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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상추 다섯 포기의 텃밭

지고 있는 가을이 서러워 헤이리를 완상하며 한 바퀴 돌았습니다.

갤러리바움 앞의 단풍나무 군락을 바라보며 서성거렸습니다. 창밖으로 저의 모습을 발견한 이정규 선생님께서 차 한 잔 하라며 권했습니다. 손을 내젓자 떡을 들고 나오셨습니다. 저는 사양치 않았습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내놓는 다과보다도 저는 변함없이 따뜻한 이정규 선생님의 시선이 더 좋습니다.

코지하우스를 지날 때면 그집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습니다. 유해분 선생님은 창가에서 일하시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십니다. 으레 밥은 먹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부엌을 향해 외칩니다. 식사를 차리도록……. 그 밥을 뚝딱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제 손에 한두 가지의 찬을 들려줍니다. 유 선생님은 제 처가 직장생활로 아이들과 서울에 있는 형편을 알아서 제가 끼니때를 맞추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청향재의 송효섭 교수님은 미식가라 할 만합니다. 오랫동안 다양한 음식 모험을 즐겨 오신 분입니다. 저는 안 보고도 송 교수님이 무슨 특별한 음식을 드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미란 사모님은 색다른 음식을 하면 제몫으로 모티프원으로 그 일부를 가져오곤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집을 짓지 못하신 저의 옆집 김성규 선생님은 그 땅을 수시로 오가시며 텃밭으로 가꾸십니다. 그 옆에 작은 공간을 더 일구어 작년에는 우리 집 몫으로 상추 모종 다섯 포기를 심어주었습니다. 그 텃밭에 도라지를 심어 쌈 거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점더 넓혀 고추 다섯 포기까지 더 심어주었습니다. 지난여름 내내 쌈 걱정은 없었지요.

상추 다섯 포기. 이 상추를 먹는 여름 내내 이 텃밭을 만들어준 이웃의 정을 함께 음미하게 되니 이 또한 입맛을 돋우게 됩니다.
 상추 다섯 포기. 이 상추를 먹는 여름 내내 이 텃밭을 만들어준 이웃의 정을 함께 음미하게 되니 이 또한 입맛을 돋우게 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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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의 신명순 교수님께서는 최근 서가를 정리하시면서 모티프원에 오시는 손님들과 나누어보면 좋을 것 같은 책을 몇 박스 보내오셨습니다.

어울림과 배움이 있는 커뮤니티

작년에도, 그 전해도 눈이 오면 마당안숲으로 모였습니다. 참나무골 이웃들은 첫눈이 오면 참나무숲을 바라보며 팟럭 파티Potluck Party를 갖자고 약속해두었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이사 오신 온 밤나무집 차명호선생님은 참나무골 길 위에서 스키를 타던 추억을 전설처럼 이야기합니다.

밤나무골의 겨울은 수빈뜰의 온실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깊어집니다. 화목난로를 지피고 1층의 온실이 훈훈해지면 고구마를 굽고 막걸리를 돌립니다. 북풍이 매서운 파주의 겨울밤도 이런 밤마실로 한기를 잊습니다.

작년에 참나무골 회차로에 멍석을 깔고 동네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참나무골 사람들이 각자의 작품을 펼쳐놓고 감상한 후 저녁을 함께한 후 막걸리를 촉매삼아 서로의 살가운 정을 나누었습니다.

올해 타임앤블레이드로 동네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동진 관장님의 컬렉션도 보고, 노래도 듣고 30여 년간 해외를 다니시며 익히신 소시지 잘 만드는 법도 전수받았습니다.

정월 대보름이면 커뮤니티하우스에서 오곡밥과 아홉 가지의 묵은 나물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먼저 집을 지은 사람들이 곧 집을 지어야할 미건축 회원들을 불러서 자신의 집을 개방하고 어떻게 집을 지었고, 집 지을 때 무엇을 주의해야하는지를 들려주었습니다.

몇 년간 이웃들이 마셜아트센터에 모여 왈츠와 탱고를 즐겼습니다. 이웃의 손을 맞잡고 서로 스텝을 맞추는 것도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서는 주민들이 아프리카 타악기 젬베를 배우고 축제에서 합주에 참가했습니다.

커뮤니티하우스에서는 서현석 지휘자의 지도로 마을 사람들의 합창이 울려 퍼졌고 취림헌에서는 주민들의 스스로 조직한 교양강좌인 미술사강의가 몇 년째 있습니다.

정한숙 기념관에서 매월 주민들이 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했습니다.

