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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 폭포를 찾은 7월의 마지막 날, 나는 마침내 완전한 유랑인으로 거듭났다. 인디애나에서부터 들짐승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단 이틀 만에 짐승의 피가 거의 최고조에 이르렀다. 한번 리듬을 타면 거칠 게 없이 뻗어나가는 스타일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채 10km도 떨어지지 않은 초대형 슈퍼마켓, 월마트의 건물 벽을 따라 난 시멘트 길 바닥에 자리를 폈다.

행색은 누가 봐도 홈리스다. 소매 없는 윗도리는 뒤집어 입어, 솔기가 다 드러난 상태였다. 그렇잖아도 평소 중구난방 삐죽삐죽 솟아있는 머리카락은 며칠째 감지 않은 탓에 떡이 돼 있었다. 팬티도 몇 날을 같은 걸로 입고 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팬티든, 소매 없는 윗도리든 몇 차례 뒤집어 입은 것만은 확실하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와 미국 국경에 위치해 있는데, 캐나다 쪽의 폭포가 훨씬 웅장하고 아름답다.
▲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와 미국 국경에 위치해 있는데, 캐나다 쪽의 폭포가 훨씬 웅장하고 아름답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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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입고, 이튿날 뒤집어 다시 입고, 또 뒤집기를 해서 입는다. 하루쯤 볕이 좋은날이 중간에 있다면, 말려 입을 수도 있다. 절은 땀 냄새가 전신에서 떠나지 않는다. 몸 냄새는 대체로 퀴퀴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전통 발효 식품처럼 은근히 당기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밑창이 갈라진 가죽 샌들을 들락거려야 하는 발 냄새는 내가 생각해도 참아 줄 수가 없다. 그래도 맡다 보면 "나름의 향취가 있을 거야"하고 코를 몇 차례 갔다 대 봤지만, 머리가 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였다. 그래서 가능한 월마트 벽에 몸을 기댈 때, 발은 코에서 멀게 쭉 뻗었다. 영락없는 노숙자요, 부랑인이다. 다만 'I am hungry. Help me'류의 문구가 쓰여 있는, 미국 홈리스들의 '영업용 간판'만 내 자리 앞에 없었을 뿐이다. 적선해달라는 표식이 차지해야 할 자리에 대신 나는 낡은 랩톱 컴퓨터를 앉혀 놨다.

나의 차람새, 노숙자와 다름없네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는 동안, 내 앞으로 수많은 발들이 지나간다. 물론 월마트를 들락거리는 손님들의 발이다. 가끔씩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 때마다, 나를 지켜보는 행인들의 시선과 마주치곤 한다. 동양인, 홈리스, 랩톱 컴퓨터의 3박자가 그들의 묘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그저 그들을 '소 닭 보듯'한다. 나는 '일상 인간'의 코스를 앞서 이수하고, 들짐승 스타일의 유랑자로 변한 몸이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는 안중에도 없다. 체면 같은 건 더더구나 없다. 한국인 망신은 다 시키고 있다고? 짐승에게 국적이 있을까.

고개를 들어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죽어라 자판을 두드려댄다. 나는 불행하게도,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으면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몸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계속된 종일 주행에 시간도 없고, 인터넷 연결도 되지 않아 애를 태웠다. 내겐 생존이 걸린 문제라 절박했다. 배 주린 들짐승들은 덫도, 사냥 총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 앞에 먹이를 두고서 많은 걸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인간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일 뿐,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아침을 굶고 나와,  8시간 동안 그렇게 컴퓨터를 붙잡고 씨름했다. 동쪽에서 떴던 해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컴퓨터 모니터가 햇빛을 반사하기 시작해 눈이 아팠다. 중간에 월마트 안으로 들어가 3달러 짜리 샌드위치를 사먹은 게 저녁해가 뉘엿뉘엿 할 때까지 이날 유일한 식사였다. 월마트 벽에 달린 전원 플러그에 코드를 꼽고, 거의 하루 종일 공짜 전기를 썼으니 그만큼은 팔아줘야 기본 양심은 하는 거였다.         
     
텐트가 새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려 침낭이 다 젖었다. 새벽에 수건을 이용해 물을 1시간 넘게 쉼없이 밖으로 짜내야 했다.
▲ 텐트 홍수 텐트가 새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려 침낭이 다 젖었다. 새벽에 수건을 이용해 물을 1시간 넘게 쉼없이 밖으로 짜내야 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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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트에서 내가 생존 투쟁을 하는 시간, '아들 셋'은 나이아가라 폭포와 그 주변 도시 기운에 모처럼 흠뻑 취해 있을 것이다. 아들 셋은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온 뒤로 도시와는 거리가 먼 환경에 놓여야 했다. 게다가 지난 일주일은 하루 10시간 안팎을 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이틀을 보낸 걸 제외하면, 눈 뜨면 먹고, 달리고, 또 먹고, 달리기만 한 시간이었다. 이중의 고역에 시달려야 했던 나날이었다. 낯선 곳에서 매일 밤 텐트를 치고 걷어야 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삼중의 고난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 오랜만에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과 물신이 지배하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발을 디뎠다.

