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 살된 우리 둘째 아이가 제 뒤를 따라오는 이모를 보며 으쓱합니다. "이게 내 이모야."
▲ 지현 세 살된 우리 둘째 아이가 제 뒤를 따라오는 이모를 보며 으쓱합니다. "이게 내 이모야."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오메, 애통 터지는 거~!"

엄마는 당황하며 절규했다. 셋째 딸은 첫째, 둘째와 확실히 달랐다. 반나절 내내 시계 보기를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했다. 함께 산 시할머니의 유훈을 지키며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던 애를 내복 차림으로 쫓아냈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만 살갗에 스쳐도 새파래지는 2월의 해질 녘, 셋째 딸 지현을 곧 '국민학교'에 '넣어야' 하는 엄마는 서른세 살이었다.

엄마의 절규는 애원으로 바뀌었다. 지현은 '국민학생'이 되고 나서는 내리 무단결석을 했다. 그 애는 거지들이 머물던 다리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비석 뒤에 숨어서 놀고 있었다. 엄마는 지현을 자전거 뒷좌석에 달려 있는 동빠(두꺼운 고무줄)로 묶어서 학교에 데려다 놓았다. 한참을 감시한 다음에 집으로 갔다.

지현은 학교가 재미없었다. 공부를 시킨다고 따라하는 것도 이상했다. 소풍이나 운동회 전날 겪는 설렘이 뭔지도 몰랐다. 학교 밖을 나서야 활기찼다. 지현과 그 친구들은 '메뚜기떼'였다. 먹을 게 없으면 김장독을 헐어 무김치라도 꺼내서 입에 달고 다녔다. 물김치를 담거나 다음 제사를 지내려고 숨겨둔 과일도 기막히게 찾아냈다. 엄마는 웃어버렸다.

"내 시째(지현의 아명), 또 찾아 먹었네이. 어쭈고 찾았을까이?"

고무줄에 묶여 학교에 가야 했던 개구쟁이 '지현'

멋모르던 때, 두 사람을 소개시켜 준 사람은 바로 접니다.^^
▲ 지현 부부 멋모르던 때, 두 사람을 소개시켜 준 사람은 바로 접니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우리 집은 산골이었다. 명절이 되어야만 새 옷을 입던 1980년대, 지현은 별 날도 아닌데 옷을 사내라고 하는 담대한 꼬마였다. 새로 산 노란 치마에 가짜 진주 목걸이를 하고서, 외가까지 거의 2시간을 팔랑팔랑 나는 듯 걸어간 적도 있다. 지금도 유일한 독서는 패션잡지. 가끔씩은 아주 '똥멍충이'처럼 옷을 입어버리는 나는, 지현에게 검증을 받아야 마음이 평온하다.

우리 자매는 청소년기에는 멀고 먼 사이였다. 친구들이 욕하는 '못돼 처먹은' 오빠처럼 군 게 나였다. 엄마는 이모가 있는 서울 봉제 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나는 지현이 차려준 밥을 먹었다. 지현이 싸주는 도시락을 먹었다. 손끝이 야무지고, 한 번 본 것은 그대로 따라할지라도, 중학교 2학년 애는 김밥용 김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몰랐다.

소풍 가서 도시락을 열었을 때에 나는 수치스러웠다. "너, 납부금 언제까지 낼래?"라고 독촉받은 것처럼. 지현이 '구운 김'으로 싼 김밥은 퍼져서 찌꺼기들 같았다. 그래도 나는 그 애 삶의 결을 보지 못했다. 지현의 번호는 18번, 매달 18일이면, 선생님들이 질문하는 게 싫어서 눈 뜨기 싫은 여자 아이. 대학과 취업 중 하나를 고르면, 삶이 확 달라져버리는 열아홉 살 지현의 괴로움도, 짐작 못했다.

