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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퇴근길에 마중 나온 아내와 함께 집 앞 마트에 들렀다. 언제부터인가 책에서 수박만 보면 "이게 뭐야"를 연발하는 까꿍이에게 수박을 사주기 위한 발걸음이었지만, 마트에 들어가니 정작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파란 아오리였다.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는 파란 아오리.

내가 이 맘 때쯤 아오리만 보면 과하게 흥분하는 건 12년 전 군인의 신분으로서 접했던, 아오리에 얽힌 기억 때문이다.

파란 아오리의 추억
▲ 아오리 파란 아오리의 추억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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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그 해 여름

1999년 그 해 여름은 내 평생 가장 잊지 못할 시기로 기억된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맞는 여름이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호우로 인해 우리 부대 옆으로 흐르던 임진강이 넘쳐 파주, 문산 지역을 휩쓸었던 바로 그 때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생생한 1999년 7월 31일 밤. 그때 난 위병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머지 않은 곳에서 빗소리도 아닌, 이상한 물소리가 났다. 점점 가까워지는 물소리. 그것은 바로 부대 옆을 흐르고 있던 임진강이 불어나 바로 발 밑에까지 도달한 소리였다. 놀란 나와 선임은 당장 상황실에다 '딸딸이'를 쳤고, 곧 위병소에서 철수해 막사 바로 앞에서 근무를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1년 전의 경험으로 보아 임진강은 순식간에 불어난다는 것이었다.

끔찍했던 당시
▲ 물에 잠긴 문산읍 끔찍했던 당시
ⓒ 파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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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안한 밤을 보내고 맞이한 다음날 아침. 내 눈 앞으로 황당한 풍경이 펼쳐졌다. 임진강이 불어 위병소는 물론이요 평소 강 수위보다 50m 족히 높은 지세에 있던 연병장까지 잠겨 있었던 것이다. TV를 틀었더니 부대에서 가장 가까운 읍내였던 문산은 이미 난리도 아니었다. 농협 2층 간판에까지 물이 차올라 사람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긴급대피 하고 있었고 소, 돼지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탄약고가 침수될 수도 있으니 그 안의 탄약을 모두 꺼내 차량에 실으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끊긴 전기와 가스, 수돗물.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불어난 임진강 때문에 부대 자체가 고립되었다는 점이었다. 민통선 밖의 연대나 사단에서 우리에게 식량을 공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주일 가깝게 고립된 군인들의 생활. 그것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우리는 매 끼니를 전투식량과 사발면으로 때웠으며, 설거지는 빗물에, 목욕은 계곡물에서 했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발가벗은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가 흙탕물인 계곡에서 샤워하는 모습이란. 게다가 밤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오후 8시 이후만 되면 취침 시간이었다. 고참들은 TV를 보지 못한다며 툴툴거렸지만, 항상 잠이 부족했던 일병 물호봉의 입장에선 그나마 잠을 푹 잘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홍수가 지나가고 난 뒤

어처구니 없었지만 나름 잊지 못할 기억이 된 1주일의 시간.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볼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밖으로 지원 나가야 했다. 문산읍내를 돌아다니며 수해로 피해 입은 민간인들을 도와야 했으며, 임진강변에 가서는 일렬로 줄을 선 뒤 지뢰 탐침봉(말이 탐침봉이지 그냥 쇠막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으로 물난리에 유실된 지뢰를 수색해야 했다.

물론 옆에서는 지뢰탐지병 박 상병이 금속탐지기를 이용하여 지뢰를 찾고 있었지만 그 넓은 지역을 꼼꼼하게 훑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니 지뢰에 대해 교육 한 번 받지 않은 군인들을 일렬로 세워 탐침봉으로 땅을 쑤셔가며 전진시키는 수밖에. 게다가 발목지뢰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금속탐지기에도 안 잡힌다지 않은가. 아마도 국방부는 민간인보다 차라리 군인이 다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혹여 사고라도 나면 덮으면 그만 아니던가.

정신 없었던 그해 여름
▲ 99년 여름 정신 없었던 그해 여름
ⓒ 파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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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수해 복구의 백미는 DMZ 내에 쓰러진 추진철책 다시 세우기였다. 당연히 공병들이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령부는 공병의 DMZ 출입증이 나오려면 행정적으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DMZ 내의 추진철책은 수색중대인 우리가 도맡아서 정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공병의 '공'자도 모르는 수색대원들에게 철조망을 세우라는, 그 말도 되지 않는 군인정신 같으니. 하지만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이 별 수 있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정말이지 철책을 다시 세우는 작업은 매우 힘들었다. 철책에 붙어있는 가시 철조망을 만지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GP와 GP 사이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 철책을 세우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홍수로 인한 유실로 DMZ 내의 지뢰 또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것 아닌가.

