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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한미FTA 날치기 비준안 처리 규탄 야5당 정당연설회와 촛불집회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29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한미FTA 날치기 비준안 처리 규탄 야5당 정당연설회와 촛불집회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한미FTA 강행 처리를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 지난달 29일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윤리위)는 그의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판사들의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사용기준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30일 현직 판사가 SNS 가이드라인 마련을 대법원이 주도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표명하는 등 법원 내부에선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판사들과 법원공무원들은 법원 내부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조선일보> 보도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대법원의 신중한 처신을 주문했다. 이 글들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는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약 1주일간 벌어진 상황과 쟁점을 정리해본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달 25일 최 판사의 '정치편향'을 문제삼은 <조선일보>의 보도였다.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22일 페이스북에서 한미FTA 강행 처리를 비판한 최 판사를 'A 판사'로 지칭하며 도마에 올렸다.

이 기사는 법원장 출신 변호사의 입을 빌려 "친구가 300명이 넘는 인터넷 공간에서 정치적 성향이 강한 글을 계속 올리는 것은 (최 판사가) 법관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심지어 '좋아요'를 누른 법조인의 신상(실명은 비공개)을 밝히기까지 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대법원은 즉각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하는 '신속한' 조치를 했다(<조선일보>는 11월 28일 최 판사의 실명을 밝힌 이후 이번 사건에 의견을 표명한 판사들의 실명과 소속단체 등을 공개해왔다. 또한 첫 보도 후 11월 30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판사들의 '정치편향'을 문제삼았다).

이정렬 판사 "한미FTA 통과, 대통령님 존경...이것도 정치편향" 비꼬아

이 기사에서 'B 판사'로 소개된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는 기사가 나간 직후 페이스북을 통해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킨 구국의 결단을 내리신 국회의원님들과 한미안보의 공고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대통령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이것도 정치편향적인 글입니다"라는 글을 올려 <조선일보>의 보도를 에둘러 비판했다.

그는 며칠 뒤에도 페이스북에 "진보편향적인 사람이 판사를 하면 안 된다면, 보수편향적인 판사들도 모두 사퇴해라. 나도 깨끗하게 물러나주겠다", "그나마 하고 싶은 말 맘껏 할 수 있었던 페북도 판사는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등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법원 내부게시판도 판사와 법원공무원들의 토론으로 뜨거웠다. 11월 28일 변민선 서울북부지법 판사는 '<조선일보> 기사에 대한 짧은 소감'이라는 글을 통해 "공직자 윤리위원회에 회부할 사람은 최 판사가 아니라 법관의 공정성을 의심하도록 유발하고 사생활을 심각하게 침해한 <조선일보> 기자"라고 비판했다.

"윤리위 회부할 사람은 최은배 판사 아닌 <조선일보> 기자"

 <조선일보>가 지난 25일자 1면에서 다룬 최은배 판사 관련 기사.
<조선일보>가 지난 25일자 1면에서 다룬 최은배 판사 관련 기사. ⓒ 조선PDF
변 판사는 "법관이 다른 공무원보다 더 많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다 해도 사생활 및 표현의 자유는 보호받아 마땅하다"며 "글의 당부를 떠나, 최 판사가 페이스북에 사사로이 올린 글을 모두 검열하고, 신상조사하고, 사상검열까지 하여 외부에 공개하는 것, 하다못해 '좋아요'를 누른 친구들의 신상까지 조사하여 공개하는 것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 사건을 즉시 윤리위에 회부한 대법원의 태도에도 아쉬움을 표했다. 변 판사는 "대법원이 일각에서 문제제기를 하였다고 곧바로 관련 법관을 징계 또는 윤리위에 회부한 것은 사법부 독립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다"며 "우선 일선판사의 의견을 수렴하고 공론화한 다음 결정한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한다"고 지적했다.

