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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정문이다
▲ 오문 자금성의 정문이다
ⓒ 임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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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도착했다. 천자가 있는 황성에 입성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문물이 모이는 세상의 중심 중원(中原)이다. 사은사 일행은 옥화관에 여장을 풀었다. 명나라 예부가 사신들을 위해 마련한 객사다. 노독에 지친 수행원들은 잠에 떨어졌다. 하지만 수양은 잠이 오지 않았다.

"신집의! 자는가?"
"아닙니다.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수차례 다녀간 자네도 그러할 진데 나는 어떻겠나?"
"황송하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가 황제가 계시는 북경이지?"
"네, 그렇습니다."
"이곳이 언제부터 황도(皇都)였나?"
"영락제부터입니다."
"영락제라면 조카를 몰아내고 황위에 오른 성조가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성조는 황위에 오르기 전 연왕으로 이곳에 있었잖은가?"
"남경에서 봉기하여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께서 넷째 아들 주체(朱棣)에게 연경을 할양하고 연왕에 봉했습니다. 형제들과 불화가 심한 아들을 격리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북방의 적을 방어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겨냥했군."
"두 마리는 몰라도 한 마리는 확실하게 잡았습니다. 국력이 쇠한 원나라의 잔존세력과 연왕이 붙으면 연전연승했습니다. 이것이 남경을 편안하게 하기도 했지만 정정불안의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홍무제는 맏아들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황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의문태자 말이군."
"그렇습니다. 황제는 태자의 아들 주윤문을 황태손에 책봉하고 붕어했습니다. 이 때 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렇겠군."
"혜제(惠帝)가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으나 황자징과 방효유가 정치를 농단하고 연경에 있는 연왕을 견제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연왕이 군사를 일으켜 남경을 공격하여 3년여의 전투 끝에 남경을 함락시켰습니다. 중원을 평정한 연왕이 황제에 오르고 도읍지를 연경으로 옮기며 명칭도 북경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이지?"
"지금으로 부터 49년 전 일입니다."
"그때 어린 황제의 나이는?"
"열여섯이었습니다."
"으음!"

수양의 뇌리에 열한 살 나이어린 조카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던 수양은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김승규와 황보석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었다. 북경의 밤은 수양에게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구름위에 노니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임충구
▲ 옥 계단 구름위에 노니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임충구
ⓒ 임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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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신숙주는 역관을 대동하고 예부를 방문했다. 황도(皇都)에 왔다고 황제를 금방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제후국 사신들이 대기하고 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하여 일정을 잡아야 한다.

드디어 황제 알현 날이 잡혔다. 역관과 서장관을 대동한 수양이 황궁으로 향했다. 예부 관리의 안내로 오문을 지나 봉천문을 통과 하니 어마어마하게 큰 전각이 나타났다. 봉천전이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열배는 더 커 보이는 궁전이었다. 국경검문소 책문에서 군기를 잡더니만 궁궐 덩치로 완전 기죽였다.

가운데에 두 마리 용이 구름에서 노니는 옥 조각이 있고 좌우에 황옥(黃玉) 계단이 있다. 오로지 황제만이 오르내릴 수 있는 황계(皇階)다. 그 좌우로 계단이 있다. 외국 사신들과 신하들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다. 모두가 백옥이다.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없다. 얼마를 올랐을까? 숨을 헐떡이며 한참을 오르자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돌조각이 있고 합문이 나타났다. 안내하던 예부 관리가 멈추라고 지시했다. 수양이 멈췄다. 대기하고 있던 통례가 그 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라고 명령했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 수양이 돌 위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먼발치에 있는 황제는 보이지도 않고 볼 염두도 못 내었다. 쳐다본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황공하옵니다."
"고명을 받겠다는 조선 임금은 몇 살인고?"
"열 한 살입니다."
"그대는 임금과 어떤 사이인가?"
"숙부 되옵니다."
"잘 보필하도록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오가는 말은 통역과 예부관원 2명의 입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알현이 끝났다. 불과 5분 정도다. 이렇게 인사드리기 위하여 3300리 머나먼 길을 1개월에 걸쳐서 왔다니 허탈했다. 감회도 잠시, 다른 나라 사신이 기다리고 있다. 빨리 물러나야 한다. 평소 조선국 단독 배알이면 화개전에서 알현을 받았다. 허나, 오늘은 몇 개 나라의 사신 배알이 예정돼 있다. 때문에 황제가 정전에서 사신을 맞이한 것이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정전이다
▲ 근정전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정전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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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객사로 돌아온 수양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에 힘이 없었다. 수양이 신숙주를 불렀다.

