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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오후 네시
책표지오후 네시 ⓒ 이명화
그날, 시내 볼 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아멜리 노통브의 장편소설 <오후 네 시>를 손에 들고 차에 올랐다. 근래엔 이 작가의 책을 자주 접한다. 남편이 운전하고 있어 나는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기대에 찬 마음으로 소설의 첫 장을 펼쳤다. 자동차 시동이 걸리고 부웅 소리를 내면서 길에서 미끄러지듯 바퀴가 움직였다. 골목을 벗어나고 있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내 책상 위에 높이 쌓여 있다. 읽기와 쓰기를 병행하다보니 미뤄둔 책들이다.

해서 작은 틈만 있어도 책을 읽고 싶어서 어디든 옆에 끼고 다닌다.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 시> 제목부터가 마음을 끈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어가던 나는 더는 앞으로 읽어나가지 못하고 가슴 먹먹해져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p9)

이 대목에서 나는 뒤이어지는 문장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차는 골목을 벗어나 큰 길로 접어들었고 쌩쌩 달려서 강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마치 요즘 내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살다보면 내가 내 자신을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때의 당혹스러움이란...나도 가끔 내가 너무 낯설다. 그런 내 자신을 다 알 수가 없다. 단순하고도 자명해 보이던 삶이, 내 자신의 모습이 가끔 나의 또 다른 모습에 황망해 한다. 점점 이해할 수 없어진다. 내 안에는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공존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이 조금 위로가 된다. 마치 달래고 어루만지는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p9)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주인공 '나'가 그동안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해온 육십여 년의 삶, 그것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맨 마지막 문장..."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p184). 이것이 주제다.

사십여 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쳐 오던 '나'는 이제 정년퇴임을 하고 아내와 함께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싶어서 목가적인 느낌이 드는 숲 속 작은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호젓한 숲 속 빈터에 자리잡은 작은 집에서 '나'는 아내와 함께 고요한 날들을 보내리란 기대에 차서 행복에 겨워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똑같이 생긴 집을 갖고 있는 이웃 노인의 등장으로 평화를 꿈꾸던 생활은 헝클어지고 만다.

전직 심장전문의였다는 이웃 노인은 40년 동안 이 숲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이웃 노인은 매일 오후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나'의 집 문을 두드린다. 오후 3시 59분도 아니고 4시 1분도 아닌 정확한 시간 네 시가 되면 찾아오는 이 손님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소파'에 앉아 묻는 말에는 '예'와 '아니오'로 일관하면서 정확하게 오후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평화롭고 호젓한 숲속 생활을 꿈꾸던 이들 부부는 점점 괴로워진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이웃의 방문을 거절할 수도 있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평생 몸에 밴 습관인 예의를 한 순간에 버리기란 쉽지 않다. 한 번은 이웃남자에게 아내와 함께 방문하도록 청한다. 사람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살덩어리인 이웃 노인의 아내를 데리고 방문, 점점 힘들게 꼬여 가는데, 더는 그의 방문을 견딜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분노하며 쫓아내버린다.

거짓말처럼 이웃 남자는 그 후로 방문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오후 4시만 되면 이웃 남자가 방문해왔기에 파블로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인 행동을 한동안 계속한다. 어느 날 이웃남자가 자살기도를 한다. '나'는 자살을 시도했던 이웃을 구출하는데, 문득 깨달음이 온다. 이웃 남자는 더 이상 삶을 계속할 이유가 없고 오직 '공허'만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웃 남자의 삶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 날, 아내한테도 말하지 않고 밤중에 몰래 이웃남자의 집을 방문하고, 베개로 눌러 이웃 노인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일흔 살의 뚱보 노인이 죽었다고 해서 아무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 눈이 내렸고 눈이 녹았다. 눈이 녹아 없어지듯 '나'가 행한 일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목가적이고 평화롭게 시작한 소설은 블랙 코미디로 막을 내린다. 서늘한 무엇인가가 훑고 지나간다.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두 달 전 여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 어를 가르쳐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p184)

결론은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것. 40여 년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쳐 온 '나'로 아내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주인공 '나) 예순 다섯 살이 되도록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그러니까, 베르나르댕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저, 아내인 줄리에트와 예순 다섯 살이 되기를 바랐고 속세라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리고 드디어 퇴임 후 숲속으로 이사 왔던 것이다.

예순 다섯 살, 그 나이에도 내가 몰랐던 '나', 전혀 생각 못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사람은 일생동안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만 아는 데만 해도 어쩌면 일생이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죽음의 자리까지도 나를 모르고 갈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 아니 다른 사람, 그 한 사람은 또 어찌 알까.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 어찌 너를 알까.

내가 수수께끼와 같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모양의 의문부호들이다. 퍼즐 맞추기, 미로 속이다. 일생동안 얼마나 길을 찾고, 퍼즐 마지막 것까지 맞출 수 있을까. 새삼 내가 낯설고 삶이 낯설다.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열린책들(2012)


#오후네시#아멜리 토봉브#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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