송 교수님은 새벽까지 함께 술을 나누어 마시곤 하던 사람들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계기로 '신신낭만'이라는 이웃그림동아리가 되었습니다.

'신신낭만'이라는 마을의 창작 그룹, 이웃 간의 화목과 소통의 결과입니다.
 '신신낭만'이라는 마을의 창작 그룹, 이웃 간의 화목과 소통의 결과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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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박경리 선생님의 문학의 뿌리를 찾아 원주로 문학투어를 다녀왔고 올봄에는 우리가 사는 곳의 역사를 알기위해 다함께 파주의 역사유적들을 돌았습니다. 불과 지난달에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를 찾아서 문화현장을 이웃들과 함께 호흡했습니다.

카메라타의 황인용 선생님은 선생님께 은혜 입은 한 회사의 감사 표시를 마을의 것으로 받았습니다. 노을동산 아래의 500년 된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 탓에 굵은 밑동은 속이 비고 겉만 남아 위태로운 것을 정자나무 주변 가꾸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아름지기'와 함께 이 마을의 느티나무를 치료하고 주변을 단장하는 것으로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공간퍼플의 김상래 선생님은 본인이 운영하고 계신 회사의 수익 일부를 한국메세나협의회를 통해 예술을 지원하는 금액으로 기부하고 그것을 종자돈으로 하는 헤이리심포니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매년 열릴 수 있게 했습니다.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클래식 공연에 목말랐던 헤이리 방문객들과 파주의 이웃들이 무료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누리고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갈대광장에 모여 함께 마을 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족구를 하지요.

마을청소. 이런 아침 모임도 이웃 간의 건강한 소통입니다.
 마을청소. 이런 아침 모임도 이웃 간의 건강한 소통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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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주 감독님은 수시로 헤이리의 이웃들을 교하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솜씨 좋게 잔치국수를 삶아 내놓곤 합니다. 박감독님은 아직 헤이리로 이사를 오지는 못한, 그러나 헤이리의 마음의 이웃입니다.

지나치는 길에 이혁경 선생님 부부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직 이사를 오지못했지만 회원게시판을 통해 글로 안부를 나눈 사이입니다.

오다가다 늘 만나는 이웃은 진달레꽃 뒤에서 괜스레 활짝 웃습니다. 이제 말이 필요없는, 이심전심의 이웃이 되었음을 함께 웃는 참진달래가 말해줍니다.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소통임을 진달래꽃 뒤에서 웃음 머금은 이찬학작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소통임을 진달래꽃 뒤에서 웃음 머금은 이찬학작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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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종이의 용도

저는 2006년 초, 집이 미쳐 완성되기도 전에 이사를 와야 했습니다. 서울의 전셋집을 비워주어야 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아직 싱크대가 완성되지 않아 취사도 불가능했습니다. 이삿짐이 쌓인 상태로 공사 중인 저희 집을 방문한 한향림옹기박물관의 한향림관장님은 본인의 집으로 식사하러 오라고 우리가족 모두를 초대해주었습니다.

우리집 강아지 모프가 장염으로 죽을 때도 송효섭교수님은 등교하는 걸음을 멈추고  함께 슬퍼하셨고, 송 교수님네의 애완견 솔이가 출산을 할 때 개의 습성에 대해 잘 아는 영대가 앞장서서 새끼를 챙겼습니다.

안상규 화백님은 직접 그리신 제 초상화를 선생님의 스튜디오 이젤에 올려두었습니다. 저를 보지 않고 그린 그림입니다. 저를 모델로 세우지도 않고 어떻게 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안 화백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벗님은 내 마음속에 항상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그린거야!"

영대가 미국으로 교환학생으로 나가는 날 도도헌의 이재영 선생님이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영대의 봉투하나를 영대에게 내밀었습니다.
"내가 미국 동생집에 갈 때 쓰려고 둔 거야. 미국에서 요긴할 때 사용해.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 봉투에는 여러장의 달러가 들어있었습니다.

