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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일 필자의 집에 방문하신 이소선 어머니와 즐거운 한때
 2006년 9월 2일 필자의 집에 방문하신 이소선 어머니와 즐거운 한때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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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연일 계속되는 폭염을 피해 이날도 새벽에 밤밭으로 나가서 풀베기, 가지치기를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이 울린다. 이른 아침인데 누가 전화를 한 것일까? 핸드폰을 열어보니 '전태삼'씨가 전화를 한 것이다.

아차! 내가 먼저 어머니한테 전화를 드려야 하는데, 또 어머니께서 나한테 먼저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매번 어머니께서 먼저 전화를 해 언제 서울에 올라올 거냐? 올라오면 꼭 들르라고 당부하시고, 목소리라도 들었으니 좋다고 말씀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때마다 늘 송구스러워 다음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도 내가 전화를 드리지 않고 먼저 전화를 하신 것이 아닌가 싶어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전화를 받아보니 전태삼씨가 매우 지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니가 어젯밤에 쓰러지셔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가셨다.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시고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계신다."
"무슨 소리야! 어제(18일)도 어머니하고 통화했었는데, 건강은 어떠시느냐고 했더니 다리가 아파서 걷기가 불편해서 그렇지 다른 데는 늘 그만그만하시다고 했었는데, 그리고 말씀하시는 목소리에서도 이전보다 크게 나빠지신 것 같지 않으셨는데…."

"그러게 어젯밤에 심장이 멎으셔서 급하게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오셨다."
"알았어, 내가 바로 서울에 올라갈 테니 오후에 병원에서 봐."

황망한 상태에서 전화를 끊었다. 이러다가 무슨 일이 생겨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지금 밤나무 밭에 밤이 실하게 열려 여물어가고 있는데, 올가을 저 밤들이 익으면 실하고 잘생긴 놈들만 골라서 어머니한테 보내드리고, 그 밤으로 밥을 지어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기로 어머니하고 약속했는데 어쩌지!

어머니께서 작년 여름에도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때는 의식을 잃거나 심장이 멎는 정도로 심하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작년 상황하고는 다른 것 같아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어머니한테 더 자주 찾아가고, 귀찮을 정도로 전화라도 자주 드릴 걸… 후회가 밀려온다.

"구례? 그냥 서울에 있으면 안 돼?"

나는 올 1월에 지리산과 섬진강이 있는 이곳 구레로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내가 구례로 내려오기를 결정한 뒤 어머니를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어머니 저 서울을 떠나 구례로 내려가 살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잠시 어리둥절해하시더니,

"왜? 구례라면 꽤 먼데 뭐하러 그런 데로 가… 그냥 서울에 있으면 안 돼?"
"그러게요. 멀기는 먼데 이제 구례도 예전처럼 멀지는 않아요. 교통이 좋아져서요. 서울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특별히 없는 것 같아요. 지리산과 섬진강이 있는 구례같은 곳에 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에서 뭔가를 배우고 싶어요.

지금까지 해온 노동운동이니 민주화운동이니 하는 것도 다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노동운동도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70년대에는 불과 손에 꼽힐 정도의 소수가 했잖아요. 그때는 감히 전국단위의 조직은 꿈꾸는 정도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전국단위의 조직도 있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까지도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에 있어서도 그동안 법과 제도를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어쨌든 법과 제도도 바꿔보기도 했고, 또 정권교체도 해 보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역사가 퇴행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양은 예전에 비해 엄청 커졌고, 경험도 풍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우리들 자신한테 문제가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들어요. 즉 모든 문제는 구호나 주장이나 이념이나 거대담론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 자신부터 돌아보고, 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변화시키는 길을 찾아보려고 해요."

장황하게 늘어놓는 내 말을 아무 말씀 없이 듣고 난 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할 수 없지. 그럼 자주 못 보겠네. 자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머니께서는 이제 하나하나씩 내 곁을 떠나간다는 생각을 하신 듯 쓸쓸함이 스쳐 지나가는 표정을 감추고, 담담한 듯 말씀하신다. 내려가야겠다는 것을 미뤄볼까! 일순간 나도 흔들린다.

"어머니 요즘은 그렇게 멀지도 않아요. 제가 자주 오면 되잖아요."
"선영이 엄마가 구례에 살면서 자기 집에 한번 오라고 노래들 부르듯이 했는데도 못 갔는데, 종덕이가 구례에 가서 산다니 한번 내려가 봐야겠네. 시골에 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기도 하고…."

"네, 어머니 꼭 한번 오세요. 올봄에. 날 풀리고 꽃이 필 때 세상 짐 다 내려놓고 그냥 꽃구경, 산천 구경하면서 쉬어봅시다."  
"알았어, 봄에 한번 갈게."

"섬진강에 꽃이 피는 봄에 오시면 좋겠어요. 지리산에도 가고, 그러려면 산수유 피고 매화꽃 필 때면 좋겠는데 그때는 어머니한테 추워서 무리가 될 테니 조금 더 지나서 벚꽃이 필 때면 좋겠습니다. "

순간, 나는 어머니의 예닐곱 살 시절을 떠올려본다. 내가 1990년도 어머니 회갑을 맞이해서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일생을 어머니로부터 구술을 받아 회상록을 정리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편이다.

