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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가는 길에서 만난 화순 동복호 풍경
 적벽가는 길에서 만난 화순 동복호 풍경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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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가는 길에서 볼 수 없는 노루목적벽

겨울철 여행은 부지런해야 한다. 추워서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오늘은 게으른 여행을 준비한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여행. 화순으로 향한다. 적벽이 아름답다는데 전체를 아직 보지 못했다. 물염정이 있는 물염적벽은 보았지만 생각보다 웅장하지 않았다. 화순 동복에서 이서면을 지나 쭉 가면 담양이 나온다. 담양 이곳저곳 둘러볼 계획이다.

날씨가 무척 춥다. 어제는 눈도 내렸다. 아직 녹지 않은 추위를 뚫고 달린다. 적벽을 보려면 동복호로 가야한다. 호남고속도로 주암나들목을 나와 동복으로 향한다. 동복을 지나 22번 국도를 따라가면 묘치재가 나오고 재를 막 넘으면 '적벽가는 길'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을 만난다. 기대감을 잔뜩 갖게 한다. 적벽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경치를 상상하게 만든다.

호수를 따라 구불거리는 길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길은 구불거리며 한참을 가더니 작은 안내판을 만난다.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용케 보였다. '화순적벽'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하지만 실망이다. 적벽으로 가는 길은 상수원보호구역이라고 철조망이 쳐져 있고, 길은 막혔다. 적벽은 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적벽가는 길'만 보았다.

화순 동복 적벽가는길에서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까지
 화순 동복 적벽가는길에서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까지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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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마저 얄밉다. 적벽은 노루목적벽, 보산리적벽, 창랑리적벽, 물염적벽 등으로 아름답고 빼어난 자연경관과 웅장함으로 잘 알려진 명승이라고 설명을 해 놓았다. 조선 중종 때 신재 최산두가 중국 양자강의 적벽과 같다하여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궁금하기만 하다. 구경하지 못할 거면 자랑을 하지 말던지.

양반의 끝없는 욕심으로 다가온 노비의 비석

길을 계속 따라가면 화순 이서면이 나온다. 이서에서는 무등산이 하얗게 보인다. 날씨가 추워 작은 도시는 썰렁하다. 이서면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30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다. 1400년대 마을이 형성되면서 심어진 것이라니 500살은 넘었다. 밑둥치가 어른 다섯 명은 감싸야 될 정도로 크다. 겨울이라 은행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있어 웅장한 맛은 덜하다. 늙은 은행나무에만 있다는 유주도 두 개나 있다. 거꾸로 자라는 유주는 신기하다.

화순 이서에서 만난 노비의 비석. 자연석 한쪽면에 '충노목산지비'라고 새겼다.
 화순 이서에서 만난 노비의 비석. 자연석 한쪽면에 '충노목산지비'라고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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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이서 쌍렬각 한 모퉁이에 서있는 노비 목산의 비
 화순 이서 쌍렬각 한 모퉁이에 서있는 노비 목산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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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면을 나오는 길에 작은 정려각이 보인다. 그 옆에 비스듬한 입석이 서 있다. 입석에는 '충노목산지비(忠奴木山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이라? 다듬지도 않은 자연석 한 면에 비명을 적어 놓았다. 보통 비석이 아니다. 직책이 충노? 충성스런 노비? 내용인 즉, 정유재란 때 의병으로 출병한 남편이 왜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잘못 전해 듣고 부인이 자결하니, 종 목산은 "내 어찌 홀로 살리오?" 하고 자결하였단다.

모시던 상전이 전쟁 중에 죽었으니, 노비가 따라 죽었다는 내용이다. 양반의 입장에서는 널리 퍼뜨리고 홍보해야 할 내용이었나 보다. 이보다 더한 본보기가 어디 있을까? 어차피 그럴 거면 좋은 돌에 비석을 써 주던지, 비각 안에 함께 모셔 주던지. 부인은 정려각을 세워주고 비 가림을 해줬는데….

아무리 주인과 생을 같이 한 노비라도 어쩔 수 없는 가 보다. 비각 밖에 한쪽 귀퉁이를 지키는 비석으로 자리 잡았으니. 내 눈에는 함께 죽어준 노비가 안타까워 비석을 세워준 게 아니라, 죽어서도 주인을 지키라는 양반의 끝없는 욕심으로 보인다.

독수공방이 생각나는 정자 독수정

이서면을 나와 호수를 따라가다 갈림길을 만난다. 담양으로 빠지는 길과 호수를 계속 따라가는 길이 갈린다. 호수를 계속 따라가면 정자 기둥이 아름다운 물염정과 김삿갓 시비가 있는 물염적벽은 볼 수 있다. 담양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행정구역은 담양으로 바뀌고 남면 소재지가 나온다. 남면 소재지에는 독수정이 있다. 큰 길에서 벗어나면 작은 천을 지나 산골마을로 올라가는 아주 정감 있는 길과 만난다. 커다랗게 구불거리는 길 언덕에는 작은 정자가 자리를 잡았다. 독수정이다. 독수정 앞에 서면 소나무 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아주 좋다.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는 충절이 서려있는 독수정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는 충절이 서려있는 독수정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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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정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정자다. 대부분 정자가 조선중기에 세워진 것에 비하면 역사가 아주 깊다.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이 세운 것이란다. 고려가 망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며 이곳에 독수정(獨守亭)을 세우고 은거했다고 한다. 독수정이라는 이름도 특이하다. 이백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지만 독수공방이라는 암울한 단어가 생각난다. 은둔한 자의 마음이었을까?

