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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석탑. 의성탑리5층석탑을 본떠 만든 모전석탑이다.
 5층석탑. 의성탑리5층석탑을 본떠 만든 모전석탑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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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 건물, 서적, 회화, 조각, 공예품, 무구(巫具) 등의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가리킨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보물은 유형(有形)문화재 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연극, 무용, 음악, 공예기술 등은 실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체가 없다. 그러나 그들도 너무나 소중한 문화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런 것들 중 가치가 뛰어난 것을 무형(無形)문화재로 지정한다.

그러므로 유형문화재는 건축물, 서적, 그림, 조각, 공예품 등 손으로 그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문화재들을 말한다. 그 중에서 더욱 가치가 뛰어난 것을 국가가 지정하는 '보물'이라 하고, 나머지 유형문화재들은 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가 지정하는 '유형문화재'라 한다.

빙계사터 5층석탑. 국가지정 '보물'이다.
 빙계사터 5층석탑. 국가지정 '보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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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기서 하나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문화재의 번호 문제이다.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이 국보 70호인 훈민정음보다 더 뛰어난 문화재인가? 보물 1호인 흥인지문(동대문)이 보물 55호인 안동 봉정사 대웅전보다 더 우수한 문화재인가? (봉정사 대웅전은 2009년 6월 30일 국보 311호로 승격된다.) 천연기념물 제 1호인 대구 도동 측백수림이 천연기념물 53호인 진돗개보다 꼭 보존 가치가 더 높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1호들의 가치를 낮춰 말하는 것은 아니고, 문화재들은 한번 지정하고 나면 그 이후에 등급이 오르거나 내리는 등 변할 수도 있고, 새로 발견되어 추가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1호, 2호 등 앞 번호가 붙을 수는 없다. 즉, 문화재의 번호는 가치의 순서를 매긴 것이 아니라 관리의 필요 때문에 붙였을 뿐이다.

의성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4점 있다. 번호 순서대로 말하면 188호인 단촌면 관덕동의 3층석탑, 246호인 고운사 석조 석가여래 좌상, 327호인 빙산사터의 5층석탑, 임진왜란 관련 기록인 880호 <정만록>이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문화재의 번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언급하였다. 즉, 의성의 '보물'들을 번호순으로 살펴본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뜻에서, '의성의 보물' 중에서 빙산사터의 5층석탑부터 살펴볼까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빙산사지 5층석탑이 탑리 5층석탑과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국보인 탑리5층석탑의 안내판을 꼼꼼하게 학습하였으므로, 이어서 그의 '동생'인 빙산사지 5층석탑으로 순서를 잡는 것이 논리의 흐름상 적절하다는 말이다.

의성빙산사지5층석탑
보물 327호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 70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 말, 고려 초의 5층석탑으로 높이는 8.15m이다. 한 변이 4.06m인 지대석과 단층 기단 위에 모전석탑(模塼石塔)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규모가 작고 부분적으로 생략된 곳이 있어 의성탑리5층석탑을 그 모범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빙산사(氷山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주변에는 석축과 주춧돌, 그리고 기와 조각들이 남아 있다. 탑의 정북쪽에 50평 규모의 금당(金堂)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 태종 6년(1406)에 왕명으로 절을 폐사시켰다고 한다.
탑 전체의 파손 상태가 심하여 1973년 완전 해체, 복원하였는데, 그 때에 3층 지붕돌 속에서 금동사리 장치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탑리5층석탑(왼쪽)과 빙산사터 5층석탑을 비교해 보자.
 탑리5층석탑(왼쪽)과 빙산사터 5층석탑을 비교해 보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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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산사지(址) 5층석탑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내용이다. 탑리5층석탑의 안내판을 읽으면서 자세히 '공부'를 한 답사자는, 같은 모전석탑 앞에 섰으므로 이번에는 내용을 알아보기가 처음보다 쉽다.