물론 혹여 있을지 모르는 지뢰폭발에 대비해 상부에서는 지뢰탐지복을 입으라고 했지만 탁상공론일 뿐이었다. 지뢰탐지복을 입고 뙤양볕에서 작업을 하면 근 50m도 못 가 퍼지기 일쑤였으며, 또 만약에 지뢰가 터지면 목숨은 건질 수 있어도 온 몸의 뼈가 부스러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들 평생 식물인간 비슷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며 지뢰탐지복을 벗어던지고 작업할 수밖에.

일병 휴가 가는 길

2주 간 계속된 수해복구. 그 지리한 시간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8월에 잡혀있던 일병휴가 때문이었다. 동기는 8월 첫째 주로 잡혀있던 휴가를 홍수 때문에 무기한 미룰 수밖에 없었지만 8월 셋째 주로 일병휴가를 계획했던 난 오직 그 날짜만을 바라보며 수해복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대 내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번 홍수로 인해 임진강을 건너는 다리 중 우리 부대가 사용하는 전진교가 일부 파손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다리가 복구될 때까지 휴가를 나갈 수 없다는 소문이었다. 이런 무슨 말도 안 되는. 전진교로 못 가면 통일대교나 리비교를 사용하면 될 것이지. 왜 군인들의 유일한 낙인 휴가를 통제한단 말인가.

소문을 듣고부터는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6월 백일휴가 때는 연평도 해전 때문에 간다 못간다 간을 졸였건만, 그 뒤로 두 달 뒤에는 홍수 때문에 또 이 마음 고생을 해야한단 말인가. 도대체 다리 떠내려 간 거와 군인들의 휴가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다행히 소문은 소문으로 그쳤고 난 드디어 8월 셋째 주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전진교가 떠내려갔기 때문에 휴가자를 실은 포차는 전진교가 아닌 통일대교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고참들은 입을 모아 주의를 주었다. 전진교의 헌병이야 대부분 일반 군인들만 상대하니까 왠만하면 태클을 걸지 않지만, 통일대교의 헌병들은 국군 뿐만 아니라 JSA, 민간인들까지 상대하니까 그만큼 긴장하고 꼬투리 잡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휴가 신고를 하고 포차에 올라 집에 가는 길. 통일대교가 가까워지자 두근두근 괜히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 다리만 넘으면 집에 가는데, 설마 헌병이 괜히 꼬투리 잡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이윽고 통일대교. 헌병이 차를 세웠다. 수색중대 완장을 보더니 더 꼼꼼하고 세밀하게 우리를 훑는 듯 했다. 고참들 말로는 헌병은 이등병, 일병들도 얕보이지 않기 위해 상병, 병장의 계급장을 단다고 했지만, 막상 헌병 앞에서 이것 저것 까다 보니 무조건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여기를 지나 집으로 가야 된다는 일념 하나!

그렇게 헌병 앞에서 주눅이 들어 일병, 이병 아저씨들한테도 반말을 붙이고 있는데, 그때 헌병대 병장 하나가 여유롭게 파란 아오리를 바삭 깨물면서 등장했다. 그는 뭘 그리 긴장하냐며 우리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는 듯 했는데, 정작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의 손에 든 아오리였다. 부대에서는 절대 먹을 수 없었던 아오리. 그래, 내가 저 아오리 하나를 먹자고 올 여름 그렇게 많은 땀을 흘렸던가.

너희가 아오리 맛을 알아?
▲ 아오리 먹는 까꿍이 너희가 아오리 맛을 알아?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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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름의 상징
▲ 그녀는 아오리를 사랑하게 될까요? 나의 여름의 상징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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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마자 내가 어머니께 부탁한 건 아오리였다. 어머니는 네가 언제부터 아오리를 좋아했느냐고 의아해 하셨지만, 난 아오리를 꼭 먹어야 했다. 아침에 보았던 헌병의 아오리가 끊임없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오리를 먹어야 휴가 나온 나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99년 8월 이후 그렇게 아오리는 나의 여름의 중요한 표상이 된 것이다.

8월의 통일대교, 뜨거운 태양 아래 K-1을 어깨에 매고 아오리를 먹던 그 헌병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자 여름이다.


태그:#아오리 ,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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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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