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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성곽 북서문이다.
▲ 창의문 한양성곽 북서문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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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을 지나 무악재를 곧바로 넘을까요?"

신숙주가 수양에게 넌지시 물었다. '곧바로 가지 말고 동쪽으로 꺾을까요?'의 또 다른 표현이다. 신숙주는 수양이 압록강을 건너올 때 혼잣말처럼 되 뇌이던 '무계동이 궁금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창의문으로 가자."

280년후, 겸재 정선이 그린 창의문 고갯길
▲ 창의문 280년후, 겸재 정선이 그린 창의문 고갯길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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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자하문이라고 불리는 창의문은 한양성곽 4소문 중 북서문으로 창건되었다. 도성에서 양주를 거처 평양과 의주로 가는 지름길이기에 백성들이 즐겨 이용했으나 '문을 열어놓으면 왕기가 빠져나간다'는 풍수사들의 주장에 따라 폐쇄되었다. 그 후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사신단 일행이 개울을 끼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천(沙川)이다.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삼각산과 백악산 사이를 흐르는 개울은 모래가 많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모래내(沙川)라고 불렀다.

얼마가지 않아 모래 밑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르는 물은 맑고 계곡은 깊었다. 바닥에는 수마(水磨)된 돌멩이와 바위가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소나무가 빽빽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현봉이 눈앞을 가렸다. 삼각산 능선에서 가장 기(氣)가 세다는 봉우리다.

사초는 사관이 개인적으로 보관...임금도 볼 수 없었다

수양대군이 이곳 창의문고개를 넘은 직후 1452년 3월 편찬 작업을 시작할 때는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가 찬수관이었으나 1454년 3월 편찬 작업을 완료할 때는 정인지 혼자였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 세종대왕실록 수양대군이 이곳 창의문고개를 넘은 직후 1452년 3월 편찬 작업을 시작할 때는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가 찬수관이었으나 1454년 3월 편찬 작업을 완료할 때는 정인지 혼자였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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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소(造紙所)가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자하문 고개로 오르는 길이다. 종이를 만드는 데는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질이 좋은 고급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더구나 실록을 편찬하고 사초(史草)를 세초(洗草)하여 재사용하기에는 도성에서 가까워야 한다. 삼각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이 계곡의 물보다 더 좋은 물은 없었다.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면 사관이 배석했다. 왼쪽에 앉은 사관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고 우측에 앉은 사관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오가는 말(言)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른바 좌사우언(左事右言)이다. 빈청에서 조정대신들과 어전회의가 열려도 마찬가지였다.

편전까지 사관이 따라붙자 태종은 임금의 사적 공간에 사관의 출입을 금했다. 민인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편전 계단아래 몸을 숨기고 임금의 대화를 채록하다 적발되어 귀양 가면서도 긍지를 가지고 떠날 만큼 사관은 자부심이 강했다.

이렇게 작성된 사초는 사관이 개인적으로 보관했다. 궁내에 보관하면 사초에 등장하는 높은 관직의 이해 당사자는 물론 임금도 열람해 보고 싶은 충동이 발동한다.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궁금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보면 수정하게 되고 수정하면 역사가 왜곡된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궁밖에 보관했던 것이다.

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 실록각 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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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승하하면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흩어져 있던 사초를 모아 실록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초초본과 중초본, 정초본 편집과정을 거쳐 실록이 인쇄에 들어가면 사초는 물에 씻었다. 사후에 있을 수 있는 갈등의 단초를 없애버리고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해서다. 비록 편집에는 누락되었지만 사초에는 궁중이 뒤집힐 사건이 기록된 것도 있을 수 있고 한 사람을 죽이거나 가문을 멸문지화 시킬만한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를 갔을까? 두샛바람이 불어왔다. 도성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다. 가마를 잠시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있을 때 일단의 군사들이 쪼르륵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창의문을 지키던 숙위병들이었다.

경복궁에 있다
▲ 경회루 경복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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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을 바라보는 모습이 가슴을 뛰게 했다. 꿈을 펴면 펼칠 수 있고 뭔가 잡으면 잡힐 것 같은 도성이었다.

"신집의! 무계동이 어디인가?"

