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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칠순 가량의 여자 하나가 처덕처덕 걸어온다. 한숨과 함께 해질녘의 공원 벤치에 주저앉은 여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린 게 없다. 허옇게 센 머리는 헝클어졌고 그나마 어디에선가 세수를 하고 나온 듯 다소 말간 얼굴이지만 더러운 옷하며 퀭한 눈, 짝짝이 신발은 그녀에 대해 대신 이야기 해준다.

고고하게 울려 퍼지는 클래식 선율 속에 머리를 기우뚱하며 회상에 잠기는 베레모의 노인도 있고, 벤치 한구석에 몸을 의지한 채 오늘 하루를 근심하는 노인 노숙자도 함께 하는 곳, 바로 대구 경상감영공원이다. 혼자 고독을 즐기기 위해서건 단지 쉴 곳이 필요해서건 종일 오갈 데가 없다는 공통점은 이 노인 저 노인 모두 동일하다. 그들이 노숙자건 아니건 간에.

봄가을이면 벤치의 노인들은 들뜬다. 각종 단체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역사 체험들을 하느라 마이크를 켜고 연설하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겨울이면 황량한 바람 속에 멈춰버린 분수와 마른 나뭇가지를 보며 다음해에 올 봄을 그리워한다. 그때까지 자신의 명이 기다려 줄지알 수 없지만 늙음이라 해서 희망의 봄이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향촌동 .
▲ 향촌동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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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술에 한껏 알딸딸해진 노년 커플들은 젊은 것들이 보건 말건 진한 키스를 나누며 잃어버린 청춘을 이야기하고, 아직은 머물러 있는 지금을 허허로이 되돌아본다. '부어라 마셔라' 왁자지껄 선술집들마다 웃음과 울음과 때론 와장창 싸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비릿하고 눅진한 냄새가 가득한 골목마다 사내들은 아무렇게나 서서 오줌을 지리며, 인생사 날려버릴 기세로 후련하게 꺼억 개트림을 하고나니 막혔던 가슴이 확 뚫어지나보다.

향촌동 수제화거리 .
▲ 향촌동 수제화거리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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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향촌동 거리 곳곳에는 수제화 가게가 즐비했다. 지금이야 그나마 축소됐다지만 주인 혼자 조그만 점포 안에서 가죽을 두드려대는 피혁공장이며 손으로 재단하고 깁는 구두 가게가 이곳에는 아직도 제법 있다. 진종일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망치로 뒷굽을 박고 가죽을 잘라대는 남자는 허허로이 밖을 내다본다. 1980년대까지는 성업을 이루던 이 골목도 실속 있게 겨울 부츠 장만하러 온 중년 여성들만 보일 뿐 젊은이는 없다.

향촌동의 성인텍 .
▲ 향촌동의 성인텍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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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밥집이 드문드문 문을 연 골목에 들어서니 고양이들이 한가득히 앉아 있다. 줄줄이 어느 가게에서 나오는 것이 꼭 제집인 양 보이는데, 허허 웃음 가득한 주인이 끼니마다 밥을 줬는지 사람 겁을 안 내고 졸졸 따라다닌다. 성인텍이라 쓰여진 간판 아래론 '남자 천오백 원, 여자 천 원'이란 팻말과 함께 출연 가수의 공연 시간과 이름이 적혀 있다. 장년의 남녀는 바삐 걸음을 옮기며 성인텍 안으로 들어간다.

"지금 들어가면 몇 시간 놀지도 못하겠구만."

길고양이 향촌동 곳곳에는 길고양이들로 넘쳐난다.
▲ 길고양이 향촌동 곳곳에는 길고양이들로 넘쳐난다.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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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굵기로 썰어주는 생소고기를 참기름 장에 찍어먹는 뭉티기, 뙤약볕이건 한겨울이건 골목마다 열심히 끓여대는 돼지국밥, 삶은 배추를 된장에 무쳐 밥과 함께 양재기에 비벼먹는 옛날 비빔밥.

이런저런 음식들이 많지만 뭐니 해도 노인들에게 인기 많은 메뉴는 실낱국수다. 칠순이 넘은 할매가 끓여내는 이 특별한 국수는 숭덩숭덩 도마 위에서 썰어지는 호박을 뜨끈한 김이 펄펄 오르는 솥으로 쏟아 넣어서 멸치 육수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퍼지도록 끓여낸 것이다. 노인 식성에 맞춰 소화하기 쉽게 면발을 실낱처럼 가늘게 만든 것이다.

"너것들도 금방 늙는다. 경제력이 인생 전부가 아닌기라, 고까짓 거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대이. 얼마나 값지게 사는가를 잘 생각해보거래이. 젊을 때 착하게 살아야 하는 기라. 그기 제일 값진 기고 복 받는 길인기라. 남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말 거래이. 불지옥에 떨어진대이."

노인은 앞에 앉은 손자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느라 국수가 식는 줄도 모른다. 잠시 거쳐 가는 인생. 늙으면 마음이 한결같아 진달까? 욕망도 치기도 이제는 물같이 흘러가버려서 한밤 자고 나면 이곳과 다른 곳에 누웠을 수도 있는 법. 적어도 젊을 때부터 이같이 평온한 마음이었으면 다가올 죽음이 더 값지지 않았을까 하며 노인은 국수물을 들이킨다. 2011년 12월 중순의 대구 향촌동에는 이런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구향촌동#대구 수제화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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