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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아홉째 아들 화의군은 내연의 여자에게 남자 옷을 입혀 궁궐에 들이려다 적발되어 직첩을 몰수당했다. 조선조 초기에는 임금의 아들 왕자도 국법을 어기면 처벌 받았다.
▲ 수문장 세종대왕의 아홉째 아들 화의군은 내연의 여자에게 남자 옷을 입혀 궁궐에 들이려다 적발되어 직첩을 몰수당했다. 조선조 초기에는 임금의 아들 왕자도 국법을 어기면 처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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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단이 귀국길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이 술렁거렸다.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오는 사신을 '대대적으로 환영해야 한다.'는 수양대군 지지파와 '당연한 결과인데 뭐 그리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느냐.'는 안평대군 지지 세력이 각을 세웠다.

"수양대군이 만리나 되는 먼 곳에서 돌아오는데 어찌 환관 따위를 평양에 보내 위로한다 말입니까? 소신이 화의군을 데리고 의주에 나가 맞이하겠습니다."

안평이 허를 찔렀다. 자신이 직접 국경에 나가 영접하겠다는 것이다. 대인(大人) 다운 풍모를 풍기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속뜻은 다른 데에 있었다.

안평이 데리고 가겠다는 화의군은 그의 이복동생으로 안평과 호흡이 맞는 걸물이다. 세종과 영빈 강씨사이에서 태어난 화의군은 내연의 여인을 남자 옷 입혀 궁에 들이려다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문책당하는 소동을 피웠고 조정 관리의 기생첩을 빼앗아 직첩이 회수되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의주나 평양은 머니 개성에서 영접함이 가합니다."

의정부에서 반대했다. 아니, 반대하는 척 했다. 예정된 수순이다. 조정은 수양이 없는 사이 물갈이 인사가 단행됐다. 우의정에 있던 김종서가 좌의정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자리에 정분이 앉았다. 병조판서 조극관, 공조판서 권맹손, 호조참판 박중림, 공조참판 민건, 이조참의 신석조, 호조참의 이수의, 예조참의 김황, 형조참의 이명겸, 판한성부사 조혜가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모두가 반 수양 전선이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임금을 감싸고 있는 승지도 안평 수하로 에워쌌다. 좌승지 박중손, 우승지 노숙동, 좌부승지 권준, 우부승지 권자공, 동부승지 최항이다.

발이 내려져 있는 임금의 자리. 김종서와 황보인이 3배수의 인물에 노란 표를 붙여 발 마래로 올리면 임금은 낙점하여 내려 보냈다.
▲ 왕좌 발이 내려져 있는 임금의 자리. 김종서와 황보인이 3배수의 인물에 노란 표를 붙여 발 마래로 올리면 임금은 낙점하여 내려 보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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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천거권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있다. 그 중에서 이조 전랑(銓郞)의 권한은 막강했다. 전랑은 정랑과 좌랑을 아우르는 말이다. 정랑은 정5품으로 품계는 낮으나 정승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삼사(三司) 관원 중에서 특출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들의 임명과 면직은 이조판서도 간여하지 못했다.

현재 임금이 어리다. 판단력이 미약할 것이라는 예단 아래 황보인과 김종서가 상의하여 3인의 후보명단을 올렸다. 그 중 하나에 노란 표를 붙였다. 황표정사(黃標政事)다. 임금은 그것을 낙점할 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인에게 관직을 제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라면 할 뿐이었다. 황표정사의 폐해다.

이러한 폐단의 과실을 사신 떠나기 전 수양도 향유했고 안평도 만끽했다. 벼슬 하나 얻어 보려고 수양대군 사저와 안평대군 사저는 팔도의 내방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봉물은 차고 넘쳤고 미어터졌다. 수양이 없는 사이 안평과 김종서로 쏠림 현상이 도드라졌고 극에 달한 것이다.