빙산사지 5층석탑은 탑리5층석탑을 본떠서 만든 모전석탑이다. 본래 탑이 남아 있는 이곳에는 빙산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는데, 조선 태종이 폐사(廢寺), 즉 없애버렸다. 그래서 '빙산사 5층석탑'이 아니라 '빙산사지 5층석탑'이 된 것이다.

안내판의 설명 그대로, 빙산사지 5층석탑을 찾아가보면 탑의 뒤쪽에 넓은 빈터가 있다. 빙산사라는 절의 금당(金堂)이 있던 자리이다. 사찰의 본채를 금당이라 부르는 것은 그 곳이 금(金)빛 부처를 모시는 집[堂]이기 때문이다.       

답사자가 그냥 눈으로 무심코 볼 때에는 이 탑도 탑리5층석탑에 못지않게 말끔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국가 지정 보물로 인정을 받아 영광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탑리5층석탑처럼 국보가 되지는 못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빙계계곡의 풍경
 빙계계곡의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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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탑리5층석탑을 본떠서 만들었으므로 그에 비하면 뒷날의 건축물이다.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국보가 되기에는 모전전탑 1호인 경주 분황사탑이나 2호인 탑리5층석탑에 비해 세월의 무게가 얕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탑리5층석탑에 비해 돌을 다룬 솜씨가 거칠고, 1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는 기울기가 너무 빨라서 웅장한 맛이 덜하다. 게다가 안내판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부서진 상태가 너무 심하여 복원을 했기 때문에 탑리5층석탑만큼 원형이 곱게 보존되지를 못했다.

본래 이 탑도 국보였다. <경상북도 문화재대관>에 따르면 1958년 8월 31일 정부가 국보를 지정할 때 이 탑도 581호 국보로 뽑혔다. 그러나 1963년 10월 1일 다시 보물 327호로 재지정을 받았다. 파손 상태가 심해서 그렇게 국보에서 보물로 한 등급 낮춰진 것이겠지만, 이는 빙산사지 5층석탑도 국보급 문화재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탑리5층석탑에도 있지만 이 탑에도 감실이 있다. 감실(龕室)은 탑 안에 작은 방을 만들어 불상을 모시는 장소로 쓰는 공간인데, 두 탑 모두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감실이 크지는 않다. 사람들은 비와 바람, 눈과 서리로부터 부처를 보호하기 위해 탑에 작은 방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 앞에 엎드려 소원을 빌고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간절히 바랐다.

빙계계곡의 빙혈 입구. 5층석탑 뒤편에 있다.
 빙계계곡의 빙혈 입구. 5층석탑 뒤편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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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실 속 부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물론 두 손을 모아 비는 중생의 얼굴과 손, 그리고 그의 정수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빙산사지 5층석탑이 가진 미덕 하나가 여기에 있다. 탑의 위치 말이다. 경상북도가 자랑하는 절경 중의 한 곳인 빙계계곡을 저 아래로 내려다보는 절묘한 장소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웠으니, 감실 안의 작은 부처는 사시사철 언제나 시원한 풍광을 즐기며 한결같은 미소를 지었으리라. 그렇잖아도 한여름에도 얼음바람이 부는 빙혈(氷穴) 앞에 위치한 석탑이지만, 그토록 가슴이 탁 터지는 자연의 혜택을 누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고 온화하였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 빙산사지 5층석탑의 감실 안에는 부처가 없다. 작은 금동불(金銅佛)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가져가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불상 아래에 깔았던 자리뿐이다. 탑 안 작은 방에 모신 부처가 앉아있던 자리― 감실불좌대(龕室佛座臺)는 현재 빙혈 출입구 길목의 왼쪽 산비탈에 고이 모셔져 있다. 감실불좌대 아래에 적혀 있는 짧은 안내문을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3층석탑 감실 안에 있던 부처님 좌대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위에 있던 금동불을 훔쳐가고 버려둔 것을 이곳에 보존하였다.


태그:#빙산사지5층석탑, #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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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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