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시민 <후불제민주주의>
 유시민 <후불제민주주의>
ⓒ 돌베게

관련사진보기

"짜장면-짬봉도 마찬가지-은 선불입니다."

한번씩 가는 중국집 입구에 이런 문구가 있다. 안에서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짜장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줄행랑을 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식당 주인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달에 두세 번은 이용하는 경남 진주에서 축동까지 고속도로 통행료가 지금은 후불제이지만 전에는 톨게이트에서 돈을 먼저 내는 선불제였다. 생각해보니 현금은 선불제이고, 신용카드는 후불제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는 선불제과 후불제 뒤섞여 있다.

민주주의는 선불제? 후불제?

그럼 민주주의는 선불제일까? 후불제일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우리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조문이 생긴 것이 제헌헌법때니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 된 지는 불과 63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일제식민지였고, 그보다 더 전에는 봉건왕조국가였다. 우리 역사가 5000년이라지만 인민이 주인되는 역사는 불과 60여 년 밖에 안 된다.

우리는 봉건왕조국가-식민국가에서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좌우로 갈려 극한 증오와 싸움을 했지만 누구 하나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일성도 나라 이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렇게 쉽게 민주공화국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북한은 나라이름만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 사실상 '왕조국가'가 된 지 오래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동안 대한민국 역시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명함을 세계에 내밀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20여 년 동안 민주주의를 만끽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이미 주어진 '선불제'가 아니라 권력과 끝없는 투쟁으로 얻어지는 '후불제'임을 간과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후불제임을 간과한 지난 20여 년

그 결과 지난 3년 반 동안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민주공화국'이 위협받을 수 있음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전두환의 헌법 유린 쿠데타, 인혁당 사건으로 형장 이슬로 사라진 죄 없는 8명, 1980년 광주와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 그리고 이름도 남김없이 떠난 수많은 이들을 눈을 직접 보았지만 민주공화국이 현실이 되자 우리는 피를 통해 얻은 이 대가를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3년 반 전 촛불이 광화문과 온 나라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외친 이후 나온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저, 돌베개 펴냄)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유 전 장관이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놓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다며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민주주의'"였다고 강조한다. 

"헌법이 담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 조항 하나하나에는 인류의 문명사가 들어 있다. 자유와 평등, 인권과 평화, 복지와 사회적 안정을 갈망하는 인간의 오랜 꿈을 담은 헌법 조문들은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고뇌하고 싸우고 노력하고 헌신한 동서고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쓰였다. 제헌헌법 덕분에 우리 국민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 양성평등이 대중적 의제가 되기도 전에 여성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노동3권이 주어졌다.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본문 23쪽)

"우리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됐다"는 주장에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1960년 4월 혁명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위대한 시민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서구가 민주주의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라고 말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로마 노예들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당한 스파르타쿠스, 프랑스 혁명처럼 민주주의 곧 민주공화국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4․19혁명과,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도 피의 역사다. 겉보기에는 같은 피의 역사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다르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어느 누구하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공화국을 배반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에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서구 사회는 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피를 흘린 것이라는 점에서 서구 사회와 우리는 민주공화국 진입이 달랐다는 것이 유시민 생각이다. 물론 서구사회도 인류 역사에 비교하면 새발에 피다.

인민주권이라는 개념이 서구사회에 들어온 것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출발점으로 하면 200년이다. 남녀 모두가 투표권을 행사한 인민주권은 불과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42쪽). 따지고 보면 서구나 우리나 별 다르지 않은 셈이다.

민주주의 무개념 지도자보다, '무책임한 주권자'가 더 문제

민주주의는 후불제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내가 지지해 뽑은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과 교양이 부족한 지도자라면 더 그렇다. 지난 3년 반 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없는 지도자임을 끊임없이 보여줬다.