"이미 엄자치를 보내어 수양대군을 의주에서 영접해 위로하게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또 안평대군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태종조와 세종조에는 왕자가 영접사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환관 엄자치를 의주에 보내 수양을 영접하게 하고 안평을 평양에 파견하려 하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반대했다. 수양을 추종하는 세력이 포진한 대간(臺諫)이 안평의 복심(腹心)을 읽은 것이다.

"안평대군에게 영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으니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이 가세했다. 삼정승의 엄호다.

"대간의 청이 두 번이나 있었으니 따르소서."
한확과 허후가 대간의 청을 거들었다.

"이미 길을 떠났으니 다시 돌아오게 하기는 어렵다."
임금이 김종서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안평 진영의 승리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한 수양은 유쾌하지 않았다. 사신을 영접하러 의주에 간다고 잔뜩 바람을 잡은 안평은 보이지 않고 해괴한 소문만 나돌았다. 수양이 안평에게 편간을 보냈다.

"네가 평양에 닿았다 하니 빨리 만나고 싶다. 박천강 강상에 와서 기다려라."
박천강에 유람선을 띄워 놓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한량스러운 아우에게 풍류를 주문한 것이다. 박천강은 평양에서 의주 가는 길목에 있는 청천강 지류다. 적유령산맥 대단층곡을 지나 묘향산맥의 구릉성산지를 흘러온 강은 청천강 유역의 3분지2를 차지하는 큰 강이다.

평양기생 소향이는 천하절색이었다

평양에는 안평이 총애하는 기생 소향이가 있는 곳이다. 수양대군을 영접한다는 구실로 한성을 떠난 안평은 자신을 따르는 지지층에게 통이 큰 대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내면적으로는 소향이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쾌락 삼매경에 빠진 것이다.

평양을 떠나 순안에 이른 안평이 말에서 떨어졌다. 많이 다쳤는지 아픈 척 하는지 본인만 알 수 있다. 종자 하석을 보내 답서를 전했다.

"말에서 떨어져 가지 못하겠습니다."

"한양을 떠난 지 4일 만에 평양에 도착하여 기생을 끼고 세월을 허송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 또 몸이 다쳤다고 핑계를 대니 어찌 형제의 정이 있다 하겠느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순안에서 만났다. 서먹했다. 수양은 불쾌한 낯빛이었고 안평은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말에서 떨어져 고통의 그림자였는지 그것은 안평만 알 수 있는 개인적인 비밀이었다. 수양과 안평은 형제지만 정다운 얘기는 없었다. 삭막했다. 짧은 해후, 긴 이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는 이 때 이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수양은 한성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고 안평은 부상을 이유로 평양에 눌러 앉았다. 안평대군이 평안도 관찰사 정이한을 불렀다.

"피양 감사도 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소리가 있지요?"

목소리를 나직이 깔았으나 위협을 내포하고 있었다. 안평이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며 평안도 관찰사를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뎅겅' 날려버릴 수 있다는 눈빛이다.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정이한이 두 손을 비볐다. 춥다. 온몸에 추위가 엄습해왔다. 어떻게 딴 평양감사 자리인가? 이렇게 좋은 자리도 순간에 날아갈 수 있다니 온몸이 떨려왔다. 세종 14년(143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 정이한은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관료세계의 명암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뛰어나도 윗선에 줄을 대지 못하면 만년 변방직에 머물고 실력자에 붙으면 출세가도를 달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세종 17년(1435)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그는 황보인에 붙어 평양감사에 올랐다. 이제 안평대군의 줄을 잡았으니 놓치지 않으면 판서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잠자코 있으면 됩니까?"
안평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천하 명품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안평의 수염이 바람에 휘날렸다.

"녜, 녜, 지가 써 올리겠습니다."
정이한이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여봐라. 지필묵 어디 있느냐?"
잔뜩 움츠러든 정이한이 엉뚱하게 하인들에게 큰소리 쳤다. 하인이 붓과 먹을 대령했다.

