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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씨는 네덜란드 해외입양인이다. 그녀는 10살 때인 지난 1979년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여동생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해외 입양되었다. 그러나 당시 1살 정도이던 어린 남동생은 국내 입양되었다.

그녀는 입양된 지 3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단지 자기가 어려서 10년의 세월을 보낸 나라에 대해 순전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안고 방문했다. 그러나 몇 주간 한국에 살면서 그녀는 1978년 이별한 남동생이 너무 그리워졌다. 그래서 늦게나마 32년 전 이별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진 남동생을 찾고 싶단다.

김영태씨는 당시 1살이 안 된 남동생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안 난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녀는 네덜란드 이름이 있지만 본 기자와의 인터뷰 중 김영태라는 한국이름만 사용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녀는 여동생 둘과 함께 해외입양되었지만 지금 그 두 여동생은 한국을 증오한단다. 자기들을 버린 나라가 한국이라서... 그러나 김영태씨는 말한다.

"한국은 나를 버렸지만 난 한국을 버릴 수가 없군요. 내 몸엔 한국인 피가 흐르고 있고 한국은 나의 뿌리입니다. 지금 한국 외교부에 한국국적 회복을 신청 중에 있습니다." 

김영태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내가 한국인인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수시로 달아올랐다. 다음은 지난 8월 7일 뿌리의집에서 김영태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트럭주차장에 살다가, 결국 입양됐어요"

2011년 당시 김영태씨
 2011년 당시 김영태씨
ⓒ 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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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태어났나? 10살에 해외입양 되었는데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에 관해 기억나는 대로 말해 달라?
"저는 1969년 4월 26일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10살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 고향은 의정부입니다. 우리 집은 큰 한옥이었습니다. 제가 6살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한강근처 고속도로와 큰 다리가 있는 곳으로 이사 간 기억이 납니다. 아빠와 낚시를 함께 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빠는 소주를 드셨고 제게 과자를 사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인가 1977년에 우리 동네에 불이 나서 우리 집도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 후 우리가족은 노숙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방랑했습니다. 아빠는 시골에 땅이 좀 있었지만 생계를 위해 조금씩 팔았습니다. 마지막에 팔 땅이 없자 우리가족은 트럭주차장 근처에서 살았고 나중에 결국 저는 해외입양되었습니다.

아빠는 병이 드시고 드러누우셨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 제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힘들어서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제가 7살 때 초등학교를 1년 반 정도 다녔습니다. 그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은 녹색과 진한 청색 교복을 입었습니다. 그 초등학교는 언덕위인가 산 옆에 있었습니다. 그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제 어려운 상황을 알고 계셨고 도와주셨습니다. 추운겨울에 그 선생님은 저희 가족을 위해 먹을 것과, 옷, 난방에 필요한 조개탄을 주셨습니다. 다시 그 교장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당시 교장선생님 나이는 35-40세 된 것 같습니다."

- 네덜란드로 입양은 언제 되었나?
"1979년 1월 19일 내 여동생 둘과 함께 한 집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저는 10살, 동생들은 6살과 3살이었습니다. 제 한국이름은 김영태, 동생들은 김순덕 김현태입니다."

- 친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나? 친아버지는 당시에 돌아가셨고 친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은 어디에 있을까?
빠 이름은 김종오씨로 1978년 당시 58세, 엄마는 손분월 당시 45세였습니다. 집안에 어려워서 엄마는 집을 몇 달간 떠났다 돌아오시곤 하셨습니다. 1978년 초 엄마는 다시 집을 또 나가셨고 그 후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막내 남동생과 두 여동생들을 돌봤습니다. 아빠도 많이 아프기 시작하셔서 제가 아빠도 돌봐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빠는 아이들만 있는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웃집에 가서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당시 따로 살던 고등학교에 다니던 오빠가 와서 아빠 장례를 함께 치렀습니다. 그 때 오빠는 노란단추에 검정색 교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오빠는 제 이복오빠였고 그래서 따로 살았습니다.

장례식에 교장선생님과 사모님도 오셔서 제 어린 남동생을 키워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교장선생님 내외는 자녀가 없었답니다. 저는 지금 그 남동생이 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면 꼭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뿌리의집의 도움으로 의정부에 32년 이상 된 초등학교에 문의했지만 알 수 가 없었습니다. 동생은 1977년인가 78년에 태어났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동생을 데려 가셨을 때 동생은 1살 정도 된 아기였습니다.