자매 관계는 서로 체형이 비슷해질 무렵에 회복 되었다. 그때 우리는 스물넷, 스물여섯이었다. 조금 알고 지내는 사람의 부모님 장례식장에 간 지현은 충격을 먹었다. 상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절을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것보다 먼저 옷차림. 검은 정장은 생각도 못했다. 당장 쇼핑! 우리 자매는 서로 검은 옷을 돌려 입으며 연습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매 김밥은 예술이야." 한마디 했더니 새벽에 싸다 준 김밥입니다.
▲ 지현표 김밥 "자매 김밥은 예술이야." 한마디 했더니 새벽에 싸다 준 김밥입니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엄마, 나 한자 16점 맞은 사람이야"

지난주에 나는 대학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가야 했다. 지현은 새벽 5시에 일어나 김밥을 쌌다. 내가 "자매 김밥은 진짜 예술이야" 하고 지나치면서 얘기한 것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갈 때도 허투루 옷을 입지 않는 지현은 반바지에 티셔츠, 등산화를 끌고 우리 집에 왔다. 얼굴은 환했다.

"자매, 얼마나 좋은가?"
"어?"
"자매 혼자서만 아프잖아. 꽃얄리군 임신했을 때, 조산으로 누워있던 거를 생각해 봐. 자매 건강 문제로 자식이랑 안 엮인 게 천운이지. 치료하면 완치 확률이 완전 높다잖아."

아기 건강을 알 수 없는 채로 병원에서 지낸 두 달, 지현은 내게 "자매, 제굴(우리 큰아이) 걱정은 하지 마"라고 했다. 제굴도 "이모는 좋잖아요? 집에서 차 마시고, 컴퓨터 하고, 쇼핑 하고요"라며 지현의 삶을 동경하던 터였다. 퇴근이 일정하지 않은 남편과 지내는 것보다는, 지현네 집이 무조건 좋다 싶었다. 

술 한잔 마신 산부인과 의사 덕분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현. 그래서 새삼 모든 것이 고맙습니다.
▲ 지현 술 한잔 마신 산부인과 의사 덕분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현. 그래서 새삼 모든 것이 고맙습니다.
ⓒ 배지현

관련사진보기

지현의 조카 '모시고' 살기는 난관에 부딪혔다. 중간고사! 문제집을 푼 적 없는 제굴을 데리고 시험공부에 돌입! 초등학교 4학년 공부는 의외로 어려워서 망연자실! 평소에는 제부 퇴근시간에 맞추어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병원에 내 속옷이나 먹을거리를 챙겨 왔는데, 모르는 문제 때문에 일부러 콜택시를 타고 온 적도 있다.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으면서 말했다.

"자매, 진짜 됐어. 제굴은 태어나서 지금이 가장 '열공' 하는 거야."

조카 덕분에 지현은 일생 서먹했던 공부와 잠깐은 친근해졌다.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제굴이 한자에 눈 뜨던 여섯 살 무렵, 눈에 띄는 글자마다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 언젠가 법성포 불교 도래지에서, 친정 엄마가 안내 글을 읽으면서 지현에게 한자를 물을 때도 "엄마, 나 한자 16점 맞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던 지현이었다.

제굴에게는 얕은 지식을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패션잡지 말고, 처음으로 천자문 책 두 권을 신중하게 골랐다. '작심 3일'은 가벼워 보이므로 나흘 동안은 책이 까매지도록 봤다. 말로만 듣던 공부 피로를 실감, 일단 쉬기로 했던 늦공부. 내년이면 제굴이 중학생이 되는데도, 지현은 그때의 학습 노동의 피로가 생생해서 지금도 휴식 중이다.

술 한잔 한 산부인과 의사 덕분에 세상에 나오다

지현은 하마터면 이 세상에 없을 뻔했다. 1974년, 이십대 중반의 엄마 아빠는 경기도 성남에 살고 있었다. 첫 딸은 시골에 맡겨두고, 둘째 딸인 나만 데리고 있었다. 엄마는 졸도 직전까지 가는 입덧으로 괴로웠다. 이미 두 번의 경험으로 또 딸이라는 것을 직감! 며칠째 먹지 못해서 기운 없고 잠만 오는데도 고민은 치열했다. 결국 산부인과로.

쌍둥이냐고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가끔 신기합니다. 지현은 저보다 훨씬 표정이 풍부합니다.
▲ 자매 쌍둥이냐고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가끔 신기합니다. 지현은 저보다 훨씬 표정이 풍부합니다.
ⓒ 배지현

관련사진보기

"아주머니, 내일 오시면 어떨까요?"

