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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세 황보출 할머니.
 87세 황보출 할머니.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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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극단 '봄봄' 창단 멤버, 제3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 대상, 제10회 서울여성영화제 출품작 다큐멘터리 <황보출, 그녀를 소개합니다> 주인공.

황보출 할머니(78)를 소개하려면 많은 수식어가 필요하다. 누구의 딸, 아내, 어머니가 아닌 오직 황보출 그녀만을 부르는 말들이다.

"아이고 감사해라. 날 보러 여기까지 와주고. 우리 애들도 그래요. 구룡포 촌 할매가 서울 와서 출세했다고요."

지난 6월 21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푸른시민연대 어머니 학교에서 문자해득 3단계 수업을 받고 계시는 할머니를 만났다. 더운 날씨였지만 두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지난 7년간 인천에서 이문동까지 무려 2시간씩 전철로 통학을 하고 계신다는 할머니. 연로한 연세에 오고가는 4시간이 힘들 만도 하지만 피로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다.

"죽도록 아프지 않으면, 무슨 큰 일이 있지 않으면 안 빠져요. 7년 동안 공부하러 다니면서 빠진 날은 며칠 안 돼요. 내가 뭐 하나 하면 꾸준히 하는 편이거든. 머리는 나빠도 꾸준히 하니까 이래 된 거예요. 처음엔 연필을 어떻게 잡는지도 몰라서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사실 지금도 읽고 쓰고 하지만 아직도 이기 맞는가 싶고 자신이 없어요. "

호미나 곡괭이, 낫같은 농기구는 내손처럼 편하게 사용하시는 할머니지만 70 평생 연필은 한 번도 잡아본 적 없기에 작은 연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웠다.

"신랑 있을 땐 글자 한 자 몰라도 불편함이 없었어요. 어디를 가도 영감이 데불고 다니고,  은행이고 동사무소고 문중이고 다 영감이 다니면서 했으니 아쉬울 일이 없었지. 그런데 우리 영감 가고 나니 참 막막하데요.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려니 이름을 쓸 줄 알아야지.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써주고 그랬어요. 어디를 가려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숫자도 몰라, 글자도 몰라. 만날 물어보고 타려니 창피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우째 살았는지 몰라요."

"내 이름이 황보출인지도 몰랐어"

독립영화로 제작된 할머니의 일상. 제 10회 여성영화제 출품작 '황보출 그녀를 소개합니다'
 독립영화로 제작된 할머니의 일상. 제 10회 여성영화제 출품작 '황보출 그녀를 소개합니다'
ⓒ 지민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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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몰랐던 할머니는 혼인신고 하는 날까지 자신의 호적상 이름이 '황보출'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지난 19년 동안 부모님도 형제들도 일가친척들도 모두 '연이야'라고 불렀기에 당연히 자신의 이름이 '황보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혼인신고를 하러 갔는데 우리 신랑이 나보고 '당신 이름이 연이 아니고 출이네' 카는기라. 깜짝 놀라서 그기 아이라 했디만 호적에 출이라고 나와 있는데 우짜겠냐는 기야. 하참~ 그땐 정말 창피하더라구요." 

1933년 경남 포항군 구룡포읍 구평리에서 태어난 할머니. 대대로 남의 집 몸종살이를 하던 집안이었던 탓에 아버지 역시 일만 할 줄 알았지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다. 글을 몰랐던 아버지가 딸의 출생신고를 남에게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연'이라는 이름을 잊어 버리고 생각나는 대로 '출'로 신고를 해버린 것이다. 혼인신고를 하러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부모님께 섭섭하진 않았다.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이 허다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집안에 맏딸로 태어난 할머니. 남의 집일을 하러 다녔던 부모를 따라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살던 유년시절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난한 가정이다 보니 태어나서 일할 만하면 남의 집으로 보내는 거예요. 남자는 큰 머슴으로 가면 일 년에 벼를 열 가마씩 태워 주기도 했지만 여자는 그저 밥만 먹여주면 그만이었지요. 나도 어릴적엔 일년에 네댓 번씩 이사를 다닌 기억이 나요. 일감 주는 집 찾아다니느라 그랬겠지요."

