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9월이 시작되는 1일 오전 10시 30분. 안흥면(강원 횡성) 종합복지센터 강당에 40여 명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굳은 표정들에서 심상찮은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행사의식은 생략되었고 조남국 번영회장이 모임의 취지를 소개했다.

 

"우리 면에 강원도 최대 규모 돼지농장이 있는 사실은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농장에 구제역이 발생해 3만7천 마리를 매몰 처리했습니다. 지하수는 물론 하천과 토양오염 위험, 숨을 쉬지 못할 정도의 악취로 주민들이 겪는 고초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요지는 이랬다. 이 농장이 7월 초쯤 돼지를 재입식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런 대책 없이 재입식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 지난 4월 주민 결의대회를 갖고 재입식 반대 현수막을 게시하는 등 반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농장 측이 직접 주민들에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 이날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농장대표 김아무개씨가 긴장된 표정으로 준비된 좌석에 앉았다. 과거 십수 년간 축산폐수 무단방류, 분뇨 불법처리 등 행위가 적발돼 대표 본인의 인신구속을 비롯, 수차례 법적조치를 받은 바 있는 터라 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화살처럼 그에게 집중됐다.

 

"방류수질 개선으로 현재 아무런 문제가 없고, 갑작스런 기계고장으로 정화되지 않는 분뇨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비시설을 충분히 확보했으며, 냄새의 원인인 퇴비장은 조속히 이전토록…."

 

돼지를 재입식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예상된 설명이다. 한 술 더 떠서 입식 일정을 친절히 소개한다. 10월 중순 목표량의 약 20%인 모돈 200두 정도를 입식할 예정이며, 3~4년 걸려야 과거의 규모만큼 충족할 수 있다는 것.

 

참석자들의 표정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여기저기 탄식 섞인 웅성거림이 확산된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온 듯 어수선한 장내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농장대표는 준비한 발언을 이어갔다. 농장의 향후 진로에 대한 설명이다.

 

"가능하면 양돈부분을 줄이고 지역 여건에 맞는 다른 사업으로 전환을 하는 것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실버타운 조성이라든가 웰빙 먹거리 사업 등등을 놓고 전문기관에 의뢰해 타당성을 검토 중입니다. 주민들과 함께 상생하는 사업을 찾아보겠습니다."

 

일면 귀가 솔깃한 이야기다. 당초 주민대표들이 횡성군수와의 면담을 통해 재입식 반대 주장을 펴면서 대안으로 요구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돼지 재입식 계획의 구체성에 비해 막연하고 앞뒤도 맞지 않는, 급히 동원된 것임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차분하기로 정평이 난 김미경 면 부녀회장이 무선마이크도 채 건네받지 않은 채 일갈한다.

 

"지금 사탕발림 하려 이 자리에 나오셨나요? 앞에선 재입식 장기계획을 내세우고 뒤에 가서 슬쩍 사업전환 검토라니,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사업전환 의지가 있다면 지금 당장 재 입식 포기하고 앞에 거론하신 실버사업, 웰빙 먹거리 사업 시작하겠다고 하세요. 정직하게 이해를 구해도 안 될 판에 면민 전체를 우롱하다니…."

 

가슴이 벌렁거려 더 이상 말을 못하겠다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김미경 부녀회장의 뒤를 이어 봇물처럼 비난이 터져 나왔다. 특히 이 농장의 그간의 비양심적 행태를 지켜보았던 지역 원로들이 작심하고 나섰다.

 

"또 다시 돼지 똥물을 함부로 흘려보낸 것이 드러나면 즉시 농장 문 닫겠다고 약속했어, 안했 어! 그러고도 몇 번이나 못된 짓을 해 안흥 면민에게 똥물을 먹인 자가 어디서 감히 말장난을 하고 있어! 무릎을 꿇고 백배 사죄해도 용서가 안 될 판에…!"

 

급기야 자리를 마련한 번영회로 불똥이 튀었다. 자리를 만든 의도가 뭐냐는 것에서부터 진정성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농장 측에 왜 구구한 설명 기회를 주었느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농장이 소재한 마을에서 기부금을 받기로 하고 재입식을 반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해당 마을 이장에게 질타가 이어졌다.

 

마을 이장 박 아무개씨는 "농장측이 재 입식을 방해할 경우 소송을 거쳐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수차례 찾아와 으름장을 놓은 데다, 바쁜 농사철에 접어들면서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점차 시들해져 마을에 조금이나마 이익이 되는 방법을 택해 합의했다"며, "그렇지만 실제 돈을 받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농장 대표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방금 전 "수년 전부터 마을회관 건립에 힘을 보태달라는 요청이 있어 왔는데 이번에 조금이나마 협조하게 된 것"이라며, 재 입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마을 이장과는 상반된 해명을 늘어놓았던 터였다.

 

더 이상 농장 대표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농장 대표를 내보내고 난 후 자연스레 향후 대책에 대한 토론이 전개됐다. 일부 원로들이 주민 간 갈등을 우려하며 분위기를 진정시킨 후이다. 결론은 돼지 재 입식 결사반대였다.

 

농장 측의 태도나 인식이 구제역 발생 이전에 비해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입식이 이루어지고, 수만 두에 이르는 돼지가 밀집 사육되어 또다시 구제역과 같은 질병이 발생할 경우 안흥면은 대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는 불안감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다.

 

문제는 어떻게 재 입식을 저지하느냐는 것. 결국 합법적으로 주민의사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대규모 주민 결의대회를 재 입식 전인 9월 20일경 개최키로 의견을 모았다. 3천 안흥면민이 횡성군청 앞에 모여 한 목소리로 재 입식 반대와 농장폐쇄를 주장하자는 것이다. 조남국 번영회장이 결연한 의지를 천명했고, 16개리를 대표해 참석한 이장, 새마을지도자, 노인회장, 부녀회장들이 만장일치로 호응했다.

 

지난 7월, 안흥면 주요 단체장들이 농장대표를 면담한 적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농장 대표에게 구체적인 제안을 했었다. 말뿐이 아닌 진정성과 구체성이 인정될 만한 대안을 준비해 안흥면민 앞에 나오라는 당부와 함께 최근 대규모 축산농장들이 시행하고 있는 농장단위 해썹(HACCP,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을 도입하라는 것.

 

한 축산 전문지에 보도된 기사, "국내 해썹 도입 농장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질병발생 위험이 60% 이상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의 기준을 충족시킨다면 재입식을 반대할 명분이 대부분 사라진다는 점도 덧붙였다.

 

1일 농장 대표 김아무개씨의 그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가 축산업 허가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개정 축산법에 새로 반영해 축산업자의 자격기준으로 삼은 '기본소양'이 그에게는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태그:#돼지 재입식, #구제역, #축산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