의사는 낮에 술을 한잔 마셔서 낙태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일곱 달 뒤에 병원이 떠나갈 듯 우는 우량아를 낳았다. 분만실 밖에 있던 아빠는 아들이라고 확신했지만 엄마 예감대로 딸이었다. 속상한 아빠는 첫딸, 작은 딸 때와는 다르게 셋째 딸은 기저귀도 갈아주지 않고, 분유도 안 타줬다.

지현은 아기 때 받은 냉대를 황홀한 복수로 갚아버렸다. 이른바 "터를 판" 것이다(지현의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증조할머니는 지현에게 보답했다. 산골 동네에서 보기 드물던, 헤비급 몸매의 증손녀를 물고 빨고 핥으며 업고 다녔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도, 집과 동네, 장터와 친정 갈 때의 차림새가 모두 달랐던, 당신의 패션 철학을 물려주었다.

시할머니 시집살이를 해서인지, 신산한 고생바가지 인생이어서인지, 엄마는 조금 비뚤어진 구석이 있었다. 산골에서 면소재지로 이사 올 때에 키우던 개를 친척집에 두고 왔다. 열 살짜리 지현은 왕복 4시간을 걸어서 '메리'를 데려왔다. 엄마는 다음 날, 우리 집은 좁고 마당이 없다고 '메리'를 옆집에 팔았다. 그런데 옆집 아저씨는 '메리'를 잡아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현은 집 뒤 공터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죽어 있는 오랜 벗을 보았다.

생각해 보면, 지현은 늘 개나 고양이와 함께 있었다. 갓 생산된 막내 동생 똥을 막 먹어치운 '메리'와 스스럼 없이 뽀뽀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토방 밑에 기어든 고양이들을 안방 아랫목 이불 속에 들여놓아서 식구들을 소스라치게 만드는 애였다. '메리'와 가장 아픈 방식으로 헤어진 지현은 상처를 받았지만, 독을 키우며 엄마나 아빠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안 이쁜 줄 모르고 키웠씨야"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도 차림새에 신경 썼던 증조할머니의 패션 철학을 물려받은 지현. 저는 가끔씩 '똥멍충이'처럼 옷을 입기 때문에 지현의 지도 편달을 받습니다.^^
▲ 지현의 옷장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도 차림새에 신경 썼던 증조할머니의 패션 철학을 물려받은 지현. 저는 가끔씩 '똥멍충이'처럼 옷을 입기 때문에 지현의 지도 편달을 받습니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지금 우리는 걸어서 3분 거리에 살고 있다. 거의 날마다 만나고, 일주일에 두 번쯤은 붙어 다닌다. 우리 동네 은행 창구 직원은 몇 년 동안이나 나와 지현을 헷갈려 했다. 쌍둥이냐고 물으면 그런 척한 적도 있다. 엄마가 "안 이쁜 줄 모르고 키웠씨야"라고 말하는 우리는, 대체로 깔깔거린다. 하지만 가끔씩은 지난 얘기를 하며 울컥한다.

우리 딸들과는 완전 다르게, 엄마는 타고난 식성이 야성적이라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를 키울 때는 통닭을 시켜도 당신은 한 조각을 먹지 않았다. 도시락에 빵도 만들어주고, '짜장밥'도 해 주었다. 세련미를 추구한 도시락이었다. 마당에서 콩 타작을 하면 콧구멍까지 새까매지는데, 동네 엄마 누구도 우리 엄마처럼, 새끼들이 먼지 먹으면 안 된다고 토방에다 이불을 둘러치진 않았다.

지금 우리보다 훨씬 젊었던 엄마, 배운 것 없이 오직 육체노동으로만 생계를 꾸린 엄마를 생각하면서 연민에 빠진다. 특히, 지현은 엄마 일에 "내가 이만큼 했다"라고 내세운 적이 없다. 엄마도 그걸 안다. 그래서 셋째 딸 앞에서는 자연인 '조금자'의 본색을 가장 많이 드러낸다. 필요한 것이 옷이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내 시째! 아따 더워갖고이, 저번에 사준 케이투 샤쓰 말고는 입을 수가 없네이. 미안시럽제만, 딱 고것 같은 것으로 한나(하나) 사보내소이."

덧붙이는 글 | 지현의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고마워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태그:#지현 생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