모티프원의 냉장고 벽에는 빛바랜 종이가 한 장이 붙어있습니다. 그곳에는 쓰레기 수거일과 마트, 세탁소, 치킨집과 피자집 그리고 이웃집의 전화번가 육필로 적힌 종이입니다. 우리가  이사 오자마자 저희 앞집의 정주영 선생님께서 이곳을 사는데 꼭 필요하다 싶은 것을 적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메모지를 내밀었습니다. "더 궁금하신 것이 있으면 전화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6년이 지난 이 종이 쪽지속의 정보는 거반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쪽지를 떼지 않는 것은 이 누른 종이가 이웃의 지극한 배려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종이는 이제 정보를 담은 종이가 아니라 이웃사랑의 증표로서 그곳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시간 탓에 파삭파삭 마른 이 누른 갱지는 이웃의 배려를 제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게 합니다.
 시간 탓에 파삭파삭 마른 이 누른 갱지는 이웃의 배려를 제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게 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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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집에 차 선생님이 남해에 수목원들 만들기 위해 집을 비운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세입자로 들어왔습니다. 그 새로운 이웃이 말했습니다.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이곳으로 이사 왔습니다."
새로 이사 오신 분이 이사 떡을 돌리면 먼저와  살던 사람은 새로 이사 온 사람을 초대하고, 그 댁은 다시 집들이로 이웃들을 초대했습니다.

헤이리의 최초 입주민은 2003년도에 건축을 완성하고 입주하여 헤이리에서 실제 생활한 지 8년이 경과했습니다.

현제 145가구 남짓 이사를 오셨습니다. 아직 총 회원의 반도 못 미치는 가구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이웃으로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질 일이 많이 남은 셈입니다.

시끄러운 소란에 와인을 들고 내려온 윗집 주인

저의 대학 은사님이신 조석종 교수님께서 영국으로 교환교수로 가 계실 때입니다. 4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근동의 유학생들을 교수님의 댁으로 모이게 해서 파티를 열어주곤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모님께서 한국음식을 장만해서 힘든 유학생활을 잘 견디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목소리가 커지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집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지요. 특히 오래된 서양의 서민집들이란 방음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유학생들과 왁자지껄 밤을 즐기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고 교수님이 현관문을 여니 위층의 부부가 서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일순 걱정이 되었습니다. 소란을 나무라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 겁니다. 허리를 굽히며 사과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부부는 사과를 받기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선생님 댁에서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나기에 필시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축하를 해드려야겠다고 내려온 겁니다. 이 와인을 받으시지요."

교수님은 그 이웃을 안으로 모셔서 유학생들과 함께 더욱 즐거운 밤을 보냈고 그 일이 있은후 교수님이 귀국할 때까지 그 부부는 한집 같은 이웃으로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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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백만매택百萬買宅, 천만매린千萬買隣.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 는 이 말을 들어보셨지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南朝의 역사서인 남사南史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송계아宋季雅라는 관리가 퇴임 후 살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미 여러 곳을 마뜩찮아 하다가 천백만금을 주고 덕이 높은 여승진呂僧珍이라는 사람의 이웃집을 사서 이사했습니다. 백만금 밖에 안 되는 낡은 집을 천백만금을 주고 샀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여승진에게 답했습니다.

"제가 지불한 돈의 백만금은 이 집값이지만 천만금은 선생님과 이웃되기 위한 값으로 지불한 것입니다."

어떤 집에 사느냐보다 누구와 사느냐가 더 중요한 이치는 남북조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여깁니다.

우리 선조들이 서당에서 처음 배웠던 교재, 사자소학에도 ' 살 곳을 고를 때는 반드시 이웃을 가리고 반드시 덕이 잇는 사람에게 나아가라(거필택린居必擇鄰 취필유덕就必有德)'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좋은 집에 살기위해 헤이리에 집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좋은 이웃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제 가족과 제인생의 후반기를 이 커뮤니티에 의탁한 것입니다. 

좋은 이웃과 함께 살아야겠다는 일념 외에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던 저는 헤이리의 건축지침에 따른 집을 짓기 위해 많은 부분 금융권의 도움을 받아야했습니다. 여전히 융자라는 그 제도에 감사한 마음이지만 매월 배고파하는 그 은행의 허기를 매우기 위해 현재 우리 전 가족의 긴축은 7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처는 서울을 오가면 직장에 충실하고 있으며 저의 아들딸들은 장학금 수혜가 가능한 대학을 골라 다니고 있습니다. 해외에서의 공부는 장학금의 수혜범위 안에 있는 교환학생만 가능합니다. 저는 자유롭기 위해 조직을 이탈했지만 여전히 노동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단지 달라진 속박을 즐기는 법을 터득했을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모든 것을 감수함에 기꺼운 것은 송계아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는 기꺼이 집값의 열배를 좋은 이웃을 얻는데 지출했습니다. 은행의 허기를 달래기 위한 제 가족과 저의 이 노동들은 송계아가 선불로 낸 것을 저는 후불로 나누어 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이웃, #헤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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