 걸어야 하며,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위계적 관계를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 대 인간이라는 대등한 관계 설정이 요구된다.

학생들이 인권조례에 기대 물 만난 고기 마냥 설쳐대 교실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라 지레 겁먹지 말자. 없지는 않겠지만, 그들 역시 어떻든 우리 학교가, 우리 사회가 품어야 할 아이들이다. 가정에서 돌봄을 못 받았을지언정 학교와 사회가 그들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교사 자신의 소통 능력 부재를 감추기 위해 인권조례를 핑계 삼으려는 게 아니라면, 지치지 말고 '삼고초려' 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자. 거칠게 말해서, 아무리 되바라진 아이들일지라도 그들 덕에 교사인 우리가 돈 벌어 먹고사는 것 아닌가.

부디 우리의 낡은 교육 방식을 성찰하고 이참에 패러다임을 바꿔보자. 과거 교육이 때리고 벌줘서라도 아이들에게 올바른 습관과 행동을 주입 시키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의 선한 자율의지를 믿고 북돋워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인권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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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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