질곡의 현대사 속에서도 풋풋한 청춘은 있게 마련이다. 어머니한테도 그 풋풋한 청춘은 있었나니, 이번 봄에 그 찰라같은 짧은 청춘이나마 안겨 드리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1990년 이소선어머니 환갑을 맞이하여 출판된 이소선어머니 회상록. 어머니께서 구술하시고 필자가 정리했다.
 1990년 이소선어머니 환갑을 맞이하여 출판된 이소선어머니 회상록. 어머니께서 구술하시고 필자가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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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을 한결같이 살아오신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는 누구인가? 1970년 11월 이 땅의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모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스물두 살의 젊은 청춘을 불사른 전태일의 어머니 아니던가!

어머니는 그때 숯검뎅이의 아들을 부여잡고,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뜻 어머니가 대신 이루어 주세요"라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40여 년을 한결같이 살아오신 분이다.

박정희 유신독재, 전두환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3번의 징역을 사셨고, 소위 문민정부에서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도 고통 받는 노동자들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히 사실 수가 없었다. 이제 연로하셔서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가 없는 마당에서도 퇴행하는 역사에 한숨 쉬는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 분이다.

이런 어머니께 단 며칠이라도 당신을 위한 날을 갖게 해 드리고 싶었다. 나는 이때부터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니 새봄을 어떻게 장만할까 설렜다.

봄이 오면 날이 풀리고, 날이 풀리면 꽃이 필 테고 그 꽃길 따라 작은 선녀(小仙)가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노고단 근처까지는 휠체어를 타고 오를 수 있다) 봄바람에 솟아나는 풀들을 바라보며 또는 한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운해를 바라보며 무슨 꿈을 꿀까? 궁금했다. 어떤 날은 야무지고 키 작은 예닐곱 처녀가 섬진강 둑길에 피어난 꽃들을 흩날리면서 나풀나풀 무슨 춤을 출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어머니께서 세상의 짐을 다 내려놓으시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셔서 마냥 행복해 하실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말벗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에 적합한 말벗으로 어떤 사람이 좋을까? 정말 인생의 참맛을 알고,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연륜이 있는 분이 누구일까? 고민해 보았다.

어머니가 오시면 몸이 불편하시니까 아무래도 씻고, 대소변을 보시는 것이 힘드실 테니까 시골 농가주택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수세식 화장실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감하는 건축노동을 하는 김환기씨의 도움을 받아 수세식 화장실도 내 손으로 만들었다.

드디어 봄이 왔다. 산수유가 피고, 매화가 터지고, 날이 점점 풀리면서 드디어 벚꽃이 섬진강 둑길 따라 혼미하도록 피었다. 그런데도 벚꽃이 피고 지고, 진달래가 피고 지고, 철쭉이 피고 지고, 요즘 원추리꽃이 만발해도 어머니께서는 아직까지 오시지 못했다. 먼길을 오시는데 자신감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대신 전화 통화로만 꽃구경을 하시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여름은 너무 더워서 안 되고 가을이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더니….

"가야 할 텐데…… 꼭 한 번은 가야 할 텐데…."
"어머니 자신이 없으시면 꼭 안 오셔도 되는데… 우리가 밤나무가 심어진 산을 구입했어요. 가을이 되면 밤 엄청 열릴 거예요. 사람들 와서 밤 실컷 주워가고, 그 중 잘 익고 좋은 놈만 골라서 보내드릴 테니까 밤 많이 드세요. 어머니 밤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잘했다. 고맙네."
"어머니 올가을부터 어머니 드실 밤 제가 다 보내드릴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아이고 고맙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서울 올라오면 꼭 나한테 왔다가."
"그럼요. 어쨌든 어머니 건강하시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어머니는 앞으로 아무것도 신경쓰지 마시고 그저 건강하게 사시는 것만 신경쓰세요. 어머니가 건강하게 살아계신다는 것 자체가 큰일을 하시는 것이니까 어디어디 가실 생각 하지 마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건강하시기만 하세요."

어머니, '아이고 잘 잤다!' 하시면서 기지개 켜고 일어나시길...

어머니는 밤을 참 좋아하신다. 깐 밤을 쪄서 으깨어 밥 대신 드시기도 한다. 밤을 거의 주식으로 드셔도 될 정도이다.

얼마 전에 밤꽃이 지고, 이제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들어앉아 밤이 튼실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저 밤을 드셔야 할 어머니께서 의식을 찾지 못하시고 중환자실에서 주무시고만 계신다. 나는 속으로 기도를 한다.

"어머니, 저 밤이 익기 전에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올가을 토실토실 익은 밤으로 밥도 해 먹고 떡도 해 먹고 별거별거 다 해 먹으면서 청계사람들 다 모아놓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웃어봅시다. 어머니 지금 그냥 주무시고 계시는 거지요? 긴긴 꿈속에서 사랑하는 큰아들 전태일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고 계시는 거죠?"

어제(7월 22일)부터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지셨다. 오후 7시에 면회를 가서 뵌 어머니는 이전과 다르게 혈색이 좋아지시고, 숨소리도 힘이 있다. 무엇보다도 입술을 스스로 움직이신다. 곤하게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다.

저러다가 눈을 뜨고 "아이고 잘 잤다!"하시면서 기지개를 켜시면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태그:#이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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