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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해군기지 건설 추진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 강정마을엔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다양한 이들이 함께 폭염의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서울에서 왔고, 어떤 이는 프랑스에서 왔고, 또 어떤 이는 날 때부터 강정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평화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강정마을 찾은 이들을 '자발적 평화유배자'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강정마을로 자발적 평화유배를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열다섯 번째로 고유기 집행위원장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고유기 범대위 집행위원장. 제주지역 시민운동 15년, 제주 군사기지 문제만 10년.. 한 번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공권력에 의해 구속됐다.
 고유기 범대위 집행위원장. 제주지역 시민운동 15년, 제주 군사기지 문제만 10년.. 한 번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공권력에 의해 구속됐다.
ⓒ 고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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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년 만에 공안기관 대책회의가 열렸고 강정마을엔 느닷없는 검거열풍이 불었다. 4년 넘도록 해군기지 반대투쟁을 해왔지만 돌멩이 하나 던진 적 없고, 흙 한 줌 쥔 적 없이 싸워 왔다. 그럼에도 공안당국은 '폭력으로 공권력에 도전했다'는 구실을 달아 마을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을 체포했다. 

'육지경찰'이 강정마을에 투입되던 9월 2일 오전 9시, 마을회관에 마을 주민 두 명과 함께 있던 그가 내게 전화를 했다.

"힘없는 우리 세 명 잡겠다고 경찰 수십 명이 마을회관을 완전히 둘러쌌어. 신부님들이 항의 하시는데…. 나 이제 가야하나 봐."

고유기 '군사기지저지 제주범도민대책위' 집행위원장. 먼저 구속된 강동균 강정마을회장과 형제처럼 친구처럼 투탁이며 이 먼 길을 걸어온 사람. 아니 그보다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맘씨 착한 아내 덕에 15년 넘게 시민운동을 해온 운동가.

아니 그보다 가수 김원중의 노랠 좋아하고, 제주시인 김수열의 시를 사랑하는 낭만주의자. 아니 그보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육지생활이라곤 해병대 훈련받을 때 포항에 머물렀던 4주가 전부인 진짜 섬놈.

그렇게 잡혀간 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는 인권연대 칼럼 코너인 '수요 산책'에 보낼 원고를 작성했다.   

"어느 가을 오후, 높은 하늘을 배 위에 올려놓고 구럼비 바위에 팔베개하고 누워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가을의 파란하늘과 맞닿은 바다 지평선 아래로 산호들은 날마다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은 수백 년 동안의 진실이었는데, 해군기지라는 거대한 괴물은 이 엄청난 진실을 기억과 그것으로부터 상상의 감옥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그 수백 년의 진실을, 다가올 가을 어느 날의 오후의 현실로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이 감옥의 창살쯤이야 차라리 함께 산길을 넘는 벗일 뿐이다."

10년째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이유

'감옥의 창살'을 '함께 산길 넘는 벗' 쯤으로 여겨버리는 호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에게서 '옥중원고'를 받아온 한 후배활동가는 '감수성 덩어리 그 자체이자 뼛속까지 운동가'라고 그를 표현했다. 자칫 모순될 것 같은 감수성과 운동가.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진한 감수성이 열정과 헌신, 지치지 않는 끈기의 모태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 그에게 한 운동을 그렇게 오래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은 적 있다. 10년째 그는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의 '고통'에 민감해지는 일인 것 같아. 벌써 10년째 관여해오는 해군기지 문제도 결국 강정마을 사람들의 눈으로 보게 돼. 해군기지 문제 하면 '평화의 섬'이니 '군비축소'니 하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실은 그것보다는 강정 사람들 면면을 떠올리며 울컥하게 다가오는 어떤 연민, 아픔, 이것들을 떠받치는 분노 같은 것이 나의 동력이야. 약점이기도 하지만 나를 버티게 하는 동력…."

얼치기 운동가들은 당위를 설명하다 못해 강요하느라 입에 침이 마른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쏟아내는 말엔 생동감이 없다. 이미 죽은 말이다. 새벽이슬처럼 영롱하고, 샘물처럼 맑고, 아궁이에 지핀 불처럼 따뜻한 말.... 이런 말이 살아있는 말이다. 살아있는 말은 '울컥하게 다가오는 어떤 연민, 아픔, 이것들을 떠받치는 분노 같은 것'을 지닌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진짜 운동가는 말부터 살아있다.  

어느 흐린 날, 고유기 집행위원장이 범섬을 가리키고 있다.
 어느 흐린 날, 고유기 집행위원장이 범섬을 가리키고 있다.
ⓒ 고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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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시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동기는 단순했다. 대학생 때 사회운동하는 선배들을 보니 한 1,2년 단체 활동하다가 안정된 직장 찾아, 행복한 가정 찾아 다 떠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난 결혼해서 단체 활동해야 겠다'고 다짐을 했다. 문제는 그와 결혼할 사람의 이해를 구하는 일이었다.