"황궁의 규모가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지만 모양은 우리의 경복궁을 닮았던데 우리가 모방한 건가?"

모든 전각이 정전을 중심으로 남면하고 있는 자금성은 조선의 경복궁과 너무나 닮았다. 당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경복궁은 광화문을 지나 흥례문과 근정문을 통과하면 정전(正殿) 근정전이 나온다. 자금성 역시 승천문을 지나 오문과 봉천문을 통과하면 봉천전이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로 화개전과 근신전이 있다. 경복궁은 천추전과 만춘전이 있다. 북쪽 문 신무문은 아예 이름마저 같다.

"정도전이 태조의 명을 받아 경복궁을 짓기 시작한 것이 홍무28(1395)년입니다. 그 이듬해 궁전을 완공하고 9월 15일 왕궁을 개성에서 경복궁으로 옮겼습니다. 영락제가 황제에 올라 황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긴 것이 영락4년(1406)입니다. 그로부터 14년간 연 인원 일백만 명을 투입하여 지은 것이 자금성입니다."
"우리 조선이 11년이나 빠르군. 그렇다면 자금성이 경복궁을 모방했단 말인가?"

대국이 소국을 흉내 내다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연도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누가 누구를 모방했다'기보다 '군주는 남면하여 신하의 조하를 받는다'는 성리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보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결코 잊으시면 안 될 중요한 대목은 경복궁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자금성을 흉내 내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셔도 별 무리는 없으실 것입니다."

신숙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나라가 작아 사대하되 자존심을 지키라는 것이다.

황제의 자리다
▲ 황좌 황제의 자리다
ⓒ 임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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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의 용안은 볼 수 없었으나 갸날픈 옥음으로 미루어 보아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 같던데…."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니?"
"황제 폐하의 부황이신 선덕제가 승하하고 형 정통제가 즉위했습니다."
"선덕제의 적장자이시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정통제가 황제의 위(位)에 있을 때 북방에서 오이라이트족이 침공해왔습니다. 몽고의 한 부족이지요. 이에 분노한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되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토목의 변(土木之變) 말인가?"
"그렇습니다. 당황한 조정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황제의 생사를 알 수 없었습니다. 조정의 의견은 죽었다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한시도 비워서는 아니 되는 황제의 자리가 궐위되니 온 나라가 뒤숭숭했습니다. 조정 중신들이 지혜를 모아 내린 결론이 이복동생 주기옥의 등극이었습니다."
"현재의 황제 경태제 말이군."
"아우가 20일 만에 전격적으로 등극하고 형의 행불사태는 백성들로부터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는데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형이 살아있고 형을 포로로 잡고 있는 오이라이트족에서 협상을 요구해왔습니다. 재물을 많이 주면 풀어주겠다고."
"난감한 문제가 발생했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우 친위세력으로 개편된 조정은 형의 석방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돌아오면 평지풍파를 일으키니까."
"그러겠지."
"내심 큰 재물을 기대했던 오이라이트족은 실망했고 급기야 형을 무상으로 풀어줄 것이라고 현 황제를 위협했습니다."
"고민 되겠군."
"그래도 명나라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오이라이트에서 형을 석방해버렸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서 명나라 조정이나 혼란에 빠트려보자는 계략이었습니다."
"상황이 어렵게 됐군."
"폐하는 돌아온 형을 태상황으로 올리고 남궁에 유폐시켰습니다. 하지만 조정은 형 정통제를 지지하는 세력과 현 황제 경태제를 옹위하는 파로 갈려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더욱이 돌아온 형의 심복 석형이 황제의 재등극을 노려 모종의 일을 꾸민다는 소문이 황성에 파다하니 좌불안석일 것 입니다."

수양은 명나라 조정을 꿰뚫어보고 있는 신숙주의 정보력에 놀랐다. 그건 하루아침에 쌓은 탑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인간관계라 여겨졌다. 수양은 틈틈이 신숙주를 대동하고 국자감에 나가 명나라의 학자들과 교유했다. 특히 한림학사 황찬을 만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는 명나라 권부의 조선통이었다.

덧붙이는 글 | 자금성은 명나라 멸망 당시 ‘이자성의 난’으로 무영전을 남기고 대부분 불타버렸습니다. 명나라를 궤멸시킨 청나라는 도읍지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순치 연간에 자금성 중건을 시작하였으며 봉천문은 태화문으로, 봉천전은 태화전으로, 화개전은 중화전으로, 근신전은 보화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하여, 본 소설의 시대적 배경의 사실성을 살려 옛 명칭을 적용했습니다.



태그:#수양대군, #신숙주, #경태제, #영락제,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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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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