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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박사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철학 고전읽기' 강의를 하고 있다.
 강신주 박사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철학 고전읽기' 강의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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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王)이라는 한자는 원래 도끼자루 양쪽으로 날이 달린 도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한나라 시대에 동중서라는 철학자가 왕(王)을 하늘( ̄), 사람(―), 땅(ㅡ)을 잇는, 하늘의 질서를 사람을 통해 땅까지 관철시키는 제사장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천자'라는 명칭은 이렇게 등장한 것이지요. 동중서의 주장이 한나라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을 때, 한 경험주의 철학자가 '뻥치시네' 하며 등장합니다. 그가 왕충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TV CF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될 정도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는 개신교 복음성가의 한 구절이다.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나셨어요'라는 말을 싫어할 사람은 드물겠지만, 과연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2000년 전, 이 문제에 대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어떤 의도 없이 그냥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한 동양 철학자가 있다. <철학 VS 철학>의 저자 강신주 박사는 지난 12월 5일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열린 '강신주의 철학 고전읽기' 여덟 번째 수업에서 중국 철학자 왕충과 그의 주저인 <논형>에 대해 강의했다.

강 박사는 "왕충은 세상에 필연적인 것은 없으며 마주쳤는지, 마주치지 못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철학자"라며 "우발성에 대한 감각은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의 차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험주의·실증주의 철학자 왕충

왕충은 경험적 태도와 실증주의 성향으로 유명한 중국 후한 시대의 사상가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고위 관료가 되려고 했지만 좌절된 이후로 <논형>을 집필하는데 집중했다. 기록에 따르면 왕충의 논증은 통념과 매우 달라 그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몹시 당혹스러워했지만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왕충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수긍했다고 한다. 강 박사는 "왕충이 특유의 경험 중심적인 철학을 가지게 된 것은 편견없는 폭넓은 독서와 유학 사상으로부터의 의식적인 거리두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의 논증은 자기 주장을 한참 펴다가 마지막에 한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며 맺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왕충은 굉장히 경험적인 주장을 폈지요. 경험들이 쌓이고 그 의미를 숙고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생각들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이를테면 나이 많은 어부들은 별다른 책을 읽지 않아도 온갖 삶의 지혜들을 어부일과 엮어 풀어냅니다. 책을 수천 권 읽은 사람들보다 10년, 20년 동안 같은 일을 하며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더 무서운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왕충의 저서인 <논형>은 전체 85편인 방대한 저작으로 공자와 맹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문공', '자맹'편과 목적론적 사유를 비판한 '자연', '물세'편, 실천적 우발성을 주장한 '행우', '봉우'편과 사후 세계와 귀신을 부정한 '논사', '정귀'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 박사는 "특히 사후 세계를 부정한 왕충의 논리는 오늘날 종교 비판과 자본주의 비판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사후 세계를 부정해야 하는 이유는, 사후에 어떤 세계가 있다고 하면 현실의 우리 삶이 죽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현재에 하느님이 보시기 좋은 삶을 살면 내세에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 구조에서 현재의 삶은 내세의 삶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자본주의도 이와 비슷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내일 더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저축하기를 요구받지요. 사랑과 결혼의 문제도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표어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면, 결혼의 표어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혹은 '우리에겐 아이가 있다'가 되지요. 역시 마찬가지로 결혼을 꿈꾸면 현실은 수단이 됩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우발적으로 생겨나"

왕충 철학의 핵심은 '세계는 우발적'이라는 통찰에 있다. 이 유별난 철학자는 어떻게 이런 독특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 <논형>에는 왕충의 사유를 뒷받침해주는 경험적인 예시가 여러 가지 등장한다. 강 박사는 "왕충은 '의도나 목적'을 의미하는 '고[故]'를 '마주침'을 상징하는 '행(幸)'이나 '우(遇)' 개념과 대비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어떻게 태어날까요? 하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운명을 부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엄마와 아빠가 낳자고 결심해서 태어나는 것일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낳겠다고 마음먹는다고 모두 아이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는 것도 부부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얘기지요. 왕충은 '유학자들은 하늘과 땅이 '의도를 가지고[故]' 인간을 낳았다고 하지만, 이 말은 허황된 것이고 대체로 부부가 정욕이 발동해 기를 합한 결과 인간은 '우발적으로[偶]'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 이외의 만물도 마찬가지로 우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지요."

수강생들이 강신주 박사의 '철학 고전읽기' 수업을 듣고 있다.
 수강생들이 강신주 박사의 '철학 고전읽기' 수업을 듣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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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박사는 "왕충은 <논형> '행우' 편에서 거미가 줄을 쳐 두면 날벌레가 지나가다 벗어나는 것도 있고 잡히는 것도 있다고 썼다"고 말했다. 어부가 강이나 호수의 고기를 그물질하다 보면 잡히는 것도, 빠져나가는 것도 있고, 큰 죄를 지었어도 발각되지 않는 도적이 있는가 하면 작은 죄를 지었어도 붙들리는 도적이 있는 것처럼 세상 만사가 이뤄질 수도,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는 일체의 종교적, 목적론적인 사고를 배제하는 자세다.

강 박사는 "세계는 우발적이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내 의도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으며 그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왕충의 생각"이라며 "두 가지 인과관계가 교차하는 지점인 우발성과 삶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선을 다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한계 즉, '천명'을 깨달을 수 있다"며 "공자가 나이 50세를 일컬어 '하늘의 명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로 '지천명'이라고 한 것은 의미면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말하며 강의를 마쳤다.


태그:#강신주, #철학 고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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