아이들 또한 아침을 굶고 야영장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동했는데, 전혀 불만이 없어 보였다. 아침은 예기치 못한 새벽 폭우로 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2개의 텐트 가운데 내가 자는 텐트는 디자인 상의 결함 탓에 비가 많이 오면 방충망 부분을 타고 빗물이 텐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돼 있다. 새벽 다섯 시쯤이었을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 텐트 바닥의 사방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들 셋을 깨우기도 뭐해 수건으로 쉼 없이 물걸레질을 해댔다. 물을 수건으로 빨아 들인 뒤, 텐트 밖에서 짜내기를 반복하는 일이었다.

침낭은 일부가 젖었고, 전체적으로도 습기로 눅눅해졌다. 미친 듯이 수건으로 물 빨아내기를 한 시간쯤 계속했을 때, 다행히 비가 잦아들었다. 로키 산맥을 넘어온 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맑은 날이 며칠 없었다. 보스턴, 워싱턴, 뉴욕의 여정이 창창하게 남았는데 뭔가 예감이 불길하기 짝이 없다. 한국도 올 여름 수해로 난리라지만, 북미 같은 대륙 규모에서 물 벼락을 만나면 정말 대책이 없다. 게다가 우리는 4인조 집단 유랑인 아니던가. 유랑인이 추위보다 더 싫어하는 게 물 난리이다. 비에 젖어 숲 속을 방황하는 들짐승들이 달리 애처로운 게 아니다.    

원래 이날 아침은 일찍 깨워, 된장찌개라도 끓여서 우리식 아침을 준비하려 했는데 포기했다. 빗줄기는 가늘졌지만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있어 상을 차릴 게재가 아니었다. 대신 커다란 보드카 한 병을 다 비우고,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을 아이들을 좀 더 늦게까지 재우기로 했다. 오전 9시가 다 돼 비가 완전히 멎은 뒤 아이들을 깨웠다.

"얘들아, 일어나라. 나이아가라 폭포로 가자."

술 좋아하는 것만 빼놓으면 참 말 잘 듣는 아이들이다.

"오늘은 아침밥 없다. 지금 밥상을 차리면 결국 점심이 다 돼서야 폭포에 도착할 것이니 너무 늦다."

적은 비용으로 식사해결... "얘들아, 미안하다"

전날 저녁 한국식 식사를 예고한 탓에, 아침 식단을 기대했을 터인데 아들 셋 모두 실망스럽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이아가라 폭포 다리를 통해 캐나다에 건너갔다가 되돌아 온 윤의와 병모가 뉴욕 입성을 기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뉴욕 입성 나이아가라 폭포 다리를 통해 캐나다에 건너갔다가 되돌아 온 윤의와 병모가 뉴욕 입성을 기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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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이 나이아가라 폭포 세 번째 방문이다. 지난 두 번의 방문에서는 폭포를 둘러 보는데, 각각 1시간으로 족했다. 한데 아이들에게 저녁 때까지, 서너 시간도 아니고 하루 종일을 폭포 주변에서 보내라고 말하고 나니, 내팽개치는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일대는 반쯤은 슬럼화된 관광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나름 장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나이아가라 폭포 그 자체뿐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 있는 게 훨씬 웅장하다. 또 캐나다 쪽은 그나마 상가나 호텔 등이 깨끗한 편이다.

미국의 대부분 유명 도시 관광지들이 그렇듯, 도로가 복잡하고 주차료가 사정없이 비싸기는 나이아가라 폭포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아들 셋을 미국과 캐나다를 이어주는 폭포 옆 국경을 겸하는 다리 근처에 떨어뜨려 줬다.

"미안하다. 얘들아. 지난 일주일 동안 돈을 써보니, 예산이 예상보다 많이 드는구나. 오늘은 식사를 30달러 한도에서 해결해라."

나는 100달러 짜리 지폐를 쥐어주며, "70 달러 이상은 꼭 남겨야 한다"고 한차례 더 못을 박았다.

"예 고맙습니다. 이따가 저녁 때 뵐게요."

하루에 최소한 한두 차례, 직접적으로 혹은 은근하게 간접적으로 계속되는 돈 타령에 아이들도 적지 않게 내 눈치를 보는 듯 했다. 밝은 표정으로 돈을 받아 들고 폭포 쪽으로 향하는 애들의 모습을 자동차 거울을 통해 확인했다. 자괴감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참 쫀쫀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일하러 월마트로 달려간 것이었다.

"미안하다. 솔직히 좀 지루했지."

오후 6시가 조금 넘어 아이들을 내려줬던 나이아가라 폭포 다리 근처로 다시 차를 몰고 가서 아이들을 태웠다.

"아뇨 전혀요. 지금 우리들도 막 이 곳에 왔어요. 오늘 너무 좋았어요."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70달러를 꺼내 내게 주었다. 녀석들도 저녁 때까지 1인당 10달러 한끼로 하루를 버텼던 것이다. 나는 만 8시간 동안 오랜 만에 돈벌이를 했고, 아이들도 더 없이 좋았다니 이 날은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확실히 남는 장사를 했다.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나이애가라, #폭포, #침낭 , #침수, #월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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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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