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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을 보시면 '안경사랑'이라고 어머니가 안경을 자주 맞추시던 곳이 있어요. 지금 우리 사무총장님(박계현 전태일 재단 사무총장) 쓰고 계시는 안경도 여기서 어머니가 맞춰주셨어요. 어머니는 혼자 뭘 가지지 못하세요. 저기 오른편 골목으로 가시면 어머니께 누룽지 자주 주시던 식당도 있고."

5일 오후, 고 이소선씨의 '양아들' 오도엽 시인이 마이크를 들고 '어머니'가 생전에 살던 서울 창신동 구석구석에 얽힌 추억을 설명했다. 그 뒤를 200여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고 따라 걸었다. 창신동에는 전태일 재단 사무실이 있다.

"저기 종로약국, 어머님이 약을 하루에 세 줄씩 사드셨어요. 그 위에 있는 병원에서는 혈압진단 받으시고. 창신시장에 가면 리어카 갖고 와서 야쿠르트 파시는 분이 계세요. 어머니가 요플레를 좋아하셨어요. 다른 건 안 드시고 복숭아 맛만 드셨어요." 

"바보였던 나, 어머니 만나면서 당당하고 떳떳해져"

5일 오후 '어머니의 길 걷기' 행사에서 시민들이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 놓여있는 고 이소선씨의 영정에 헌화를 하고있다.
 5일 오후 '어머니의 길 걷기' 행사에서 시민들이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 놓여있는 고 이소선씨의 영정에 헌화를 하고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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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어머니였던 고 이소선씨가 세상을 떠난 지 이틀째, '이소선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소선씨의 생전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는 '어머니의 길 걷기' 행사를 마련했다.

시작은 아들이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동대문 평화공장이었다. 41년 전, 이소선씨의 첫째 아들 전태일은 이곳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마이크를 들고 연설하는 어머니의 영정사진은 '전태일 다리'에 세워진 아들의 동상 앞에 놓였다. 이 모습을 본 한 참가자는 "41년 만에 아들 곁으로 가시는구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전태일 동상 앞에 선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신순애씨는 목이 메여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신씨는 "지금 까만 상복을 입고 있지만 아직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정 못하겠다"면서 "늘 가족처럼 의지하고 한 평생을 살았는데, 지난 7월 18일에 쓰러지셨을 때도 반드시 일어나실 거라 믿었다"며 안타까워했다.

5일 오후, 동대문 평화시장 입구.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이었던 이숙희씨가 전태일 열사와 고 이소선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5일 오후, 동대문 평화시장 입구.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이었던 이숙희씨가 전태일 열사와 고 이소선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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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봄, 저기 보이는 삼양사 3층공장에서 시다를 시작했어요. 제일 힘들었던 게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으면 절반도 안 먹었는데 밥에 시커먼 먼지가 쌓였어요. 그런데 저는 그 밥도 감사했어요. 기술 열심히 해서 미싱사 기술자가 되면... 그때 제일 높은 빌딩이 삼일빌딩이었거든요. 그 삼일빌딩도 살 수 있는 줄 알았어요. 눈앞에 미싱판만 보면서 옆에 있는 친구가 쓰러져도 일했어요. 그렇게 바보였던 제가 전태일 열사,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면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게 됐어요."

이숙희씨가 "저쪽 끝에 있는 창문 두 개 보이시나요, 저기가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이었어요"라며 말을 이었다. 이씨는 "노조를 만들고 어머니를 만나면서 저희들에게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어머니는 저희가 싸울 때 마다 기도해주셨고, 저희가 잡혀갈 때면 모두 자신이 시켜서 한 일이라며 '나를 잡아가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이제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그 정신은 저희들 마음속에 살아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이소선씨가 지난 40여 년간 집회 현장에서 수백 번은 불렀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창신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계현 사무총장이 맨 앞에서 영정을 들었다. 그 뒤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정의헌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따랐다. 창신동을 돌아본 참가자들은 불이 꺼진 어머니의 집 앞에서 촛불을 들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다.

이어 이소선씨가 20여 년을 먹고, 자고, 투쟁했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실을 방문한 이들은 서울대병원까지 행진해 어머니를 조문했다. 이소선씨의 장례식은 오는 7일 치러진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박계현, #유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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