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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랄로, 뜨거운 난로가 아닙니다

그건 분명 티라노사우루스의 뼈였습니다. 누르스름한 육수에 몽둥이 같이 생긴 뼈 하나가 담겨져 나왔습니다. 필리핀에 있으면서 더운 날씨에 기력이 떨어질 때쯤 찾게 되는 불랄로 식당에 가면 '공룡뼈 요리'를 드실 수 있습니다.

불랄로는 필리핀식 도가니탕 또는 갈비탕입니다. 소 다리뼈(내가 티라노사우루스의 것이라 부르는 부분)와 소머리 등을 넣고 푹 끓여 만듭니다. 다른 지역에선 감자나 배추를 함께 넣기도 하지만, 일로일로에서는 순수 소고기 부속품만 넣어 끓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뼛국물이 우러난 보양식이라 해도 덜렁 몽둥이 뼈 하나가 나오는 불랄로는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오래 끓여서 진한 고깃국 맛이 나는데 얼큰하고 짭조름하면서 시큼한 것이 엄청난 양의 소금과 식초가 들어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극히 주관적인 추측입니다. 며느리도 모르는 것이 국물 맛의 비밀이라지 않습니까?)

한손으로 몽둥이 뼈를 들고 뼈에 붙어 있는 쫀득쫀득한 콜라겐 덩어리를 뜯어 먹습니다. 나무꼬챙이를 이용해 뼈 속의 연골도 빼 먹습니다. 어떨 땐 운이 좋아(?) 국물에 소 혓바닥이 나오는 날이면 정말 쓰러집니다. 불랄로를 먹고 오는 날이면 소 한 마리를 먹은 듯 속이 든든합니다. 한가지 더, 한국인이라면 불랄로의 효력을 '지대로' 느끼기 위해서 깍두기를 챙겨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랄로는 필리핀식 도가니탕 되시겠습니다. 약간의 육수와 함께 몽둥이 같은 소뼈 하나가 담겨져 나옵니다.
 불랄로는 필리핀식 도가니탕 되시겠습니다. 약간의 육수와 함께 몽둥이 같은 소뼈 하나가 담겨져 나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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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누룽지는 못 먹는 음식

부슬부슬 설익은 쌀밥을 수북이 담고 짭조름한 생선이나 닭고기 한 조각과 함께 먹는 것이 필리핀 사람들의 일반 식사입니다. 필리핀쌀은 길쭉하게 생긴 안남미라서 밥을 하면 찰진 맛은 없습니다. 많이 먹어도 돌아서면 금방 배가 꺼지구요. 필리핀 사람들도 풀풀 날아다니는 밥이 먹기 힘든지 그릇에 밥을 꼭꼭 눌러 담아 다진 후 뒤집어서 접시에 놓고 먹습니다.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땐 한국식품점에서 중국쌀을 사다 먹었습니다. 하지만 밥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고, 쌀밥을 좋아하는 개미조차 덤비지 않으니 불길한 기운이 엄습합니다. 심지어 '중국쌀에는 절대 쉬지 않을 정도로 방부제를 부었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으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는 필리핀 쌀과 찹쌀을 섞어 보았습니다. 3:1의 비율이 최적의 비율입니다. 일단 현지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으니 신선도에서 마음이 놓입니다. 필리핀 쌀값은 kg당 30페소에서 130페소까지 천차만별입니다. 필리핀 쌀값이 싸다고 하지만 한국쌀과 맛이 비슷한 130페소 짜리 쌀이라면 10kg이 33,000원, 한국보다 비쌉니다.

