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전, 장을 보고 바람이 차가운 시장 길을 나오다가 대파가 수북이 쌓인 노점 좌판을 만났습니다. 대파들이 굵고 탐스럽습니다. 얼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옛날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라 주춤했습니다.

 

한겨울이면 어머니는 "대파가 몸을 따듯하게 해주지"라고 하시면서 흰 대가 긴 대파를 넣은 쇠고기무국을 자주 끓여 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철이 없기도 했지만, 미끈거리는 대파가 싫어 모두 건져 놓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는 자연스럽게 잘 먹게 됐습니다.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 때, 대파가 부재료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역시 어머니처럼 쇠고기무국을 끓일 때는 꼭 흰 부분이 긴 대파를 넣곤 합니다.

 

"한 단에 천 원이라구 천 원!"

 

모자가 달린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고 동그란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가 나를 쳐다봅니다. 하지만 나는 살 생각이 없었습니다. 김장철도 지났을 뿐만 아니라 김장 때 쓰고 남은 대파들을 화분에 심어 발코니에 두기까지 했습니다. 한동안은 대파를 사지 않아도 됐습니다.

 

"한 단만 더 팔면 되는 데, 나 목욕 좀 가게 한 단만 사요. 딱 한 단만!"

 

한눈에 보기에 씩씩하고 넉살 좋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대파 한 단을 비닐봉지에 넣고 내게 내밉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할머니를 봅니다. 순간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할머니의 두 눈이 보석같이 빛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노인들은 바람이 차고 추우면 몸이 떨리면서 눈물이 납니다. 눈물이 어린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나는 얼른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냈습니다.

 

비닐봉지가 대파의 길이보다 짧았습니다. 나는 대파를 꺼내 반을 푹 꺾어서 다시 비닐봉지에 넣어 장바구니에 밀어 넣었습니다.

 

"목욕비가 마련됐으니 얼른 가야겄네. 요눔의 무릎이 오늘두 호강하게 생겼네."

"무릎이 아프시군요."

"쬐끔 붓기도 했지. 병원약을 달구 살지만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푹 담궜다가, 황토방에 가지.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아주 부드러워지더라구. 그래서 매일 간다구."

 

할머니와 나란히 걸어갑니다. 나는 대파가 잔뜩 쌓인 좌판이 걱정됩니다. 걷다가 고개를 돌려 그 좌판을 바라봤습니다. 예감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만이 어깨를 움츠리고 좌판 앞을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근데 대파는 누가 봐요?"

"건너편 순대국 집에서 우리 영감이 순대국 먹구 있다구. 다 보구 있다우."

 

"내가 벌어 쓰면 자식들 눈치두 안보구... 얼마나 좋은데"

 

 

큰길로 나오자 할머니의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할머니의 걸음은 무릎 관절염을 앓고 있는 사람 같지 않게 가볍습니다. 바람이 불자 가로수에 달랑달랑 붙어 있던 가랑잎들이 날아다녔습니다. 할머니는 "에구, 추워"라며 나뭇가지같이 뻣뻣한 손으로 느슨해진 목도리를 바짝 당겨 다시 맵니다.

 

겨울 내내 노점장사를 하면 할머니의 무릎이 더 안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차마 못 하겠습니다. 노점 좌판은 할머니의 생계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내일부터 기온이 뚝 떨어진다'라던 일기예보가 생각났습니다.

 

"내일부터 기온이 뚝 떨어진대요."

"알아. 이번 겨울에두 장사 안할 거라구. 눈오고 추우면 눈물 나지 콧물 나지 무릎 아프지 목감기 오지, 길도 미끄럽잖아. 그래서 대파 떼다 논 것만 다 팔고는 겨울방학 할 거라구."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짓습니다. 겨울 동안 장사를 하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쉰다면 할머니의 무릎 상태가 좋아질 것 같습니다. 주름지고 핏줄이 튀어나온 거친 손등 역시 조금은 좋아질 것입니다.

 

"겨우내 심심하시겠네요."

"시골에 친척들이며 어릴 적 소꿉친구들이 많다구. 한 바퀴 돌아야지. 내가 이래봬두, 용돈은 내가 벌어서 쓴다구. 먹구 싶은 것두 사먹구, 입구 싶은 것두 사입구 그런다구. 요, 오리털 잠바두 작년에 내가 벌어서 사 입은 거라구."

"색깔이 참 좋네요. 저도 진밤색 좋아해요. 근데 남편이랑 두 분이 사세요?"

 

"아들 며느리랑 살지. 그애들은 아주 빠듯하게 살아. 그런 판국에 집에 있으면 누가 순댓국 사주나? 매일 매일 목욕비 주나? 내가 벌어서 쓰면 자식들 눈치두 안보구, 맘두 편하구, 얼마나 좋은데."

"힘드시잖아요."

 

"힘들구 고생은 해두 내가 벌어서 쓰는 맛에 비하면 아무것두 아니지. 아들이 '힘든데 장사 그만 두세요'라고 하길래 '그럼 니가 용돈 넉넉히 줄거야?'물어보니깐 입 딱 다물구 돌아서더라구. 어이구, 빈 말이라두 '드리지요' 그러면 좀 좋아. 용돈을 준다구 해두 안 받을 텐데. 난 집에 붙어있는 성질이 아니거든."

 

건널목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길을 건너가야 합니다. 할머니는 그대로 곧장 걸어가면 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목욕탕이 나옵니다.

 

"저는 길 건너서 가야해요."

"참, 대파 말야, 그거 당장 안 먹으면 냉동실에 두구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 먹으라구. 대파로 국을 해서 먹으면 오장육부가 따듯해 진다구. 잔병치레를 안 한다구. 채 썰어서 파무침도 해보라구."

 

신호등에 푸른 신호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건너가지 않고 멀어져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대파가 필요하지 않는데도 마지못해 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마지못해서 사게끔 하는 것도 장사수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럴 경우 물건을 사고 돌아서자마자 후회할 법한데, 이상하게 이번엔 후회도 안 되고 기분도 나쁘지가 않습니다.

 

노점 좌판 장사가 힘들고, 고생해도 내가 벌어서 쓰는 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할머니의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크고 작은 어려운 고비들이 있던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신호등을 따라 길을 건너가면서 속으로 할머니의 건강을 빌었습니다.


태그:#대파 , #좌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