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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미씨 입양당시
 유은미씨 입양당시
ⓒ 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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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해외입양의 역사는 한국전쟁 후 연평균 250여 명의 아동으로 시작되었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기에는 주요수출산업으로 외화벌이에 단단한 효자노릇을 하였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절정기인 1985년에는 해외입양아 숫자가 8837명으로 증가하면서 해외입양 단연 세계1위 국가임을 전 세계에 통계숫자로 선포하였다.

해외입양은 한국이 미국달러를 획득하는 비인도적 수단이자 사회복지비용을 쓰지 않는 지름길이었다. 아니 외화획득 1위가 아예 해외에 아이들 입양 보내고 받는 수수료이었던 적도 있었다. 이런 우리나라를 자랑스러운 나라라고 부르기는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사회복지의 역사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우리나라가 최근에 와서 '과잉복지' 운운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을 뿐더러 사실이 아니다. 한국은 과잉복지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사회복지를 제대로 펼친 적이 별로 없는 부끄러운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현재 20만 명의 해외입양인 중 한 해 약 4000여 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해외입양인들은 자신이 왜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났음에도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기와는 생김새와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타국에서 살아야 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며 고통 속에서 자랐다. 그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서 비로소 왜 자기가 해외로 입양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친부모를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한다. 기자가 만난 프랑스 입양인 유은미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다음은 지난 8월 30일 '뿌리의 집'에서 27년 만에 처음 모국을 찾은 프랑스 입양인 유은미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친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고 싶다"

2011년 유은미씨의 모습
 2011년 유은미씨의 모습
ⓒ 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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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로 입양 간 것은 몇 년도 인가? 입양 간 경위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달라?
"나는 5살 때 프랑스로 입양되었고 그때는 1984년 7월 4일이었다. 내 프랑스인 양부모는 당시 많은 한국의 해외입양 후보자 아이들 사진 중에서 나를 골랐고 내 얼굴이 좋아서 나를 입양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 한국이나 한국인과 관련하여 어린 시절 기억나는 것이 있나?
"기록에 의하면 나는 1979년 5월 15일 태어났다. 나의 어린 시절 한국에 대해 기억나는 것 한 가지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아이들이 내 주변에 누워서 함께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고아원 시설이었던 것 같다. 그 다음은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아마도 입양) 한국승무원이 맛있는 음식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 친부모나 형제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전혀 없다."  

- 입양아로 자라면서 겪은 가장 어렵고 힘든 경험은 무엇이었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한 인간으로서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친부모의 얼굴과 모습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다. 또 어려웠던 경험은 내가 정체성 문제로 한참 고민할 때 내 양부모님은 그런 나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다. 혼자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 문제인 존재 문제를 고민하고 극복해 나가는 일은 너무나 외롭고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 프랑스에서 입양아로서의 생활은 어땠나? 주요 사건이나 특히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면  말해 달라?
"나는 12살부터 21살 때까지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내 기분은 항상 우울했고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 슬퍼보였다. 당시 나는 친부모에 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또 왜 내가 해외로 입양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도 나는 항상 이방인처럼 느꼈다. 나는 다른 프랑스 급우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정신 상태를 갖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양부모님은 어떤 분들인가? 친부모나 은미씨 입양과 관련해 어떤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나?
"양부모님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셨다. 양부모님은 내가 충분히 성숙하다고 느꼈을 때 내 입양이야기를 다 해주셨고 내 입양관련 서류를 다 보여 주셨다. 내 양부모님에 따르면 내가 18개월 되었을 때인 1981년 4월 2일 나는 전라북도 군산시내 길가인지 아니면 군산의 모세아동보호소 앞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아직 아무도 내 뿌리에 대해 이 이상 알지 못한다. 아마 내 친부모님이 군산에 사셨건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 후 4살 때인 1984년 3월 30일 나는 서울에 있는 홀트아동복지회로 옮겨졌다. 그 후 1984년 7월 4일 프랑스로 해외입양 되었다."

유은미씨 입양당시
 유은미씨 입양당시
ⓒ 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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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은미라는 한국이름과 생년월일은 기록에 그렇게 되어있나?
"이번 한국에 와서 나는 홀트를 방문했다. 홀트 담당자는 유은미가 내 실제이름 같다고 했다. 내가 발견되었을 당시인 1981년 4월 2일 나는 18~20개월 이었단다. 보통 18~20개월 된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있고 그래서 아마 내가 당시 사회복지사에게 한국말로 내 이름을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 한국에 지난 8월 20일 왔는데 방문목적이 무엇인가?
"홀트에 있는 내 기록을 보러왔다. 그래서 내 친부모님의 이름, 주소 등을 알아보고자 왔다. 그리고 1981년 4월 2일 당시 내가 발견된 군산시를 방문하여 경찰서와 시청의 공무원들을 만나서 나의 뿌리를 추적할 것이다. 나는 이번 방문을 통해 친부모님을 꼭 찾고 싶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모른 채 사는 것은 너무나도 큰 고통이며 깊은 공허감을 느끼게 한다. 친부모님을 만나게 된다면 제가 그 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고 싶다. 입양 이유에 상관없이 나는 양육을 포기하신 내 친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 1984년 한국을 떠나고 지난 8월 20일 27년 만에 처음 모국을 방문했다, 감회를 말해 달라?
"내 집에 돌아온 것처럼 기분이 좋다. 내가 한국인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분이고 흥분을 느낀다. 나는 비록 법적으로는 프랑스인이지만 나는 지금도 프랑스에서 이방인처럼 느끼고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프랑스에서 거리를 지날 때면 어떤 프랑스인들은 지금도 나를 흘끔 쳐다본다, 비록 27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나는 내가 한국인처럼 느꼈고 뜻은 알 수 없지만 한국어의 소리가 불어보다 더욱 내 귀에 친숙한 기분이다. 불어에 비해서 한국어는 더 말이 빠르고 더 큰소리로 들리는 것 같은데 뜻은 몰라도 한국어가 나에게 착 달라붙은 느낌이다."

- 한국정부의 해외입양정책과 관련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있다. 한국정부는 비혼모들이나 한 가족이 자기의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키울 수 있도록 사회복지와 정부지원을 늘리고 도와주어야 한다. 아이가 친가족이나 친모와 살 때 그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정부의 존재 이유는 국민들에게 행복한 삶을 제공해주는 데 있다고 믿는다.

또 '내가 친부모님을 찾을 수 있도록 꼭 도와주세요'라고 한국인들에게 부탁드린다. 친부모님을 찾을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혹시 이 기사를 보시고 나를 알아보시는 분이 있으면 '뿌리의 집'(3210-2451)으로 연락 주시길 간절히 요청 드린다."


태그:#유은미, #해외입양, #김성수, #외화벌이,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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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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