"저쪽 성벽 아래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수련장이 있고 그 언덕에 저택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안평대군이 무사들을 불러 모아 훈련하는 무계동입니다."

신숙주가 인왕산 쪽을 가리켰다. 작은 계곡 사이로 사잇길이 있고 숲이 무성했다. 그곳을 바라보던 수양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신숙주가 가리킨 곳은 수양의 눈에도 왕기가 서려 있는 것만 같았다. 도성에 퍼진 소문이 뜬소문이 아니라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수양은 아버지 세종이 생전에 점찍어 놓은 헌릉 옆 산릉지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헤아려 볼 만큼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부왕이 잡아놓은 수릉지이기 때문에 거역하지 못했다. 등극 후, 오늘날의 여주 영릉으로 천장을 추진했으나 마무리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예종이 천장을 완료했다.

형님 문종의 경우는 달랐다. 문종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헌릉 곁에 수릉지를 정해놓았으나 건원릉 옆으로 전격 변경했다. 이에 부왕의 총애를 받았던 풍수사 목효지가 건원릉 옆자리 현재의 현릉자리보다 마전현 북쪽의 계좌정향혈과 장단현 북쪽의 임좌정향혈이 좋다고 반대했다.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대의 풍수사 목효지와 수양대군의 '풍수토론'이 붙었다. 결국 목효지를 설복하고 국문에 처하도록 했다. 수양은 땅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고 땅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을 읽으려고 나름으로 공부를 한 것이다.

무계정사 옛터에 남아있는 ‘무계동’이라는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로 추정된다.
▲ 무계동 무계정사 옛터에 남아있는 ‘무계동’이라는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로 추정된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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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동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수양이 김승규와 황보석을 쏘아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그 순간, 승규와 석이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두 사람이 하나같이 자신들의 내밀함이 드러난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수양이다.

"자네는 몇 번이나 다녀갔는가?"
김승규를 노려보았다. 다녀갔다는 것을 전제한 예단된 물음이었다.

"금시초문입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떨림은 감동과 경기(驚氣)의 증거다.

"믿어도 되겠는가?"

"네, 믿어 주십시오."
수양은 승규의 목소리는 흘려버리고 눈을 응시했다. 승규가 시선을 피했다. 날카로운 시선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았네. 이것을 수문장에게 갖다 주게."
수양이 자그마한 선물꾸러미를 내놓았다. 승규를 멀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꾸러미를 받아든 승규와 석이가 문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수련장인가?"
김승규와 황보석이 떠난 것을 확인한 수양이 나직이 물었다.

"오백 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오백 명씩이나?"
수양이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잘 훈련된 정예 5백이라면 못할 일이 없으리만큼 두려운 존재가 아닌가.

"안평이 군사를 기른다면 누구를 치게 위해 기른단 말인가?"
수양이 자문했다.

"김종서? 황보인? 아니라면 임금? 그것도 아니라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수양은 전율했다. 등골이 서늘함을 느끼며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무계정사터에 남아있는 집은 쇠락하고 고목이 자리를지키고 있다.
▲ 무계동 무계정사터에 남아있는 집은 쇠락하고 고목이 자리를지키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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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이 이렇게 준비하는 동안 난 뭘 했나?"
해놓은 것이 없다.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가보시겠습니까?"

"소인배처럼 가보기는..."

수양이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가보고 싶다. 두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허나, 일행에는 신숙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사도 있고 사자관도 있고 하인 종배들도 있다. 그리고 적장의 아들 김승규와 황보석이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안평의 뒷마당이나 확인하러 다니는 쫀쫀한 소인배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잠시 땀을 식힌 사신단은 자하문 고개를 내려왔다. 이제 도성이다

한성에 도착한 수양은 부사 이사철과 함께 자문(咨文)을 가지고 복명했다. 중국이 조선 임금의 등극을 승인한 공식 문서다. 임금이 외정에 막차를 설치하고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등 종친을 불러 수양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덧붙이는 글 | 조지소(造紙所)는 수양대군이 등극한 후, 1466년(세조12) 조지서(造紙署)로 개칭하였습니다.



태그:#수양대군, #창의문, #자하문고개, #조지서, #무계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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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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