한동안 부모님처럼 남의 집살이도 했지만 열대여섯 먹으면서부터는 행상을 시작했다. 고등학교까지 배운 오빠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월급쟁이보다는 보수가 좋았던 뱃사람의 길을 택했고 그나마 오빠마저 군대에 가고 난 후부터는 할머니 혼자 집에 남은 두 동생과 부모님의 생계를 도맡다시피 했던 것이다.

"아홉 살 먹어서 아버지가 징용을 가시고 나니 살림이 더 어려워진 거예요. 오빠가 바닷일을 하니까 나도 자연히 선창가에서 행상을 했어요. 고깃배가 들어오면 고등어, 꽁치, 오징어 같은 걸 한 다라이 받아서 파는 거예요. 멀리 팔러가기도 했어요. 여섯 살에 구평리에서 나와 포항읍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래도 고향으로 고기를 팔러 가면 잘 사주데요. 그기 고기를 보고 사는 것이 아이고 내 얼굴을 보고 팔아 주는 기지요. 생선 팔아서 쌀이고 부살(?)이고 받아서 또 그렇게 이고 오는 거예요."

학비 대느라 밤낮없이 일... 말 못하게 어려웠지

생선장사, 담배장사, 떡장사는 물론이고 오징어 건조공장, 꽁치 통조림공장, 그물보수작업까지 뭐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안 해본 일이 없지만 대대로 내려온 가난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열아홉에 중매가 들어왔는데 우리 집에서는 돈이 없어 못 치운다고 했어요. 그래도 총각 집에서 하도 하자고 조르니 부모님이 시집가서 밥이나 실컷 먹으라고 치웠지요. 논 9마지기 밭 1200평 큰 농사를 짓는 집이니 굶기지는 않겠지 한 거예요. 근데 밥이 문제가 아인기라.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어머니 극단 '봄봄'의 연극 <엄마>에 출연한 황보출 할머니
 어머니 극단 '봄봄'의 연극 <엄마>에 출연한 황보출 할머니
ⓒ 극단 '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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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서 8남매를 낳은 할머니. 못 배운 한이 깊었던 할머니는 자식들만큼은 어떻게든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일을 했다.

"애들 공부 가르칠 욕심에 밤낮없이 일을 했어요. 밭농사를 하다가 돈이 안 되겠다 싶어서 담배로 바꾸았지. 1200평 담배농사를 22년을 지었어요. 못 배운 한 때문인지 어디가도 애들 교복 입은 학생들만 보이는 거예요. 내 눈엔 세상에서 그게 제일 부럽더라구요. 사실 우리 신랑은 교육에 관심 없었는데 나 때문에 같이 고생했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 욕심에 담배를 수확하고 난 밭에 채소를 심어 이모작을 했다. 시금치, 호박, 상추, 무, 배추... 밤11시까지 작업을 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포항시장으로 팔러나가면 한겨울 살을 에는 바닷바람이 얼마나 추웠는지... 잠도 줄이고 먹을 것조차 아껴가며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들 학비 대느라 얻어 쓴 은행 빚, 사채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말도 못하게 어려웠지요. 촌에서 농사 지어가 애들 여덟을 키웠는데 여덟 중 여섯을 대학 보냈고 그중에 넷이 졸업을 했어요. 막내아들이 스물둘에 대학을 갔는데 그때 우리 집에 대학생만 4명이었어요. 애들도 노력해서 장학금 받아가면서 힘들게 학교 다녔지만 나도 뒤 대느라 나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와요."

