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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인천연안여객터미널 대기실에는 승선을 기다리는 250여 명의 인원들로 북적거렸다. 이들은 생태와 평화의 섬, 제주도를 향해 출발할 제주피스보트의 '선원'들이다. 수속이 마무리 된 오후 6시 30분, 선원들이 모두 배에 오르자 제주피스보트는 제주도를 향해 출항했다.

트래블러스 맵, 제주생태관광, 노리단 등 13개의 사회적 기업들이 기획·진행한 이번 제주피스보트는 '배 위에서 인문학과 춤추고 제주에서 평화를 노래하며 자연을 만나는 에코여행'이라는 주제로 4박 5일 동안 진행됐다. 

 지난 20일, 제주를 향해 출항한 제주피스보트에 참가자들이 승선하고 있다
지난 20일, 제주를 향해 출항한 제주피스보트에 참가자들이 승선하고 있다 ⓒ 김재우

평화를 실어 나르는 피스보트 위에서 펼쳐진 축제

일본에서 최초로 시작된 피스보트는 '평화를 실어 나르는 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난 1983년 일본 정부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주변국과의 마찰이 생기자 일본 내에서 대학생들이 교과서가 아닌 직접 현지에 가서 보고 듣고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움직임으로 피스보트가 만들어졌다.

일본의 피스보트는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 전역으로 여행 범위를 넓혀 반전·평화·인권·환경·반핵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피스보트가 전 세계를 일주하는 동안 피스보트 안에서는 세계의 주요 현안과 문제점·대안 등을 토론하고 강연회가 열리며 문화 체험을 위한 행사가 펼쳐진다.

제주항으로 향하는 제주피스보트에서도 다채로운 행사들이 펼쳐졌다. 비록 13시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후쿠시마 이후의 문명'에 대한 대담회와 사회적 기업들의 워크숍 등이 선내에서 진행됐다. 대담회에는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일본의 평화운동가인 마사키 다카시, 전길남 일본 게이오대 석좌교수 겸 KAIST 전산학과 명예교수, 조미수 일본 피스보트 스탭 등이 함께 참여해 3월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주로 향하는 제주피스보트에서는 다양한 워크숍이 진행됐다. 사진은 리블랭크 팔찌 워크숍의 한 장면
제주로 향하는 제주피스보트에서는 다양한 워크숍이 진행됐다. 사진은 리블랭크 팔찌 워크숍의 한 장면 ⓒ 김재우

선내 곳곳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제주피스보트 참가자들은 목공 워크숍, 힐링댄스 워크숍, 리블랭크 팔찌 워크숍 등 사회적 기업들이 진행하는 워크숍에서 참가해 직접 체험하는 기회도 가졌다. 또 갑판에서는 참가자들이 헤드셋을 착용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소음 제로' 디스코가 진행되기도 했다. 언뜻 보면 음악도 없이 춤을 추는 것 같았지만 달빛과 별빛만 가득한 망망대해에서 참가자들은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역동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갑판에서 진행된 '소음 제로' 디스코의 한 장면. 참가자들은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갑판에서 진행된 '소음 제로' 디스코의 한 장면. 참가자들은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 김재우

제주에 도착한 이후 제주피스보트는 초등제주캠프, 청소년 제주여행학교, 청년창의리더십캠프 등으로 나뉘어졌다. 이외에도 세계자연유산, 제주의 오름과 역사 등 테마별로 나뉘어져 나머지 일정이 각각 진행됐다.

제주피스보트에 함께한 특별한 손님들

기자는 '특별한 친구들'이 이번 제주피스보트에 함께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행사 3일 째인 금요일, 웃뜨르 빛 센터에서 압화 공예 실습을 하고 있던 청소년 팀을 찾았다. 스무 명의 아이들은 꽃잎을 누르고 건조시킨 뒤 얇은 나무 조각 위에 붙여서 목걸이를 만드는 공예 작업에 푹 빠져있었다.

아이들을 계속해서 지켜보던 중 담당 교사의 도움으로 4명의 중학생들을 소개 받을 수 있었다. 4명의 친구들은 여느 아이들과 다른 점이 없어보였다. 다른 점이 단 하나 있다면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유성기업 노동자라는 점이다.

초등학생 6명, 중학생 4명 총 10명의 아이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남지부의 지원으로 제주피스보트에 승선하게 됐다. 전교조 충남지부 소속 교사들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자녀들의 심리치료 과정 중에서 아이들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성기업 노동자 자녀들이 제주피스보트 프로그램을 통해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뜻을 모았다. 모금이 시작되었고 결국 아이들은 지난 20일 제주피스보트에 오를 수 있었다.

