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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에 이른 휴가를 냈다. 작년에 돌아가신 엄마의 첫 번째 기일을 준비해야 했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군대에 간 남자친구와 남동생이 같은 날 휴가를 나오기 때문이었다. 마침 바쁜 일은 다 마무리해놓은 터라 부담 없이 쉬기로 했다.

 

 

1주일간의 휴가가 끝나고 7월 7일, 회사에 돌아왔다. 그리고 항상 켜놓는 메신저로 메시지가 왔다. 선배 기자였다.

 

"잘 쉬었어?"

"네. 별일 없었죠?"

"회사 분위기 안 좋아. 어제 안 주간님(안영민 편집주간) 집 압수수색 당했어…."

"헐…."

 

내가 맘 편하게 쉬는 동안, 한국대학교육연구소'만' 걱정하는 사이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관련기사 : "34시간 압수수색에 아버지 집은 쑥대밭"). 그 뒤로 꾸준히 회사 내에 불안감이 조성됐다. 아무렇지 않게 "난 괜찮아. 허허허" 하시던 안 주간님이 15일 국정원에 조사를 받으러 가셨는데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야근하느라 밤새 사무실에 있었는데 안 주간님 댁에서 "연락이 하루 종일 되지 않아서요…"라는 근심 가득한 전화가 오기도 했다.

 

다행히 다음 날 "집에 무사 귀환했다"는 안 주간님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선배들은 혹시라도 내가 걱정할까 봐 많은 말을 숨기는 눈치였지만, 안 주간님과 안재구 박사님(안영민 편집주간의 부친)을 '털어도' 증거가 나오지 않자 수사를 <민족21> 사무실 전면으로 확대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터였다.

 

나를 털어 봤자 나오는 것은 빈 과자봉지와 굴러다니는 맥주 캔, 화장품 포장 박스 정도일 것이다. 수사당국에 꼬투리가 잡힐 만한 단서는 내게 절대로 없다. '강성' 운동권도 아니었던 내가, 평소에 철딱서니 없이 구는 내가 처음 접하는 일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것이라 선배들은 생각했겠지만 사실 나는 별로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3년간 <민족21>에 몸담으면서, MB정권 하에서 무분별하게 압수수색 당한 이들의 인터뷰는 거의 내 차지였다.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로 미뤄봤을 때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사실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안 주간님한테서 나온 증거가 없다고 하니 수사를 그만두려나 보다 하고 긴장을 풀어놨다. 그날 괜히 밤새 앓았다. 25일,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에 가려고 선배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 아침에 병원 갔다가 출근할게요."

"얼른 들어와. 나 지금 전라도 간다…."

"왜요?"

"국장님 인터뷰 대신 가는 길이야. 어제 사무실하고 국장님(정용일 편집국장) 집 털렸어…."

"헐…."

 

"빨치산들은 혁명을 위해 결혼도 안 했다던데..."

 

출근해서 국장님께 "안녕하세요"라고 밝게 인사했고, 국장님은 한숨 쉬며 "안녕 못해…"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상황의 심각함이 잘 와닿지 않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국장님이 사용하신 취재수첩 9개, 녹음파일, 외장 하드 등 취재에 사용했던 모든 집기들을 가져갔다고 한다. 게다가 수사관 중 한 명이 국장님께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지금까지 결혼을 안 했어요?"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겁니다. 그게 참 때를 놓쳐서 그런가 봅니다."

"정 국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빨치산들은 조국과 혁명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던데요?"

"엥? 장가 못 간 것도 서러운데 무신 그런…."

 

말이 안 나오는 답답한 상황이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결혼을 안 하면 '혁명'이고 결혼을 하면 '위장'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올해 안에 국장님 장가 보내려고 결의한 후배 기자들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 됐다.

 

한 가지의 죄가 있을 때 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 중 죄의 유무를 밝혀야 할 사람은 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죄가 없다는 증거를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모순이다. 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간 압수해간 여러 증거물들 중에서 '혐의'를 확신할 만할 것을 분명히 찾아낼 것이다. 없다면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그간 이 정권을 겪으며 느낀 점 중 하나였다(자꾸 '죄'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마음이 되게 불편하다. 지은 죄가 있어야 '죄'가 있네 마네 할 것 아닌가).