그런데 유시민은 지도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교양 부족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주권의식과 책임의식이 부족한 시민 자신임을 명시하라고 강조한다. 도덕성을 상실한 지도자가 "경제를 살리겠다"며 현혹하자 너도나도 그를 지지했었다. 이는 "무책임한 주권자"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과 교양이 부족한 지도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일시적 위협 요인이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주권 의식과 책임 의식이 부족한 국민 자신이다. 억제할 수 없는 주관적 욕망에 사로잡혀, 아무런 방법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욕망을 무제한 충족시켜주겠다고 공언하는 거짓 구세주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그리고 그 욕망이 충족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가차 없이 돌아서서 또 다른 메시아를 고대하는 무책임한 주권자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시민 개개인이 스스로를 계몽하고 발전시키는 꼭 그만큼씩만 앞으로 나아간다." (본문53쪽)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책임을, 의식을 잃어버린 국민에게 민주주의 교양과 상식이 없는 지도자는 결국 독재로 갈 수밖에 없다. 권력자는 항상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되기를 바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진보성향 정치인이 권력을 잡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감시와 비판은 민주공화국 시민에게는 필연이요 무책임한 주권자가 되지 않는 길이다.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 달 26일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 당선이 확실시 되자 서울광장에서 시민들에게 "박원순 시장님은 이제부터 저의 적입니다"이라면서 "권력을 가지면 그 순간으로부터 저의 코미디의 대상"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이제부터는 박원순 시장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더 이상 같이 서 있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조금이라도 뽑아 준 시민들에게 대치되는 행보를 하게 되면, 누가 뽑아줬는지 망각하는 경우가 생기면 그걸 깨닫게 해줄 것"이리고 했다. 권력은 시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책임있는 주권자가 있는 한 권력 민주시민 굴복시킬 수 없어

이 길은 가볍지가 않다. 어쩌면 이명박보다 더 민주주의 기본 양식이 없는 지도자를 우리가 뽑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무책임한 주권자가 아니라 책임있는 주권자가 된다면 결코 권력은 민주시민을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더 거세질지도 모르는 이 풍파를 잘 헤쳐 나갈 것이다. 많은 고난과 희생이 따르겠지만, 그 누구도 한번 자유를 맛보고 권리의 소중함을 체험한 국민들을 다시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맹목적 추종의 본능 아래 복속시킬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동량재가 될 나무는 응달에서 자란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모진 비바람 속에서 뿌리 깊은 나무가 선다. 이 시련을 통해 한국 사회는 권력자의 선의에 의지하지 않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세우게 될 것이다."(본문 46쪽)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10조)

'행복추구권'이다. 이 조문은 "내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다. 존 에프 케네디는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국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를 '바이블'로 여긴다. 시민들이 권리를 요구하면 국익을 해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이 배제하는 한 가지가 있으니 '불관용'이다.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불관용 그 자체 뿐이라는 뜻이다. 불관용은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파괴하는 폭탄과 같은 것으로 보수가 이것으로 무장하면 극우가 된다고 말한다. 그 예가 히틀러이다. 당연히 진보가 불관용으로 무장하면 스탈린처럼 극좌가 된다고 유시민은 말한다. 보수냐 진보냐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보따리가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이 불관용에서 조금 벗어나는 듯 했는데 이명박 정권 들어 불관용이 지배하게 되었다. 권력을 비판하는 것에 관용이 없다. 비판하면 붉은 덧칠까지 한다. "나를 따르라"만 있지, "네 말을 듣겠다"는 생각이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선의가 별로 없어 보이는 이명박 정권, 이 정권이 지배하는 2011년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민주공화국을 지키고, 발전시킬 책임은 권력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보따리가 아니다. 갈 길이 멀고 멀다. 민주주의는 후불제다.

덧붙이는 글 | <후불제민주주의> 유시민 지음 ㅣ 돌베개 펴냄 ㅣ 14000원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돌베개(2009)


태그:#민주공화국, #후불제민주주의, #유시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