"신제주에 있는 어떤 철학관에 갔어. 이름이 아마 '동명운명철학관'이었을 거야. 그런데 그 사주 봐주는 양반이 나보고 '서른여덟 때까지는 돈 버는 일을 해도 돈이 새니까, 사회봉사 같은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는 거야. 기가 막히잖아, 하하하.

그 후로 해가 바뀔 때마다 아내는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더구만. 그런데 최근에 많이 바뀌었어. 친구처럼 동지처럼 나를 은근히 지지하고 격려까지 해줘. 미안하고 고맙지."

도반(道伴), 짝이 되어 한 길을 걷는 이다. 간혹 우리는 고상한 도반을 그리워한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 같은 존재 혹은 나를 이끌어 세상 길 여는 등대 같은 존재. 도반을 신비화시켰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런 도반은 없다. 피곤한 마음에 건네는 농담이 싫어 다투기도 하고, 제 목 타는 줄 뻔히 아는데 먼저 물잔 건네는 마음에 눈물이 나고, 동짓달 시린 바람에 난방 안 되는 단칸방에서 서로의 살을 부비며 잠이 들어도 따뜻한…. 그런 구체적 관계가 도반이다.
'카운트 다운 세다가 어느 순간에 지지하고 격려까지 해주는 사람'이 아내다. 이쯤 되면 그는 훌륭한 도반을 바로 곁에 모시고 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아예 강정마을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는 제주시에서 강정마을까지는 승용차로 한 시간 거리. 혼자 차를 몰고 오고 가는 시간에 그는 "작은 제주섬에서 흔치 않는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오가는 차안에서 실컷 들으며 잊어버렸던 다짐 같은 것들 되새김질 하지 않았을까. 보닛을 타고 차창으로 휙 달려드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았을까.

"정면으로 달리는 시간들이 나에게 성찰을 심어주고, 그 자체가 활로가 되어서 정말 좋아. 그런데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욕할지 몰라. 그렇지만 강정이 나를 살리는 것만큼은 분명해. 그래서 꺼릴 것 없이 싸울 수 있어. '정의'니 '평화'니 하는 가치들이 손에 잡히는 공간이 바로 강정이야.

강정마을 들어올 때 개인적으로는 정말 이제는 순탄하게 살고 싶다는 탐색으로부터의 일탈이었어. 그리고 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과정이었지. 그리고 '강정 이후'내 자신의 삶이나 현실논리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맘먹었지. 그래서 일단 편했어. 그리고 실제로 강정마을에 있으면 내가 편해. 강정마을이 나를 살리는 거야. 강정마을 지키겠다고, 강정마을 살리겠다고 왔는데 거꾸로 강정마을이 내 삶의 근거를 지키고, 나도 모르게 망가진 나를 살리고 있는 거지."

"가장 두렵고 힘든 것은 해군이나 국가가 아니라..."

태풍 무이파가 제주도에 상륙하던 날이었다. 그와 나는 마을회관을 나와 중문에 있는 한 여관으로 갔다. 육지에서 온 대학생들이 마을회관을 통째로 숙소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이서 맥주 캔을 따며 날 새도록 이야기했다. 이십대 중반 이후 날 새며 이야기해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날 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는 자주 이런 얘길했다.  

"가장 두렵고 힘든 것은 해군이나 국가가 아니라 바로 '시간'이더라. 시간의 힘은 늙어가며 느는 흰 머리카락만큼 마음을 백지로 바꿔놔. 존재를 바람 부는 들판에 세우지. 아무 것도 없는 거야. 허망함, 흔들리는 무력감…. 또다시 '처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 같은 것이 들기도 하고…. 일종의 지리멸렬이지.

어쨌든, 이런 저런 핑계나 이유에도 불구하고 강정문제는 나에게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걸 피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단순한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거야. 역시 복잡한 것은 단순함으로 푸는 거야. 단순함이 복잡함을 물리치는 거야."

강정포고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고유기 집행위원장.
 강정포고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고유기 집행위원장.
ⓒ 고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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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강동균 강정마을회장이 함께 있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안다. 어쩌면 저렇게 죽이 잘 맞을까. 어쩌면 저렇게 서로에게 각별할까. 결코 가볍지 않은, 결코 무겁지 않은 나이를 초월한 우정. 이에 관해서도 그는 자주 이야기했다.(두 사람은 지금 감옥에 함께 있다.)

"강동균 회장님 얼굴이 자꾸 떠올라. 그 분이 마을 회장이기 때문이기보다는 은근히 장난 걸고 여유부리면서도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지.

언젠가 강 회장님이 늦은 밤에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었어. 술을 좀 마신 것 같긴 한데 술기운 보다는 괴로운 기운이 역력하게 느껴지더라. 그 때 강 회장이 막 울먹이면서 '유기야, 힘들다...' 그러시는 거야. 그 때 그 목소리, 지금도 잊지 못해. 얼마 전에도 강정마을로 차를 달리는데 그 때 생각을 시작으로 강 회장님과 주민 분들에 대한 기억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울면서 온 적이 있어."