"아빠가 많이 힘들어 하세요. 요즘 매일 술만 드세요"

4명의 아이들 중 가장 처음 만난 용석이(가명·14)는 압화 공예 실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꽃잎을 옮겨서 어느새 예쁜 목걸이 두 개를 만든 용석이에게 '이 목걸이를 누구에게 선물할거냐'고 물었다. 용석이는 고민할 새도 없이 "부모님이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용석이는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세요. 요즘 매일 술만 드세요"라고 말했다.

 용석이(가명)가 만든 압화 공예 작품. 오른쪽 작품을 아버지에게 선물한다고 한 용석이는 가운데에 몰려있는 꽃을 두고 "뭉치면 산다"고 말했다.
용석이(가명)가 만든 압화 공예 작품. 오른쪽 작품을 아버지에게 선물한다고 한 용석이는 가운데에 몰려있는 꽃을 두고 "뭉치면 산다"고 말했다. ⓒ 김재우

용석이가 열심히 만든 두 개의 목걸이 중 하나는 유독 가운데에만 꽃이 집중적으로 붙어있었다. 용석이에게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더니 "뭉치면 살기 때문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용석이는 '뭉치면 산다'는 말에 대해 "엄마가 가족대책위원회 인터넷 카페에 들어갈 때마다 듣는 노래 가사"라고 설명했다. 유성기업 사태는 어느새 아이들의 삶 속에서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다.

 압화 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는 민석이(가명). 민석이도 두 개의 목걸이를 부모님께 선물하겠다고 말했다
압화 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는 민석이(가명). 민석이도 두 개의 목걸이를 부모님께 선물하겠다고 말했다 ⓒ 김재우

압화 공예 시간이 끝나고 이제 승마체험 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잠시 그늘이 있는 벤치에서 민석이(가명·14)를 만났다. 민석이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는데 역시 부모님께 선물할 거란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지금까지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어서요"라고 말한다. 민석이 옆으로 또래의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서로 장난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통령이 연봉 7천만 원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지 않아요"

점심식사가 준비되는 시간 동안 종현이(가명·16)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종현이는 유성기업 사건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종현이의 아버지는 종현이가 태어날 무렵부터 유성기업에 다니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종현이는 "자동차 엔진 부품으로 들어가는 피스톤링을 만드는 회사로 국내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약 80%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부터는 종현이가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연봉 7천만 원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지 않아요. 연봉에다가 야간수당에다가 보너스를 합쳐도 그 정도는 안 돼요. 진짜 그렇게 받는 분들은 없는데…."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종현이는 가끔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접한단다. 하루는 종현이도 얼굴을 알고 있는 아버지의 친구 분이 머리를 다쳐서 피를 흘리는 것을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본 적도 있다. 종현이는 "용역들이 하는 짓을 보면 가끔 숨이 넘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종현이는 아버지에 대해 "집에서는 힘들어도 표현을 잘 안 하시는 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요즘들어 아버지께서 힘들어하시는 것이 자주 눈에 보인단다. "날씨도 더운데 아버지가 계시는 비닐하우스는 얼마나 더울까요" 종현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방학이 되면 종현이네 가족은 전국으로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가장 많이 갔던 곳은 강원도인데 기억나는 곳만 해도 열 곳이 넘는다고 자랑한다. "최근 들어서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지는 못했지만 어서 빨리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종현이(가명·왼쪽 두 번째), 용석이(가명·세 번째) 민석이(가명·네 번째)가 승마체험을 하기 위해서 걸어가고 있다.
종현이(가명·왼쪽 두 번째), 용석이(가명·세 번째) 민석이(가명·네 번째)가 승마체험을 하기 위해서 걸어가고 있다. ⓒ 김재우

제주피스보트를 기획·진행한 변형석 트래블러스 맵 대표는 "청소년기에 있어서 여행이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고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억눌린 것을 발산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며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더라도 이런 억눌림을 발산해내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이번 제주 피스보트를 통해 유성기업 친구들 마음 속 앙금이 풀어지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성기업 노동자 자녀들의 제주피스보트 참가를 추진한 김금자 전교조 충남지부 수석부지부장도 "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경찰서에 가고 해고통지서를 받는 것을 모두 지켜봤다"며 "이런 충격과 상처받은 마음을 제주피스보트를 통해서 털어내고 기운내서 건강한 마음을 생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주피스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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