필리핀 쌀은 길쭉한 안남미라서 밥을 하면 찰진 맛은 없습니다. 많이 먹어도 돌아서면 금방 배가 꺼집니다. 보통 시장에서 파는 쌀은 킬로그램당 33페소 정도, 10kg에 한국 돈 만원이 안되지요. 압력밥솥이 온 후 우리 식구는 필리핀 직원들과 같은 쌀을 먹습니다. 보통 킬로그램당 50페소짜리를 사는데 한 달에 50kg 짜리 두 자루, 8만원을 지출합니다.
 필리핀 쌀은 길쭉한 안남미라서 밥을 하면 찰진 맛은 없습니다. 많이 먹어도 돌아서면 금방 배가 꺼집니다. 보통 시장에서 파는 쌀은 킬로그램당 33페소 정도, 10kg에 한국 돈 만원이 안되지요. 압력밥솥이 온 후 우리 식구는 필리핀 직원들과 같은 쌀을 먹습니다. 보통 킬로그램당 50페소짜리를 사는데 한 달에 50kg 짜리 두 자루, 8만원을 지출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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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냄비에 밥을 하고 쌀이 부르르 끓어오르면 바로 솥뚜껑을 열어버리기 때문에(가스를 아끼기 위해서랍니다) 누룽지가 3센티미터 두께로 나옵니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헬퍼라고 부릅니다)에게 냄비에 밥하는 법을 가르쳤지만, 가스불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키지 않은 날이면 어김없이 냄비 한가득 누룽지가 나옵니다.

게다가 필리핀 사람들은 왜 누룽지를 먹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얀 쌀밥만 홀랑 먹고 누룽지는 개밥이 됩니다. 누룽지를 튀겨서 설탕을 뿌려 먹여도 보았지만 맛있게 먹는 것도 잠시, 다음날 또 누룽지를 버립니다. 비싼 쌀을 개밥으로 줄 수는 없습니다. 필리핀 사람들, 쌀이 부족해서 엄청난 양을 수입한다면서 왜 이렇게 잘 버리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 이것도 문화의 차이'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집 헬퍼도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가끔씩 누룽지에 물을 부어 끓여줍니다. 물론 자신은 밥솥 가운데 흰 쌀밥만 파서 먹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유학 온 부부가 주고 간 국산 압력밥솥이 생겼습니다. 이 물건 한마디로 '매직'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더 이상 130페소짜리 비싼 쌀도 필요 없습니다. 50페소짜리 쌀도 기름기 좔좔 흐르는 밥으로 변신하니 비싼 쌀값 걱정도, 누룽지를 버리는 도우미를 째려볼 필요도 없습니다. 필리핀 생활 10년 만에 이룬 쾌거입니다.

단, 이 '어메이징'한 국산 압력 밥솥에 지은 '마법' 같은 밥도 식으면 마법이 풀려 '풀풀~' 날아가 버리니, 반드시 식기 전에 먹어야 합니다.

단골 깐틴(작은 구멍가게) 아줌마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징어 아도보와 빤싯이 보입니다. 깔끔하고 맛도 좋은 집입니다.
 단골 깐틴(작은 구멍가게) 아줌마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징어 아도보와 빤싯이 보입니다. 깔끔하고 맛도 좋은 집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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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식 돼지갈비찜, 최곱니다

밥은 한국식 찰밥을 고수하지만 반찬은 필리핀 식이 맛있습니다. 필리핀식 갈비찜, 아도보는 돼지고기나 닭고기에 간장, 식초, 마늘, 설탕 등으로 양념을 한 후 물을 붓고 푹 졸여 만듭니다. 돼지고기를 넣으면 포크 아도보, 닭고기를 넣으면 치킨 아도보가 됩니다. 닭 아도보는 한국의 찜닭과 비슷하고, 돼지고기 아도보는 한국의 돼지갈비찜과 거의 같은 맛입니다. 오랜 시간 은근한 불에 조리기 때문에 고기가 질기지 않고 부드럽고 식초가 들어있어서인지 새콤한 맛이 좋습니다.

고기가 부담스러운 날에는 깡콩 아도보를 먹으면 됩니다. '깡콩' '강꽁' '깐콩?' 처음 들을 때는 필리핀식 콩깍지 요리인 줄 알았습니다. 깡콩은 우리나라 시금치나 미나리 같은 흔한 야채라서 시장에서 한 묶음에 10페소에 살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정육점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노점에서 판매합니다. 그날 잡아 당일 모두 판매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합니다.
 필리핀의 정육점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노점에서 판매합니다. 그날 잡아 당일 모두 판매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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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정육점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노점에서 판매합니다. 주인이 ‘유령얼굴’이라며 보여줍니다.
 필리핀의 정육점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노점에서 판매합니다. 주인이 ‘유령얼굴’이라며 보여줍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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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책길에 동네 습지에서 아저씨가 무언가를 열심히 뜯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 깡콩?"
"어, 깡콩."
"이거 살 수 있어요?"
"따갈따갈~~~"
"하우 머치?"
"따갈따갈~~따갈~"
"마까노?(얼마예요?)"
"따갈~따아갈~~"