학교에 나왔더니 인생이 달라졌어

손톱 여물을 썰어가며 땀과 눈물로 키워낸 자식들. 여덟 아이 중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고 잘 자라준 것도 고마운데 이제는 엄마의 든든한 후원자며 지원자까지 되어주니 더욱 감사하다. 홀로된 엄마의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을 헤아려 한글학교를 권한 것도 막내딸이다.

"막내 딸 권유로 여기오고부터는 인생이 달라졌어요. 시어머니와 남편이 나흘 사이에 차례로 돌아가시고 나니 정말 살고 싶지도 않고 하늘이 부끄럽기만 하더라구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친구도 있고, 선생님들도 계시고, 몰랐던 글자도 가르쳐주고요. 하다 보니 글짓기대회 나가서 상도 받고, 연극도 해보고, 영화도 찍고. 애들만 바라보고 살 적에는 보람은 있어도 이런 행복을 못 느꼈는데 이제 내 인생을 사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몰라요." 

배우지 못한 설움과 한으로 오직 자식들 학교 뒷바라지에만 매달린 지난세월. 돌아보면 어찌 살아 왔는지 눈물만 나는 시간들이지만 이제는 마음속에 응어리로 품고 살지 않기로 했다. 연극을 하고 자서전 쓰기를 하면서 아픈 시간의 기억들을 하나씩 토해 놓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하고 계신 것이다.

할머니가 쓰고 그린 시화. 호박꽃
 할머니가 쓰고 그린 시화. 호박꽃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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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할 때도 연습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우리들 이야기로 만든 연극이었거든요. 요즘엔 자서전 쓰기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무식하고, 가난하고, 답답했던 시절이야기를 글로 쓰려니 눈물부터 나와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시원하고 맺힌 한들이 다 풀어져 나오는 것 같아요. 창피해서 누구에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지만 못 쓰는 글로라도 쓰다 보니 후련하더라구요. 진짜 너무 좋아요."

가난과 전쟁, 가부장적 사회제도 속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할머니. 할머니에게 한글교육은 문자를 익히는 기능습득 그 이상이다. 배움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함은 물론이고 잃어버렸던 자신감과 자존감을 되찾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향유하는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고 계신 것이다.

"올해부터는 마치는 사람들에게 초등학교 학력인정서도 준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 나이 내가 뭘 더 바라겠어요. 그저 이 몸 있을 적에(생전에) 열심히 경전 읽어서 내 업(業)을 다 내려놓고, 후손들 보라고 못 쓴 글이라도 몇 자 남겨놓고 가는 것이 소망이에요. 나중에 자식들이고 손자들이고 그거 보면서 '그래 우리 엄마가,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사셨구나'... 그래주면 제일 고맙겠어요."

내년 3월이면 자랑스러운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되신다며 벌써부터 마음 설레하시는 할머니.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 없어 배움이 한으로 맺혀있는 할머니에게 초등학교 졸업장은  열심히 살아오신 당신 삶에 드리는 귀한 훈장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가 쓰고 계신다는 자서전 역시 기대가 크다. 늦게 배운 글이라 어눌하고 투박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는 할머니의 자서전. 생각 같아서는 할머니의 자서전이 자식들에게 읽히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세상에 나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는 좋은 책이 되었으면 한다. 노년에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무학력 성인을 위한 문자해득 프로그램은?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곽노현)은 지난 4월부터 초등학교 15곳, 문해 교육기관 16개 기관 총 31개 기관에서 초등학력 취득이 가능한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무료로 운영되며 외부기관에 따라 3만 원의 수업료를 받는 곳도 있다.

만18세 이상 저학력, 비문해 성인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각 단계 중 자신의 수준에 맞는 단계부터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고, 3단계부터 이수할 경우 최소 1년 만에 초등학교 졸업학력 취득이 가능하다.

수업은 한글과 초등 1∼2학년 과정을 배우는 1단계와 초등 3∼6학년 교과를 반영한 2·3단계가 있으며 각 단계의 이수 기간은 1년이다.


태그:#문해교육프로그램, #서울시교육청, #푸른시민연대, #황보출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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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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