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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수목드라마 <공주의 남자>.
 KBS 수목드라마 <공주의 남자>.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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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트렌디 사극, 퓨전 사극이 대세였다. 카메라는 궁궐을 빠져나와 저잣거리를 비추고, 주인공들은 칙칙한 관복 대신 형형색색의 최신 유행(?) 한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으며 자태를 뽐냈다. 사료에 바탕을 둔 꼼꼼한 고증은 잠시 접어두고 대신 그 자리엔 작가의 상상력과 재해석이 날개를 폈다. 입은 옷은 한복이고 배경은 조선시대였으되 인물들의 대사 톤과 연기는 현대극의 그것이었다.

KBS 수목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시작 전부터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표방했다. 몬테규와 카퓰렛 가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원수지간인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자식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공주의 남자>는 설명대로라면 장르상 마땅히 로맨스 사극으로 불려야 했다.

그러나 뚜껑을 연 <공주의 남자>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춘 로맨스 사극이 아니었다. 계유정난이라는 다소 무거운 역사적 사건이 배경이 되어, 왕위를 지키려는 김종서와 그것을 빼앗으려는 수양대군 간의 치열한 정치적 다툼이 주된 한 축으로 드라마를 이끌고 있었다. 로맨스 사극과 정통사극의 만남이었다.

허구와 역사적 사실의 조화로 현실감 얻은 <공주의 남자>

 <공주의 남자>는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사극이다.
 <공주의 남자>는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사극이다.
ⓒ KBS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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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의 핵심 이야기인 김승유(박시후 분)와 세령(문채원 분)의 러브스토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가 결혼한 이는 김종서의 아들이 아니었다. <공주의 남자>의 모티브가 된 것은 조선 후기 쓰인 <금계필담>이라는 민담집인데, 이 책에선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결국 <공주의 남자>는 민담집에 수록된 이야기를, 작가가 '손자'에서 '아들'로 고치는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역사와 유리돼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을 주지 않는 건 이것이 단순히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승유와 세령의 사랑이 계유정난이라는 엄연한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피 튀기는 전쟁 사이에서 꽃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설정은 흔한 것이지만 <공주의 남자>는 계유정난이라는 특수한 소재를 빌려와 그 흔하고 빤한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승유와 세령, 경혜공주(홍수현 분)와 정종(이민우 분), 그리고 신면(송중호 분). 이 다섯 남녀의 사랑은 서로 얽히고설켰지만 그것이 흔한 트렌디 드라마의 오각 관계처럼 비춰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사랑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덧대어졌기 때문이다.

승유와 세령은 서로 사랑하지만 그들 집안은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원수지간이다. 경혜공주가 승유와 결혼을 하려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가문이 수양대군으로부터 왕실을 지켜줄 유일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가문의 지위나 부귀영화의 차원이 아닌, 사극이기에 가능한 생사가 달린 이해관계가 로맨스와 결합했을 때, <공주의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그 어떤 로맨스 드라마도 갖지 못한 현실감을 얻는다.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향연

 경혜공주는 아버지 문종의 위중한 병세를 알고 정신을 차린다.
 경혜공주는 아버지 문종의 위중한 병세를 알고 정신을 차린다.
ⓒ KBS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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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의 가장 큰 장점은 버릴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역사가 있고, 행동에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악역이라도 명분이 있고 매력이 있어 공감이 가능하다. 또한 캐릭터가 평면적이지 않아 극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다.

수양대군(김영철 분)이 왕위를 찬탈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그 스스로가 본래 야심가이기도 했지만 주변 여건이 그렇게 몰아간 측면도 있다. 최초 그는 김종서에게 자신들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자식들이 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승유와 세령의 혼담을 청했다. 그러나 김종서가 혼담을 거절하고 왕의 편에 서서 자신을 압박하려 들자 수양대군은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음을 직감하고 칼을 빼든다.

지루한 강론보다 후원에서 꽃이나 다듬고 노는 게 더 좋았던 철부지 경혜공주는 아버지 문종(정동환 분)의 병세가 생각보다 심각한 걸 알고 나서 각성한다. 자신의 숙부이자 친동기처럼 지낸 세령의 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를 넘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혜공주는 승유와의 혼사를 서두르고,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님을 말하지만 승유와 세령 사이를 바라보며 흔들리는 눈빛에는 미묘한 감정이 담겨있다.

무골호인같이 허허 웃으며 다니기만 하던 정종은 경혜공주와 혼례를 치른 후 공주의 남편이자 왕실의 부마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가늠하며 얼굴에 웃음기를 빼고 진지해진다. 그리고 아버지 신숙주(이효정 분)의 야심을 알아차린 신면은 오랜 친구 승유의 집안과 자신의 집안이 돌아섰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도 승유만 바라보는 세령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남몰래 키워가며 서서히 캐릭터의 변화를 예고한다.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세령이 아쉽다

그러나 이렇게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고 힘차게 앞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정작 여주인공 세령의 캐릭터는 좀처럼 힘을 얻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벌써부터 <추노>의 '언년이'에 버금가는 민폐형 캐릭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모든 일의 원흉처럼 지목받는 세령은 승유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극 초반 보여줬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소멸해가고 있다.

엄밀히 말해 모든 일의 원흉은 수양대군과 김종서이지 세령이 아니다. 승유가 누명을 쓰고 하옥된 일의 원인은 언뜻 보면 세령이 공주 행세를 했기 때문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김종서가 수양대군과의 혼담을 깨고 문종을 선택했을 때부터 승유의 몰락은 예견돼 있던 일이다. 오히려 산속에서 한명회의 수하들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 세령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승유의 목숨이 어떻게 됐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강론을 시작할 때만 해도 스승인 승유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며 할 말 다 했을 정도로 당차고 주체적이었던 세령의 캐릭터가 승유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눈물 흘리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가는 것은 드라마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세령이 처음의 모습을 되찾지 못한다면 극이 전개될수록 승유를 비롯한 나머지 캐릭터들에 가해지는 부담이 커질 것이다.

로맨스 사극과 정치사극이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원활하게 돌아가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입체적이며, 출연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다시 사극이 활기를 되찾은 이 때, 정말 괜찮은 작품 하나 나왔다. 채널고정하시라.


#공주의남자#문채원#홍수현#이순재#박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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