 

구구절절 자세한 사항은 <민족21> 8월호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2001년 4월 창간 이래 본지 기자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고 총련 인사들과 접촉하고 방북취재를 해왔으며 정부의 '승인' 하에 <조선신보> <통일신보>와 기사를 교류해 왔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접촉 기준이 강화돼 방북취재를 보장하는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과의 직간접적인 모든 접촉을 일일이 사전, 사후에 신고해야 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 통일부의 가이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심지어 모든 마감이 끝나고 잡지가 인쇄되던 시기에 "특정 사진을 게재할 수 없다"는 통일부의 연락이 갑자기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통일부 지시에 따라 인쇄를 중단하고 기사를 수정해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2009년, 8년간 꾸준히 해온 방북취재는 모두 불허되고, <조선신보> <통일신보>와의 기사 교류도 전면 중단됐다. 북에서 오는 기사라야 "사시사철 푸른 금강산의 절경" "북의 살림집 탐방" 등 매우 생활적이고 소소한 내용이었다. 만일 사전 신고 없이 민화협이나 총련 측에서 전화가 왔다면? 통일부의 대답은 황당했다.

 

"전화가 와서 받았을 때 대답은 하지 마세요."

 

간첩은 따로 있다. 그들을 수사하라!

 

대학교 3학년 때 학교를 휴학하고 내가 회사에 처음 와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밤낮 없이 일하는 선배들의 모습이었다. 분명히 월간지라고 들었는데 마감 야근은 당연하고 마감이 없는 때에도 매일 야근을 하는 것이었다. 왠지 할 일도 없고 뻘쭘해서 선배들한테 저녁도 얻어먹으며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배들은 프리랜서 기자로 남의 사보 기사도 쓰고 홍보물도 만들며 수입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 전체가 그런 외부 용역을 통해 부족한 재정을 조금씩 정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알바'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가장 많이들은 말은 "거기 월급은 잘 나오냐?"라는 빈정거림이었는데 3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월급은 밀린 적이 없었다. "월급은 막내부터 챙긴다"는 원칙이 있단다. 그리고 그런 돈을 아껴 마감이 끝나면 함께 사무실 근처에서 맛있는 밥도 먹고 술도 한잔씩 했다.

 

그런데 영수증 내역을 본 수사관이 "회사가 가난한데 무슨 돈으로 이렇게 자주 회식을 했죠?"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아마 그는 북이나 총련 쪽에서 '은밀하게' 흘러들어온 활동자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급 술집에서 몇백만 원어치 술을 마셨냐? 사무실 근처 고깃집에서 삼겹살 먹고 한 시간에 만 원짜리 노래방에서 두어 시간 노래 부르고,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씩 시켜놓고 밤새 이야기했던 것뿐이다. 그게 얼마나 된다고 정치자금이 흘러나왔네 마네 하는 말을 하는 것일까. 그들은 한 번 회식할 때 얼마나 거하게 하기에!

 

공안정국입네 마네, 간첩이 어떻고 빨갱이가 어떻고. 솔직히 말하자면 겨우 20대 중반을 갓 넘긴 내가 듣기엔 '졸라' 촌스럽고 재미없는 얘기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조갑제의 평론를, 그래도 어느 정도 상식을 갖고 있고 있는 평범한 학생들이 되게 우습게 받아들이는 것하고 같은 이치다.

 

뭐 아무튼 앞으로 얼마나 더 '면밀'하고 '세밀'한 수사가 다가올지는 모르겠으나, 이럴 시간에 그들이 이번에 수해를 입은 은평구, 관악구, 강남구 일대의 수해피해지역 복구 작업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들쑤셔봐야 나올 것 없고 밝힐 것도 없다. 자꾸 파헤쳐 봐야 제 얼굴에 침 뱉기에 불과할 것이고 계속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해 봐야 그것은 수사당국의 주관적 판단일 뿐,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꾸 소위 '자유민주주의' 세력들이 "'종북좌익'들이 북에서 김정일의 지령을 받아서 지하간첩단을 조직해 서울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말들을 퍼트리는데 본지는 아직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 우리보다 이북 소식에 더욱 빠른 그들이 '간첩'이 분명하다. 엄하게 애먼 집 들쑤시지 말고 그들을 당장 수사하는 것이 좌익사범을 척결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태그:#민족21, #압수수색,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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