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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구세요?"

"너는 누구인데?"

"저는 여기 피아노학원에 다니는 아이에요."

"나도 여기 피아노학원에 다니는 사람이야."

"그런데 어른이 피아노를 왜 쳐요?"

"선생님도 치시잖아"

"누구요?"

"원장선생님"

"아... 책이 무겁다."

 

8살 쯤 되어보이는 여자 아이가 한참 말을 걸다가 말이 막혔는지, 피아노책 핑계를 대면서 우물 우물거리다 연습방으로 들어간다. 흔히 있는 일이다. 초등학생만 바글거리는 피아노학원에서 어른이 앉아서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쳐다본다. 처음엔 내가 너무 잘 쳐서 보는 줄 알고 으쓱했지만 실상을 알고 보니 그게 아니다.

 

영월에 오자마자 하고 싶었던 일, 첫 번째가 피아노치기다. 도시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면 가능했겠지만 뭐가 그리도 바쁜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보다. 7월 말에 인천에서 내려와서 8월 초 한 주는 어느 학원을 다닐까 여기저기 다녀 본 후(사실 딱 두 곳 갔었다.) 원장님에게서 풍겨오는 자상함과 학원의 쾌적함이 마음에 들어 조이엘피아노학원에 등록한 후 12월까지 학원비를 결재했다.

 

결코 즉흥적인 행위가 아니다. 바이엘 기본을 중학교 2학년 때 2달 코스로 마치고 대학 1학년 때 체르니 100번(동아리 선배들은 이층 당구장으로 나는 일층 피아노학원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4학년 때 조금, 졸업해서 체르니 30번 조금, 찔끔찔끔.

 

오랜 기간을 피아노와 함께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피아노 칠 기회는 계속 있고, 동요나 쉬운 가요 정도로 그치니 답답하고 단조로운 반주가 재미없고. 하지만 피아노를 멋지게 치고 싶은 욕구는 시들지 않는다. 왜 유독 피아노를 좋아할까? 배우기 힘들고 오랜 시간을 연습하고 익혀야 하는, 결코 단조롭지 않은 피아노에 대한 애착은 쉽게 놓아지질 않는 걸까? 근본적으로 뭐가 있을까?

 

피아노는 '나'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살피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피아노만 겨우 들어가는 방에 들어가 피아노를 치다보면 온전한 나를 만나게 된다. 특히, 반 평도 안 되는 공간에 칸막이로 또 막고 유리문만 겨우내는 피아노 학원에서  집중이 더 잘 된다. 그 안에서 나를 보게 된다. 너무 이기적이라 부끄럽고 미안했던 순간들이 음을 타고 흘러가고 순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도 만나게 된다. 울며 웃으며 한 시간 치고 나오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복잡한 생각이 단순하게 정리되고 무거웠던 마음의 찌꺼기가 씻겨 져 나간다.

 

흥얼거리며 박자를 맞추며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피아노는 함께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내가 가는 곳에 늘 네가 있고 너와 함께라면 절망도 슬픔도 희망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늙어서도 피아노랑 놀면 심심하지 않을 거라는 소박한 노후대책.  

 

피아노, 10년만 쳐 보자

 

앞으로 10년만 꾸준히 쳐 보기로 한다. 빨리 잘 치고 싶은 마음은 버린 지 오래다. 천천히 꾸준히 급한 길을 돌아가듯 처음부터, 기본부터 해 보기로 한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피아노가 더 잘 된다. 잘 안 쳐지면 다시 치면 되고 틀린 곳 계속 틀리면 형광펜으로 표시해두고 또 치면 된다.(형광펜을 졸업 후 처음 사 본다.) 예전엔 붙임줄, 이음줄 다 무시하고 빨리만 쳤는데 이제는 점점 세게인지, 점점 느리게 인지, 그 음만 특히 세게인지 다 보인다. 그래도 제일 안 되는 게 있다.

 

"다음 음을 미리 보세요. 미리 눈으로 보고 손가락을 빨리 움직여서 그 음에 갖다 놓아야 해요."

 

꾸밈 음이 많이 나오거나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야할 때는 다음 마디를 놓치고 만다. 즉, 정해진 박자에 맞게 들어가지 못하고 조금 쉬고 제자리를 찾고 다시 손가락을 올리는 시간이 생겨 반 박자 내지는 한 박자를 늦추게 된다. 악보 속의 콩나물들은 곡예를 하다가 땅에 떨어지고  엉덩이 털고 일어나 다시 줄로 올라가 줄타기를 한다. 흐름이 끊겨 재미없다.

 

앞서서 보라

 

음을 미리 보고 준비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서 인생이 떠오른 건 왜일까? 손은 지금의 악보에 가 열심히 치지만 눈은 한 마디 앞을 내다보고 준비해야한다는 것. 피아노를 치면서 인생을 배운다. 앞으로의 영월살이를 어떻게 내다보고 어떻게 채울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해 주는 값진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카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월,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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