그는 "뭔가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국가라는 거대한 힘 앞에 싸우더라도 마을사람들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전선의 한 복판에 섰다. 피눈물로 성명서를 쓰고, 사법당국이 티켓다방 찌라시처럼 뿌려대는 소환장을 받은 주민들과 상담하고, 해군과 경찰이 몰려오면 하던 일 멈추고 달려가 싸우고, 싸우더라도 주민들 다치고 끌려가는 일 없도록 절제시키고…. 

"내 안에서 '제주'라는 것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해군기지 문제 과정에서 전국적인 단체들이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야. 2007년 시기에도 서울에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대처하기 위한 '공동평화행동' 같은 것들이 만들어졌었지. 그런데 시민단체들이나 사회운동세력들 내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취급되지 않는 느낌이었어.

정치권도 제주에서는 수년째 첨예한 현안인 해군기지와 같은 사안을 육지부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벌어졌을 경우 이렇게까지 놔뒀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한 마디로 '변방'의 문제로 여기는 것 같았어. '비애' 같은 것이 생기더라구."

진짜 리얼리스트는 눈물에 눈물을 먹고 성장한다. 그래서 체 게바라가 <리얼리스트>라는 시를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너무
외로워하지 마!
네 슬픔이 터져
빛이 될 거야!"

그의 슬픔이 빛이 되는 날은 어떤 날일까. 적어도 지금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가 주민들의 소원대로 잘 풀리는 날일 테다. 최소한 어떤 결말이 날지라도 주민들이 덜 다치는 것일 테다. 말장난이 아니다. 4년 넘도록 싸워오는 동안 주민들은 너무 많이 다쳤다. 

"해군기지가 국가에게 얼마나 절박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강정마을 문제를 통해 이것만은 뼈저리게 느껴왔어. 국가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관철해내고 마는 무소불위의 실체라는 것 말야. 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싸움이 적어도 이런 국가의 오만한 실체를 밝히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봐.

국가가 오만한 권력으로 남는 한, 강정은 물론 우리사회의 미래는 없을 거야. 사회의 다양성이 확대되고, 시민권이 높아진다고 하지만 국가의 물리력과 실정법 논리 앞에서는 하나 같이 무력화되고 말더라. 국가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안보논리'에 딴지 거는 일이 많아져야 해. 안보도 민주화되어야 해. '안보 민주화'라는 말, 많이 써줘."

그는 "기지건설에 저항하며 외쳤던 가치들을 제대로 끄집어내는 노력이 없으면 이겨도 이긴게 아니"라고 했다. "지더라도 저항의 시간들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엮어낸다면 지기만 한 것은 아니듯"말이다.

그는 왜 유배를 자처하나

15년 시민운동 하는 동안 나름 터도 닦고 이름값도 올렸다. 시쳇말로 시민운동 성과 내세우며 의원 배지 단다고 손가락질 할 이 없다. 그런데 그는 다시 길을 나섰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만 10년, 강정마을에서 4년. 왜 자꾸 그는 유배를 자처하는 것일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유배'야말로 '자유'의 다른 말 아닐까. 유배가 역행과 추방을 지칭하잖아. 지금 세상에서 역행이란 정의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 같아. 그리고 추방이란 새로운 가능성의 행보일 공산이 크고.... 글쎄, 내 스스로 유배를 자처했다기보다는 마땅한 발걸음을 했을 뿐인 것 같아. 오래 전 가을쯤이었어. 예비군 훈련을 해안청소로 때우고 있었는데 그때 2시간 동안 집중해서 고민했어. '어떻게 살까?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뭘까?' 뭐 이런 치기어리지만 역사를 이어 오는 주제에 말이지.

그 때 결론이 '그렇지! 세상 굴러가는 것에 반대로 하면 자유로울 거야, 그것이 바로 구조에 대한 저항이지, 세상에 맞추지 않고 내 스스로 추구해가는 다른 삶, 다른 일상…. 그것이 나의 시민운동론이었어. 그렇게 세상 틀에 억지로 꿰맞추지 않고 자유를 추구하며 산다면 나의 유배는 정당해. 그런 유배는 내 삶에 언제든지 권하고 싶어."

철창 안에 갇힌 그가 언제쯤 자유새가 되어 세상을 날지 모르겠다. 그가 철창 밖으로 나오는 날이 올해 가을이었으면 좋겠다. 그에게 내가 아는 한 최고의 가을노래인 <가을이 빨간 이유>를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배경희 글에 작곡가 류형선이 곡을 붙인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그가 좋아하는 김원중이다.

"하늘은 왜 이리도 푸른지
미치도록 아름다운 올해 가을
단풍 저리 붉게 우는 날 알게 되었어
이별의 계절 슬프도록 아름다운 올해 가을
가을이 빨간 이유를 나도 알았어
붉은 가을 이별의 계절엔
그리움도 흔한지
깊은 숨을 쉬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넌 눈물이 있으니 참 좋겠다
눈물 보일 수 없는 난 어쩌겠니
내 눈물은 돌이 되어 쌓이는지 가슴이 무겁다."


태그:#강정마을, #해군기지, #고유기, #제주도, #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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