법원공무원 절대 다수가 가입해 있는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이하 법원본부)도 11월 28일 <조선일보>와 대법원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법원본부는 성명을 통해 "페이스북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평적 관계로 쌍방향이 소통하는 장이자 사적공간"이라며 "이를 신문이라는 공적 공간으로 끄집어내어 침소봉대하는 <조선일보>의 행위와 윤리위에 회부한 대법원의 행위는 열린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법원본부는 대법원에 ▲ 윤리위 회부 철회와 ▲ 사법 주권과 관련된 ISD(투자자 국가소송제도)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며,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판사들, 표현의 자유와 <조선일보> 보도에 다양한 의견 주고받아" 

대법원에서 윤리위가 열린 11월 29일 오후에도 판사들의 의견 개진은 이어졌다. 송승용 수원지법 판사는 '최은배 부장판사님의 윤리위원회 회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 "판사들이 비겁한 침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송 판사는 "많은 판사들은 판사 개인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갖는 것인지, 갖는다면 그 방식과 한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조선일보>의 취재 및 보도는 언론의 자유를 일탈, 남용한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장소와 형식을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며 판사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만약 (최 판사에게)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징계 기타의 불이익한 처분이 내려진다면, 저를 포함한 많은 판사들은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러 정략적 의도가 담겨 있는 편향된 일부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가운데 11월 29일 열린 윤리위는 최 판사에 대해 책임을 묻는 대신 판사들의 SNS의 사용기준을 마련하기로 대법원장에게 건의했고, 대법원장은 이를 수용했다.

윤리위는 권고 의견을 통해 "법관은 직무내외를 불문하고 의견 표명을 함에 있어 자기절제와 균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품위를 유지하여야 하고,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게 되거나 향후 공정한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를 야기시킬 수 있는 외관을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리위는 "법관들에게 페이스북 등 SNS 사용에 있어서도 보다 분별력 있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할 것을 권고한다"며 "아울러 충분한 논의를 거쳐 SNS 사용기준을 마련하기로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다수 법원 구성원들은 일단 윤리위의 결정에 최 판사 징계 등 불이익 처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환영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SNS 사용기준 마련 등에 대해선 의견이 다소 엇갈렸다. 자연스레 대법원의 후속조치에 법원 내부의 관심이 쏠리게 됐다. 

"페이스북 가이드라인 대법원 주도에 반대" 의견도

 대법원(자료사진)
대법원(자료사진) ⓒ
서기호 서울북부지법 판사는 "페이스북 가이드라인 제정을 대법원이 주도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서 판사는 30일 오후 '대법원 윤리위 결정을 접하고서'라는 글을 통해 "최 판사에 대한 징계 등을 판단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애시당초 논란을 일으킨 쪽은, 사적공간의 글을 단지 판사라는 이유로 1면에 특종기사화한 <조선일보>"라며 "법관 윤리보다 언론의 윤리정립이 시급하다"고 꼬집었다.

서 판사는 SNS 사용에 신중하라는 윤리위 권고와 대법원이 SNS 가이드라인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선 "표현의 자유를 위축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유감"을 표했다.

서 판사는 "대법원은 판사들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는 상부기관"이라며 "일선판사들로서는 단순 권고가 아닌 실제 통제지침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판사라는 이유만으로 특정언론과 대법원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매우 위축되고 불편할 것"이라며 "대안으로 일선 판사들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논의를 통해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익명을 요구한 지방의 고참 판사는 이번 대법원의 결정이 "최 판사와 대법원의 무승부로 끝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의 가이드라인 제정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이 판사는 사견임을 강조하며 "사적 공간이건 공적 공간이건 법관은 절제된 표현을 써야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라며 "최 판사가 법관의 표현의 자유, 기본권 등에 화두를 던진 건 맞지만, 개인으로선 (논란에 휘말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판사들의 SNS 사용에 관해서는 "현재 논란이 있으니까 기준은 마련해야 한다"며 "판사들의 책임 범위와 활동 범위 등이 나와야 한다. 지금처럼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불필요한 마찰을 계속 겪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관건은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중립 문제

이밖에도 법원 내부게시판에는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성토하고, 판사들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법원공무원들의 게시물들과 수많은 댓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제 법원 내부는 향후 마련될 SNS 가이드라인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관건은 다시 판사를 포함한 공무원의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중립 문제다. 헌법에 근거하면 확실한 점 두 가지가 나온다. 첫째, 헌법상 언론의 자유, 통신의 비밀과 자유, 양심의 자유 등으로 규정된 표현의 자유는 '모든 국민'에게 있다. 둘째,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되지 '강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불어 법원이 보수언론의 '색깔론' 공세에 대응할 적절한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도 <조선일보>가 특정 판사를 '정치 편향'으로 몰아감으로써 촉발된 문제이다. 대다수 법원 구성원들은 보수언론의 보도를 법원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보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오히려 보도 직후 윤리위에 회부하는 등 신중치 못한 처신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법원 구성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관심이 집중된다.


#최은배#한미FTA#이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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