이 아저씨 습지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새벽부터 웬 '습지에서 프러포즈?' 영어를 못 알아듣는 아저씨와 필리핀 말을 못 알아듣는 한국여자 사이를 구경하던 '영어 좀 하는' 할머니가 오시지 않았더라면 멍청한 대화는 계속 되었을 겁니다.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아저씨가 '여기 들어와서 너 필요한 만큼 뜯어가라'고 했답니다.

공짜, 우리나라 같으면 누군가 왕창 뜯어 시장에 내다 팔았고 하루 만에 초토화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동네 습지의 깡콩은 마을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반찬에 쓰일 깡콩은 동네 습지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준비합니다. 모두 필요한 만큼만 뜯어가고, 깡콩도 잘 자라기 때문에 우리 마을의 깡콩밭은 언제나 초록빛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습지에서 깡콩을 따고 있는 '말은 안통하지만 친절한' 아저씨입니다. 깡콩은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 전지역에서 많이 먹는 야채인데 깡콩은 필리핀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영어로는 Water Spinash 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 동네 습지에서 깡콩을 따고 있는 '말은 안통하지만 친절한' 아저씨입니다. 깡콩은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 전지역에서 많이 먹는 야채인데 깡콩은 필리핀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영어로는 Water Spinash 라고 한다고 합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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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보 이외에도 필리핀에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많이 있습니다. 빤싯(볶은 국수)은 고기와 야채, 또는 해산물을 넣고 볶은 것으로 한국의 잡채와 비슷합니다. 면의 굵기나 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입맛에 잘 맞습니다.

필리핀 해장국, 시니강

"퉤, 이게 뭐야? 국이 쉬었어."

시니강을 처음 먹던 날, 삼키기는커녕 숨도 쉬기 어려웠습니다. 시니강은 국이나 찌개에 해당하는데 주 재료에 따라 돼지고기 시니강, 새우 시니강(산다라박도 좋아한답니다), 생선 시니강(주로 방우스라는 생선을 넣습니다) 등이 있습니다.

술 먹은 다음 날 한국 사람들이 콩나물 해장국을 찾듯이 필리핀사람들은 시원하고 개운한 맛으로 시니강을 찾습니다. 시니강을 잘 먹으면 '필리핀 음식 좀 먹는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끔씩 시큼한 시니강이 생각나 초급 필리피노, 시니강으로 해장할 정도면 거의 필리피노 된 겁니다.

방우스를 넣은 시니강. 시큼하고 시원한 맛이 해장국으로 그만입니다. 개인적으론 새우 시니강이 더 낫습니다.
 방우스를 넣은 시니강. 시큼하고 시원한 맛이 해장국으로 그만입니다. 개인적으론 새우 시니강이 더 낫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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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직원들이 제일 좋아하는 생선 투요(Tuyo). 소금을 듬뿍 뿌린 생선을 햇빛에 바짝 말린 것입니다. 기름에 튀겨서 먹는데 냄새가 10년 안 씻은 발냄새입니다. 너무 짜기 때문에 손가락 크기만 한 투요 하나로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먹을 수 있습니다. 아직은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제발 내가 있을 때는 튀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뿐입니다.
 우리 직원들이 제일 좋아하는 생선 투요(Tuyo). 소금을 듬뿍 뿌린 생선을 햇빛에 바짝 말린 것입니다. 기름에 튀겨서 먹는데 냄새가 10년 안 씻은 발냄새입니다. 너무 짜기 때문에 손가락 크기만 한 투요 하나로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먹을 수 있습니다. 아직은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제발 내가 있을 때는 튀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뿐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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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필리핀 정착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태그:#필리핀, #아도보, #깡콩, #시니강, #불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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