정자는 고종 때(1891) 다시 지은 것이라 문화재적 가치는 덜하지만 정자 주변 원림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으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정자 주변으로 백일홍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겨울을 버티고 있다. 백일홍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다.

폐사지의 유일한 흔적이 석등이라니...

다음 목적지는 아름다운 석등을 찾아간다. 개선사지석등은 환벽당 건너편 호수주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광주호수생태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온다. 김덕령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정렬비가 있고 앞에는 왕버드나무 세 그루가 춤추듯 서 있다. 한 그루는 마치 용의 형상을 닮았다. 내년이 용의 해라는데….

광주호수생태원에서 본 풍경. 갈대가 햇살에 눈부시다.
 광주호수생태원에서 본 풍경. 갈대가 햇살에 눈부시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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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으로 들어간다. 여름에 오면 좋겠다는 생각. 잘 꾸며 놓았다. 호수 주변을 즐길 수 있도록 나무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아래로 물이 차면 걸어가는 기분이 좋겠다. 호수 공원 끝까지 갔지만 석등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름다운 겨울 풍경만 보았다. 들어올 때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마음에 든다. 한나절 여유롭게 보내기에 좋은 곳이다.

길을 잘 못 알았나. 공원을 나와 도로를 조금 올라가다 보니 내가 찾던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 이정표가 보인다. 1.8㎞. 개선동으로 가는 길은 차 한 대 겨우 다니는 길이다. 언덕을 넘어 내려서니 공터에 석등하나가 덩그렇게 서 있다.

폐사지에 홀로 서 있는 개선사지 석등
 폐사지에 홀로 서 있는 개선사지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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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사지석등의 부분. 정교하고 아름다운 선이 그대로 살아았다.
 개선사지석등의 부분. 정교하고 아름다운 선이 그대로 살아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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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등은 신라후기(86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석등의 몸통인 화사석(火舍石) 각 면에 두 줄씩 조등기(造燈記)를 적었는데, 경문왕과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이 석등을 건립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개선사는 당시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지금은 폐사지에 석등하나만 달랑 남았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예전에 절집이었다는 흔적은 석등 말고는 없다. 유일하게 남은 게 불 밝히는 도구라니….

그래서 그런지 석등은 더욱 크게 보이고 웅장하게 다가온다. 화엄사 석등이 웅장하다지만 보물 제111호로 지정된 개선사지석등은 높이가 3.5m로 웅장할 뿐만 아니라 연꽃문양 등 섬세한 아름다움까지 더했다. 빈 절터에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등은 그저 감탄만 나온다. 화사석 커다란 화창은 하늘을 담고 있다. 구불거리는 선은 천년을 지나도 여전히 살아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옥개석 귀가 다 깨지고 하나 남았다는 것.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돌담구경, 고택구경에 옛날이 생각나는 슬로시티 삼지천마을

다시 돌아 나와 담양 창평으로 향한다. 슬로시티 삼지천 마을이 궁금하다. 하늘은 가느다란 눈을 흩뿌리고 있다. 우울한 겨울 하늘이다. 춥다. 손이 곱을 정도로 시리다. 삼지천 마을 입구에는 1830년에 세워진 이층 누각 남극루(南極樓)가 멋들어지게 섰다.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은 온통 공사 중이다. 포장된 바닥 길을 들어내고 옛길 분위기가 나도록 정비를 하고 있다.

슬로시티 삼지천마을. 돌담이 아름답다.
 슬로시티 삼지천마을. 돌담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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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시티 삼지천마을 아름다운 돌담
 슬로시티 삼지천마을 아름다운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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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천마을에서 본 대문 장식.
 삼지천마을에서 본 대문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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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이 아름답다. 둥글둥글한 돌들을 일렬로 쌓고 흙을 채우고 다시 돌들을 줄지어 쌓기를 반복한 돌담이다. 아니 돌담길이 아름답다. 돌담길은 생각보다 넓다.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기분이 좋다. 골목길은 이층 누각형태로 된 건물도 보인다. 슬로시티 상징적인 풍경이다.

고택도 들러본다. 고재선 가옥, 고정주 고택 등. 1900년도 전후로 지어진 집이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을 안에는 체험을 하는 집들과 민박을 하는 집들로 재정비되었다. 문 앞에는 아름다운 장식을 달았다. 장식을 보는 맛도 재밌는 구경거리다. 너무 추워 모두 문을 닫고 있다. 문이 열려 있는 고택 몇 곳 둘러보고 나온다. 여전히 눈이 내린다. 창평국밥 한 그릇 생각난다.


태그:#적벽, #독수정, #개선사지석등, #삼지천,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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