하여간 장례식 후 오빠는 우리를 서울에 있는 친척집으로 보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3일 있었습니다. 오빠는 우리에게 한복을 사 주었습니다. 친 엄마가 어디 계신지 지금도 살아 계신지 전혀 모릅니다. 친엄마가 살아계신다면 정말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당시 생활고로 돌아가셨다는 느낌이 듭니다."

- 네덜란드에서 인종간(transracial) 입양인으로서 즉 백인 양부모님 집에서 자라면서 겪은 어려움은 없었나.
"나이가 10살에 해외입양 되었기 때문에 저는 문화충격이 컸습니다. 제가 나고 자라던 나라에서 타국으로 쫓겨난 상실감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저는 그래서 성장한 아이들의 해외입양을 반대합니다. 제 뿌리가 잘려나간 느낌입니다. 제 양부모님은 친절한 분들이었고 저를 무척 사랑하시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 제가 10살까지 한국에서 성장하면서 겪은 충격이나 고통 등 제 삶과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도 너무나 모르셨습니다. 물론 저는 양부모님께 감사함을 느끼고 저를 키워 주신 것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이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때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1979년 1월 19일 입양되자마자 네덜란드 양부모님 집에서 제 생활파티를 하고 생일케이크를 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아빠가 돌아가신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친엄마도 보고 싶었고 오빠와 교장선생님댁에 가 있는 남동생도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우울증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기 때문에 괴로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이 물질적으로는 풍족했지만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저는 당시 낮선 나라로 입양되어 가고 싶지 않았고 고아원에서 몇 번 탈출도 시도했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들어서 해외입양 됐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네덜란드어를 배우기도 어려워서 말을 하면 아이들이 발음이 이상하다고 놀려댔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아 2년 동안 네덜란드어를 한 마디도 안 하고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세계의 문명국들, 해외입양을 하지 않습니다"

1979년 동생들과 입양전 좌측이 김영태씨
▲ 입양아 1979년 동생들과 입양전 좌측이 김영태씨
ⓒ 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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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부의 해외입양정책에 대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저는 한국의 해외입양정책을 아주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반대합니다. 한국인들은 지금 세계의 문명국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같은 한국 사람이 난 자녀들을 돌보지 않고 수출품처럼 해외에 보냅니다. 지금 아이들을 외국에 입양 보낸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들은 성장해서 저처럼 다시 한국에 돌아옵니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성숙한 사람은 부끄러움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 입양된 후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달라.
"우리 가족은 지금도 가깝게 지냅니다. 입양된 후 양어머님은 벤자민이라는 사내아이를 출산 하셨습니다. 동생 벤자민은 지금 180cm 정도의 키에 금발, 파란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종을 넘어 다정하게 지냅니다. 

사춘기에 저는 정체성문제로 발버둥을 쳤습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나를 거의 매일 생각했습니다. 18세에 이스라엘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고 그때부터 저는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신앙심이 있고 그 신앙심으로 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한국엔 몇 번 왔나? 한국에 온 느낌을 말해 달라?
"한국에 처음 온 것입니다. 제가 입양 된 후 32년 만에 처음입니다. 한국의 첫 인상의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첫 인상과 비슷합니다. 제 집처럼 느껴졌습니다. 32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습니다."

- 그동안 한국을 올 기회가 있었을 텐데 32년 동안 안 온 것인가 못 온 것인가?
"그동안 한국에 올 수 없었는데 이유는 양부모님이 제가 한국에 가고 싶어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한국에 오기 위해서 양어머니와 크게 싸웠습니다(양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양어머니는 "내가 너를 사랑으로 키웠는데 왜 한국에 가서 한국가족을 찾으려고 하니? 내가 뭘 서운하게 했니? 나를 배반하는 것 같다고 생각안하니?"라면서 한국행을 말렸습니다

저는, 여기서의 행복과 무관하게 제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제 뿌리는 한국이에요. 여기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리고 한국이 저를 버렸어도 저는 한국이 그립고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엄마는 저의 한국행 만류를 포기하셨고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막 울었습니다. 해외입양은 참 고통스런 경험입니다. 저는 모레 한국을 떠나지만 앞으로 한국을 더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한국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한국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김영태씨는 오는 11일 한국방문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김영태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02-3210-2451)으로 연락을 요청 드린다.


태그:#김현태, #김영태, 네덜란드, 의정부, 김종오, 손분월, #김성수, #입양, #해외입양, #뿌리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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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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