"안평대군께서 수양대군을 영접하러 가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몹시 다쳤습니다. 가마를 타고 본 감영에 돌아와 의원을 부르고 약을 복용하며 조섭한 지 15일 만에 기체가 조금 호전되어 수양대군과 만났습니다. 그러나 쾌차하지 않아 수양대군과 함께 한성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정도면 됐소이다. 하 하 하"

안평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평안도 관찰사 정이한이 작성한 장계가 급주마를 타고 한성으로 출발했다.

 대동강 을밀대 아래에 있는 부벽루 현판. 탁 트인 대동강변에 있는 부벽루는 조선 전기에는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사대부들로부터 외면 받았으나 개방된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조선 후기부터 각광을 받았다.
▲ 부벽루 대동강 을밀대 아래에 있는 부벽루 현판. 탁 트인 대동강변에 있는 부벽루는 조선 전기에는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사대부들로부터 외면 받았으나 개방된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조선 후기부터 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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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도사(都事) 조충손을 불렀다. 말에서 떨어졌을 때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준 사람이다. 관찰사가 지방관아의 행정을 총괄하는 대장이라면 도사는 판관, 중군과 함께 보좌관이다. 하지만 이방, 호방, 병방과 같이 향리(鄕吏)가 아니라 엄연한 중앙 관료다. 도성에서 온 귀한 분을 잘 모시면 한양길이 가까워진다.

"도사 눈에는 이 몸이 환자로 보이오?"
안평의 눈빛 장난스럽게 빛났다.

"아, 아닙니다요. 천만의 말씀입니다요."

"그럼, 수양 형님도 떠났고 파발도 떠났는데 이렇게 허송세월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안평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닙니다요."

평양에 눌러앉은 안평은 환자가 아니었다. 도사 조충손과 매일 잔치를 벌였다. 평양 도사가 좋다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지방 관직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조정에 출사했으면 정승판서의 반열에 들어야 한다. 승차하려는 도사 주(主)와 풍류를 좋아하는 안평대군 객(客)의 죽이 맞는 것이다. 평양이 어떤 곳인가. 색향(色鄕)이다. 천하절색 미인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다. 풍월루(風月樓)에 등촉이 꺼질 날이 없었다.

부벽루는 조선 후기 한량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월루는 당시 평양의 명소였다. 부벽루가 대동강변에 공개된 장소라면 영선점 옛터에 지은 풍월루는 은밀한 곳이다. 기생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다. 안평이 연회를 베풀며 누(樓) 아래 못(池)에서 유람선을 타고 삼배탕을 즐기다 배가 뒤집어 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안평대군을 연모하는 기생이 한양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앙탈을 부리며 깍지 낀 손으로 끌어안고 죽으려 했다."

다행히 연못이 얕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백성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안평이 평양에서 잔치에 밤이 새고 날이 갈 때 평양감사가 발송한 장계가 한성에 도착했다. 장계를 받아든 임금이 삼정승에게 보였다.

"의춘군과 내의(內醫)를 보내서 조호하게 함이 옳습니다."
안평대군의 아들 의춘군 이우직에게 어의를 붙여 보내자는 것이다. 임금이 전지를 내렸다.

"관찰사의 장계를 보고 놀랐다. 의춘군과 내의 김지에게 명하여 약을 내려 보내니 안심하고 몸조리하여 기력이 회복되거든 돌아오도록 하라."

임금의 전지를 받은 안평이 한양에 장계를 올렸다.

"귀경길에 해주 온천에서 목욕 하고 갈까 합니다. 말에서 떨어졌을 때 도사 조충손이 마음을 다하여 구료하여 주어 나를 온전히 살도록 하였으니 가자하여 주소서."

안평이 평양을 떠나면서 조충손에게 시 한수를  남겼다.

"형제의 의(義)를 맹세하노니 앞으로 서로 기약하여 세월을 지켜 나가세."


태그:#수양대군, #신숙주, #부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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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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